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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미국인 이야기 3

category 리뷰/책 2022. 3. 27. 18:49
미국인 이야기 3권은 건국의 진통이 부제다.
 
영국과의 전쟁이 마무리되고 세금 부과와 국경 정리, 헌법 제정을 위한 과정이 그려진다.
주의 이익을 중요시할 것이냐. 아니면 연합된 정부를 위해 하나의 이익을 중요시할 것이냐를 위한 결정이었다.
진통의 과정이었으나 양보를 통해 각자의 최선보다 모두의 차선의 결과를 이끌어냈다.
 
 
영국은 아메리카 남부 주요 전투에서 중요 승리를 거두었으나 고통은 커져만 갔다.
정보 전쟁에서 뒤쳐졌고 현지인들의 협력은 저조했다. 대륙군이 물러서기를 택했지만 영국군은 이들을 뒤쫓는 과정에서 지쳐갈 뿐이었다.
 
영국군 병사들은 행군 일정만으로 쉽게 지치고 다쳤다.
아메리카군이 치고 빠지는 기습 작전을 펼쳤기 때문에 영국군의 피해는 커져갔던 것이다.
 
패트릭 퍼거슨은 7년 전쟁에 복무한 유능한 스코틀랜드 군인 출신으로 국왕파 민병대의 감찰관으로 지명되었다.
퍼거슨의 지위를 받은 국왕파는 나인티식스부터 노스캐롤라이나 경계 지역을 오가며 적을 상대했고 1780년 여름 끝 무렵이 되자 사우스캐롤라이나 북서부의 아메리카군을 모조리 쫓아냈다.
퍼거슨의 병력은 9월 12일 길버턴에 도착해서 소규모 접전에서 붙잡은 사람을 풀어주면서 반군에게 이런 메시지를 전했다.
"국왕의 병사들과 맞서는 일을 그만두지 않으면 주동자들을 목매달아 죽이고 화포와 검으로 이 지역을 초토화하겠다."
이는 식민지 대항군을 분노하게 하여 집결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퍼거슨은 위협이 왔음을 느끼고 병사들을 킹산 위로 보냈다. 그곳은 사우스캐롤라이나와 노스캐롤라이나를 분리하는 경계에 있는 곳의 능선 정점에 있었다.
아메리카군은 킹산 전투에서 주변 지형을 활용하여 영국군을 포위하여 승리를 거뒀다.
 
대륙회의는 남부를 지휘할 새 사령관으로 너새니얼 그린을 뽑았다. 워싱턴에게 새 사령관 지명 요청에 따른 결과였다.
그는 병참감으로 3년 차를 보내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린은 위대한 대의에 닿기 위해선 위대하지 않은 일도 해내야 한다는 것을 워싱턴에게서 배운 바 있었다.
이처럼 그는 워싱턴에게서 많은 점을 배웠지만, 그렇다고 그것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그린은 총사령관의 방식과 전략을 검토했으며,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것은 흉내를 포기하는 영민함도 보였다.
그는 이후 열 달 동안 군대가 반드시 온전하게 유지돼야 한다는 전제 아래 전쟁에 임하고자 했다. - P26
 
 
노스캐롤라이나에 도착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린은 이런 글을 남겼다.
"자부심 또는 원칙이 군인을 만든다."
훌륭한 지도자는 그 두 가지를 모두 휘하 병사들에게 심어준다.
하지만 병사들이 헐벗거나 굶주리면 그런 감화는 전부 실패할 것이다. - P27
 
11월 27일 힐즈버러에 도착한 그린은 병사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걱정스러웠다.
병사들의 대부분이 보급품 없이 헐벗은 상태였고 싸우겠다는 기백이 사라져 있었다. 장교들도 캠던 전투의 패배로 패배감에 빠진 상태였다.
 
그린은 병사들을 나누어서 자신이 지휘하는 군은 체로로, 모건이 이끄는 군은 카토바강 서쪽으로 이동시켰다.
 
