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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

category 리뷰/책 2022. 4. 12. 09:45
상상이 아닌 실제에 나는 약하다.
이 일이 불과 80년 전 벌어진 일이라 생각하면 책을 읽는 내내 소름이 끼칠 수 밖에 없었다.
 
식민지 조선에서 청년기를 보내던 그는 어느날 갑작스레 타국으로 향했다.
 
1923년생. 그가 조선을 떠나 남방으로 향한 것은 1942년. 정확히 스무살이었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후 태평양을 전쟁의 화마에 빠져들게 만들기 시작한 다음 해였다.
 
그는 전라북도 남원의 유명 양반가인 삭녕 최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탄탄한 지주 집안이었으나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하고 반봉건 의식이 일반화되면서 집안은 이전처럼 유지될 수 없었다.
집안이 소유하고 있던 논밭은 흩어지고 전쟁 이후 징병과 징용이 시작되면서 집안에도 불화가 닥쳤다.
 
내선일체를 주장한 일본인은 조선인 청년들도 일본을 위한 전쟁에 차출되어야 한다며 군속 모집을 대대적으로 단행했다.
당시 포로감시원은 일본군이 전쟁을 수행하며 사로잡은 적군인 미국군과 영국군 포로를 감시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최씨 집안 형제 중에도 하나는 희생되어야 했는데 차남이었던 최영우는 집안을 위해 그렇게 희생의 길을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부산 서면의 노구치 부대에서 혹독한 훈련을 2달간 받았고 사이공을 들렀다 9월 10일 싱가포르를 찍고 말레이시아 창이 포로수용소를 찍고 다시 9월 14일 자카르타의 포로 수용소로 이동했다.
가는 동안 거친 풍랑 속에 난파의 위험을 몇 차례나 겪으며 겨우 살아 도착했다.
 
하지만 자카르타도 끝이 아니었다. 그의 최종 목적지는 말랑이었다. 자바 섬은 인도네시아 중심 섬으로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 포로수용소 사령부가 존재한 만큼 전략 지역이었다.
 
일본이 오기 전 이 곳은 네덜란드의 점령지였다. 때문에 일본군이 인도네시아에 왔을 때 피부색이 비슷하고 골격이 같은 탓에 인도네시아 국민들은 이들이 점령군이 아니라 자신을 구원해줄 자로 여겼다.
 
첫 번째 근무지는 말랑 제5분견소였다. 포로는 약 5천 명으로 대부분이 화란인이었고 영국인과 호주인도 일부 있었다. 화란인은 백인이 절반, 동양계 혼혈 2세, 3세가 절반으로 아주 구성이 다양했다.
 
이 곳에도 위안소가 존재했는데 최영우도 이 곳을 방문했다. 대부분의 여인이 조선인임을 알게 된 그는 안타까움을 드러내지만 마음 뿐이었다는 것은 그도 어쩔 수 없는 남성이며 군인이었다는 한계를 드러낸다.
위안소는 동남아시아 전역에 100여 곳 이상 존재했을 것으로 추산된다.
 
1년이 지나고 전쟁은 대치 상태에 접어들었고 태평양 섬들에 끊임없는 공습으로 보급은 제 때에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보급이 끊기자 지방의 각 포로 수용소는 수도 자카르타로 집결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자카르타 총분견소는 지방의 각 수용소 중 가장 규모가 크고 핵심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갑작스런 호명을 받고 어디 가는지도 모른 채 배를 타고 이동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군 점령지를 연합군이 다시 차지하면서 태평양 바다에서는 격전이 벌어졌다. 그가 타고 있던 배도 이동 중 무수한 공격을 받아 격침되어 바다를 떠다니다가 다른 배에 구조되어 겨우 육지에 닿을 수 있었다.
결국 승선 인원 중 30여 명은 실종되었다.
 
일본군은 인도네시아 점령 후 네덜란드인의 자치를 허락하고 비교적 자유를 주며 관리했다. 그러나 1942년 전황이 불리해지자 이들을 한 공간에 억류하는 조치를 시행했다. 초기에 2천여 명에서 시작했던 억류 인구는 전쟁 말미 1만여 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포로수용소와 다름 없는 처우로 인해 억류인들 중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포로들은 수마트라의 페칸바루 철도 공사를 위해 동원되었는데 무덥고 습한 환경 속에 이질, 말라리아에 쉽게 걸렸고, 부족한 급식으로 영양실조에 노출된 상태였다. 일본군이 이들을 강제 노역에 마구 동원하면서 사망자는 속출하였다. 이 철도는 '지옥의 철도'로 불렸다.
 