1781년 1월 초, 그린은 윈즈버러의 콘월리스에게서 탈턴이 모건의 부대를 향해 진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탈턴은 콘월리스에게 힘을 합쳐 킹산 근처에 모건을 몰아넣자는 제안에 동의하고 탈턴에게 추격을 허락했다.
모건은 1월 16일 해나스 카우펜스로 이동했다. 모건 부대는 무거운 짐마차를 끌고 다니는 상태로 탈턴이 가까이 추격하는 상태에서 도망쳤다가는 따라잡힐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카우펜스는 목초지였다. 목초지에는 덤불은 별로 없었지만 소나무, 참나무, 히코리 나무가 산재해 있었다.
이곳은 그야말로 기병을 위한 장소였는데, 탈턴은 모건보다 3배 많은 기병을 거느리고 있었다.
현장을 살펴본 영국군 자군 찰스 스테드먼은 모건이 전술적 의도와는 맞지 않는 지형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양 측면이 열린 데다 기병에 취약했고 등 뒤의 브로드강이 퇴각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 P38
 
이런 불리한 지형이었으나 모건은 지형을 잘 활용했다.
그리고 모건의 군사는 모두 정예였다. 탈턴의 병력은 모건의 군사보다 수적으로 우세였으나 정예병은 아니었다.
모건은 달아날 곳 없는 고립된 목초지에서 배수진을 치고 싸우는 결정을 내렸으나 완승을 거두었다.
 
콘월리스는 카우펜스 전투 소식을 듣고 모건을 뒤쫓기 위해 움직였다.
하지만 그는 엉뚱한 방향을 선택해 하루를 날렸다.
(정보를 돈으로 사려 했지만 정보를 팔겠다는 이는 적었다.)
좀 더 일찍 더 나은 정보를 얻어 빠르게 움직였다면 모건을 따라잡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모건은 길포드 법원 청사로 이동하여 대륙군 주력 부대와 합류했다.
작전회의를 통해 그린이 이끄는 대륙군은 도주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콘월리스와 그린이 있는 길포드 법원 청사 사이에는 강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도주에 위험이 도사렸다.
이 때 대륙군 장교 중 한 사람인 윌리엄스는 군 내에서 과소평가를 받았으나 양동작전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여 군사를 이끈다.
 
길포드 법원 청사는 언덕 위 마을의 가장 자리에 있었고 계곡 대부분에는 나무가 우거져 있었다.
이곳에서의 싸움은 대부분 백병전으로 진행되었는데, 대륙군이 점차 승기를 잡았다.
콘월리스는 아군이 패배할 거라 생각하고 대포 두 문을 가져와 아군과 대륙군이 뒤엉킨 곳에 발포 명령을 내렸다.
그 결과 아군, 적군 가리지 않고 많은 병사들이 전사했다.
그린은 더 이상의 전투를 포기하고 후퇴를 명령했다. 이 때 영국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게 컸다.
 
4월 7일 콘월리스는 윌밍턴에 도착했으나 오는 도중 많은 병사들이 사망했다.
그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콘월리스는 필립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의중을 드러냈다.
 
"전쟁의 목표가 확실해지고 우리가 만약 승리한다면 아메리카를 얻게 될지도 모르네."
체서피크가 중대한 곳이라는 추정, 단 한 번의 전투로 전쟁을 종결할 수 있다는 생각은 콘월리스의 전략적 사고방식에 한계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지루하고 비참하고 값비싼 작전에 좌절했던 그는 계속해 아메리카 정복의 꿈을 꾸다 마침내 착각에 빠졌다. - P64
 
그린은 홉커크스힐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은 소나무로 덮이고 동서로 뻗은 산등성이로 캠던에서 북쪽으로 2.4킬로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캠던을 공격하는 것은 무모하다 판단한 그린이 적이 나오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끝에는 노스캐롤라이나 민병대의 지원을 받는 메릴랜드 대륙군 2개 연대가 있었고, 오른쪽에는 버지니아 대륙군 2개 연대가 있었다.
대륙군 좌측에는 오토 윌리엄스가, 아이작 휴거는 우측 진영을 지휘했다.
로던은 3개 연대를 전선에 내세우고 다른 3개 연대는 예비 병력으로 남겨두고, 아메리카군에 접근했다.
최정예 부대인 63연대는 공격 대형 가장 오른쪽에 있었다.
 