자카르타 포로수용소에서는 수시로 포로들을 이동시켰고 그 때문에 최영우도 싱가포르로 이동하게 되었다.
당시 싱가포르는 네덜란드가 아닌 영국의 식민지였다.
네덜란드인은 화교를 탄압하였으나 영국은 이들의 상업 활동을 허락하였기에 싱가포르는 1940년대부터 동남아시아 최대의 무역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동시에 싱가포르는 영국군의 아시아 최전선 기지 역할을 하였다.
 
싱가포르에 보름쯤 있다가 최영우는 생채소를 오랫동안 제대로 섭취하지 못한 탓에 각기병에 걸린다. 이 때문에 자카르타 분견소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그곳에서 작업을 나갔다가 여인 하푸카스(네덜란드인과 인도네시아인 사이에 태어난 혼혈인)를 만난다.
다시 만날 기약을 하며 일단 그곳에서 그녀와 헤어진다.
 
인도네시아는 300년 넘게 네덜란드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혼혈인이 무척 많았다고 한다.
포로감시원은 청년들이 많았는데 1945년 종전 후 포로감시원이 그들과 결혼하여 현지에 정착한 경우도 존재했다.
 
이후 최영우는 근무지가 또 바뀌어 글로독 수용소로 전근을 가게 되었다. 글로독은 자카르타 지역 중 오래된 역사를 지닌 곳으로 화교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전에는 네덜란드 통치 당시 인도네시아 범죄자나 독립운동가를 투옥했던 장소로 유명한 곳이었다.
 
1945년 6월 글로독 수용소에 독일군 포로가 들어왔다.  독일은 이미 패전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연합군과 싸울 이유가 없어졌고 동남아시아 전선에서 일본군을 돕던 독일군은 투항 후 포로가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다.
 
그가 하푸카스에 대한 애정을 키울수록 전황은 복잡해져만 갔다.
막바지에는 그녀를 만나러 가는 것조차 힘들게 되었다.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 선언이 발표된다.
"일본은 연합국에 대하여 무조건적인 항복을 수락한다. (...중략) 항복한 일본군은 자기 가정으로 돌아가되, 우리들의 포로를 학대한 자를 포함해 일체의 전쟁 범죄자에 대해서는 엄중한 처벌이 가해질 것이다."
최영우를 비롯한 포로 감시원들은 마지막 조항 때문에 충격과 불안에 휩싸인다.
 
포로감시원들은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연합군 측과 교섭을 벌이려  '조선인 민회'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하지만 그들은 테러와 분란을 일으킬 수 있는 위험한 조직으로 인식되었다.
 
결국 포로감시원들은 승선 명령을 받고 싱가포르 창이 전범수용소로 가게 된다. 이전에 포로수용소였던 이 곳은 전쟁이 끝나고 나서 전범수용소로 바뀌게 되었다.
포로를 감시했던 그는 전범이 되었다.
 
하푸카스와는 헤어진다는 말조차 못하고 그렇게 그곳을 떠나오게 되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만난 사람이었기에 그 애정은 더 각별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헤어진다는 인사만이라도 했으면 조금 나았을 것 같은데 아마 평생의 한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당시 인도네시아는 독립을 외치던 노선의 갈등이 극도로 치열하여 해방 후 한국 상황과 매우 비슷했다.
더군다나 네덜란드는 일본군이 물러나기 이전 자신들의 지위를 탐냈다. 이 때문에 인도네시아 독립군과 화란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은 1945년 8월 17일 시작되어 1949년 12월까지 4년간에 걸쳐 벌어졌고 80만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창이 전범수용소에서 힘겨운 생활을 끝마치고 치피낭 형무소로 왔다. 치피낭 형무소는 20세기 초 네덜란드 식민 정부가 인도네시아 독립운동가를 수감하기 위해 만든 곳이었고 태평양 전쟁 때는 포로 수용소로 이용되었다.
이곳에서는 그나마 하는 일을 선택할 수 있었다. 식사도 조금 나아졌다. 하지만 치피낭 형무소는 열악한 수용 환경으로 최근까지도 고발이 됐을 정도로 악명이 높은 곳이라고 한다.
 
이것에서 최영우의 기록은 끊긴다.
그는 1947년 3월 자카르타 항구에서 조선인 동료 173명을 태운 귀환선에 함께 몸을 실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떠난 것은 1942년 8월, 돌아온 것은 1947년 3월 약 5년 만이었다.
 