전투가 끝날 때 유일하게 온전하게 남은 부대는 대륙군 우측의 버지니아 연대였다.
워싱턴 기병대는 늦게 도착하여 후위 교란 작전을 수행했다.
그린은 질서정연하게 퇴각했고 추격하는 로던을 잘 방어했다.
홉커크스힐 전투가 끝나고 로던은 결국 캠던에서 철수하기로 한다.
 
1781년 9월 8일 그린과 스튜어트는 유토 스프링스 전투를 한 번 더 치른다.
유토 스프링스는 찰스턴에서 북서쪽으로 5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병력과 보급품이 충원된 아메리카군은 영국군의 통제력 상실을 보면서 의욕을 높일 수 있었다.
대륙군은 영국군 진영 공격에 성공했으나 전열이 무너진 가운데 혼란 속에 영국군에 반격의 기회를 내준다.
 
그렇지만 최종적으로 영국군은 캐롤라이나와 조지아를 잃음으로써 남부에서 힘을 잃게 된다.
이는 현지인들의 비협조 속에 정보전에서 허약했고, 아메리카군의 대의 앞에 스러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캐롤라이나인은 콘월리스에게 협조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식량도 내놓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은 콘월리스나 그의 후임들에게 아메리카군의 동태에 관한 정보도 제공하지 않았다.
캐롤라이나인은 오히려 영국군의 정보병들을 습격했고, 보급품 수송 행렬을 공격했으며, 영국군을 지원하려는 왕당파 세력을 한꺼번에 제거했다.
 
남부 민병대는 대다수의 북부 비정규군과 마찬가지로 대치전에서는 믿음직스럽지 못했지만, 국왕과 민병대와 싸울 때에는 무지막지할 정도로 유능했다.
적어도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에라도 그들은 그런 비정규 전투에서 훌륭하게 싸웠다.
첫째, 그들은 영광스러운 대의를 믿고 있었다.
둘째, 그들은 남부에 사는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었다. - P77
 
 
아메리카인들은 모든 전투에서 대부분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아메리카 민병대는 버티고 싸우는 일을 잘하지 못했지만 서로 잘 아는 마을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단결력이 강했다.
영국 정규군은 아메리카 민병대와는 반대로 사회에서 철저히 격리되고 엄격한 규율 속에 엄청난 훈련을 받았다.
영국군 장교와 병사들 사이에는 거리가 있었지만 전투에서는 서로를 격려하며 사기를 끌어올렸다.
아메리카 정규군인 대륙군은 영국군만큼 정비되지 않았지만 점차 인내심을 키워갔다. 패배하고 물러나더라도 다시 쉼없이 공격하는 그런 끈기 말이다.
 
일부 아메리카인이 독립의 원칙에 헌신했고, 그로 인해 전장에서 믿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역설은 어떤 측면에서는 사실에 가깝다.
그럼에도 원칙에 대한 헌신은 여전히 그들을 전장으로 이끄는 데 도움을 주었다.
총사령관인 조지 워싱턴은 그들의 영광스러운 대의 덕분에 독립 전쟁이 자유민 대 용병의 싸움이 되었다는 점을 줄곧 휘하 병사들에게 상기시켰다.
그들은 '자유의 축복'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 - P101
 
 
병사들은 싸울 때마다 집단과 자유 사이에서 선택을 내려야 했다.
싸워야 하는가, 아니면 도망쳐야 하는가?
그들은 선택이 죽음과 삶을 결정한다는 것을 알았다.
병사들은 밀집대형에 끼어서 전우들과 어깨를 맞댔고, 자신에게도 미덕을 실천할 기회가 생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반면 전투에서 도망치는 것은 개인의 안위만을 지키는 것이었다. - P102
 
 
대륙회의와 각 주 정부는 입대 보상금을 지급하고 복무 후 토지 지급을 조건으로 신병을 모집했다.
이 때문에 부패한 군인들이 나타나고 군대의 사기가 떨어졌다. 각 주의 경쟁은 보상금 철새들을 출현시켰고, 보상금만 챙기고 탈주하는 군인들을 낳았다.
 