그가 돌아왔을 때 식구들은 그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피골이 상접해 있었고 낯빛은 어두웠으며 고된 억류 생활로 우울함이 느껴졌다고 한다.
 
조선을 떠나기 전 그는 하고 싶은 것이 무척 많았던 젊은이였다.
힘든 세월을 견디고 돌아온 그는 어느덧 노총각 대열에 진입해있었다.
 
2002년 작고하기까지 남은 세월을 어떻게 보냈을까. 역시 상상할 수 없는 서글픔과 괴로움이다.
이 책을 읽으며 비슷한 처지였던 이학래를 떠올렸다. 그의 영상과 글이 남아 있으니 추가로 본다면 더 도움이 될 것 같다.
 
 
 
 
 
 

 
달리는 기차에서도, 기차가 쉬고 있는 정거장에서도 전투모와 군인만 보이면 곳곳에서 손을 흔들어 댄다. 실로 지금 이 땅은 환호의 일색이다. 일본군은 해방자이고, 원수 화란을 몰아낸 자이며, 은인이다. 이들에게는 수백 년 만에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 P63
 
이 광경을 처음 목격했던 나는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제는 눈물도 마르고 한숨도 멀어져 버렸다고 하는 게 낫겠지. 하지만 나이 많은 동료 중에는 그녀들과 잘 어울리며 휴일과 근무일을 막론하고 위안소를 자주 찾는 이도 있었다.
포로 감시원 대부분은 이국 여인의 낯선 정취를 좋아했다. - P82
 
그제야 끼리끼리 패를 지어 점검을 하니 가까이 지내던 동료 두 명이 보이지 않는다. 총 삼십여 명이 실종되었다고 한다. 산 사람의 입장에서 동료의 죽음은 슬픈 일이었지만, 지금은 내 목숨을 건졌다는 게 더 중요하다. - P102
 
이들은 어디서나 군소리 없이 줄지어 서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 재촉하거나 꾸짖을 필요는 없다. 그들은 가진 능력 그대로를 성실하게 행한다. - P106
 
하루는 독일인 포로들이 들어와서 따로 수용되었다. 근 몇 년간 일본의 동맹국 군인으로 우리와 함께 협력하여 작전을 수행했지만,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을 했으니 이젠 적군이 된 것이다. 그리고 6월부터는 수용소 신세가 되었다.
"저들은 싱가포르를 기점 삼아 영미군의 배를 공격했다고 하는데."
"일본군 측에서는 믿을수가 없겠지. 전투에 내보냈다가 연합군에 투항하면 역이용할지 모르니까."
"우수운 운명이구먼." - P147
 
나는 금반지와 손목시계를 그녀의 집에 맡겼다.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함께 궁리해 본다. 촌락으로 들어가서 은신하면 어떨까. 내가 여기 새 나라의 국군으로 들어간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나 이곳에 정착해 버리면 조선에서 기다리는 부모 형제와의 재회는 단념해야 하며 이는 불안을 자처하는 행동일 수도 있다. 어느 안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고 안전한 것이 못 되어 결정과 행동으로 옮길 수 없었다. - P165
 
당장은 먹을 것이 문제였지만 앞으로 우리를 어떻게 할 것인지 그 의도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저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사진을 찍어 가는 것뿐이다. 앞으로 찍고, 옆으로 찍고, 그런 식으로 몇 번이고 사진을 찍는다.  - P185
 
석 달이 지나고 넉 달이 되니 늑골이 적나라하게 불거졌다. 마치 뼈로만 걸어 다니는 인간 같다. 어쩌다 수용소 밖에서 작업할 일이 생겼다. 굶주린 우리들은 밭에서 김을 매는 시늉을 하면서 뿌리고 잎이고 먹을 수 있는 것들은 죄다 뜯어 입에 넣었다. - P186
 
언제 교수대가 나를 부를지 모른다. 이 머나먼 이국땅에서 겪는 운명의 장난 치고는 너무 가혹하다.
큰 감방에서 이리저리 사람이 빠져나가고 나를 포함해 대여섯명이 남게 되었다. 이제는 이 감방 안에 한 사람은 저쪽에, 다른 한 사람은 다른 쪽에 고독하게 앉아 있다. - P199
 
예전 생각이 난다. 우리가 포로들을 감시했을 때에 약간의 친절과 연민을 보였더라면, 저들도 지금 우리에게 두 배의 호의와 동정으로 갚으련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들이 우리를 이렇게 대하는 것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간다. -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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