대륙회의는 병참 체계를 개편해야 했다.
부대를 편성해 전쟁 지역에 파견해야 했고, 부대에 보급품을 팔아 수입을 내고자 했다.
대륙회의는 병사들의 수요를 만족시키려 했으나 큰 조직과 복잡한 절차 때문에 병사들은 만족스러워해하지 않았다.
 
1776년 말 대륙회의는 병참부의 업무를 개편했다.
첫째는 전쟁청 산하에 신설된 피혁 조달부로 신발을 보급하는 업무였다. 둘째는 군대에 의복을 제공하는 독립된 피복 조달부 설립이었다.
대륙회의에 재무감으로 일한 사람 중 로버트 모리스는 보급 체계 혁신을 위해 노력한 인물 중 탁월한 성과를 냈다.
모리스는 필라델피아 상인으로 전국적으로 재계의 인맥을 알고 있어 대륙회의의 재원으로 납품계약금을 지불했다.
그는 자신의 권한을 활용해 대규모 군사 작전에도 충분한 보급을 제공했다.
 
연대 군의관들은 종합병원을 보급소로 활용하고자 했지만 병사들은 연대 내의 야전 병원을 더 선호했다.
연대 병원과 종합병원 외과의들 사이의 긴장과 갈등으로 병사들에게 제대로 된 의료 지원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병원부 조직은 전쟁 끝무렵까지 정비되지 못했다. 게다가 장교들과 연대 군의관들은 위생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대륙군의 위생은 엉망이었던 반면 영국군은 야영지를 께끗하게 정비하여 질병에 덜 걸렸다.
 
18세기 천연두는 위험한 질병이었다. 워싱턴은 병사들의 감염을 막기 위해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의 형 로렌스는 폐를 망가트리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바베이도스로 요양을 갔고, 워싱턴도 동행했다.
바베이도스에서 지내던 워싱턴은 1751년 천연두에 감염됐다.
로렌스 워싱턴은 18세기에는 폐병, 현대에는 폐결핵으로 불리는 병을 앓고 있었다.
결국 그는 낫지 못하고 1752년에 사망했다.
조지 워싱턴은 병마를 이겨냈지만, 천연두를 겪은 일은 잊지 못했다. - P126
 
워싱턴은 이런 경험이 있었기에 누구보다 천연두에 민감할 수 밖에 없었다.
1775년 보스턴 인근에 퍼진 천연두 문제 해결을 위해 병사들에게 접종을 받게 할지, 격리를 할지 판단해야 했다. 접종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천연두에 걸린 병사들과 민간인 중 천연두에 걸린 자만 격리했다.
하지만 1777년 1월 뉴저지주 모리스타운에서 천연두가 퍼졌을 때 접종을 선택했고 효과를 보았다.
 
존 폴 존스는 대륙군 해군을 이끌고 프랑스 항구에서 출발해 영국 본토를 공격했다.
존스는 영국에 가능한 많은 피해를 입히겠다는 생각으로 본험 리처드호와 콜베트함(소형 호위함), 커터(소형 보트)와 사략선 두 척을 이끌고 간 것이다.
1779년 9월 23일 본험 리처드호는 영국의 세라피스호에 맞서 용기와 기백, 행운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전쟁으로 파괴된 도시와 농촌에 사는 민간인들은 어떻게 아메리카를 위한 대의에 나섰을까.
민간인들은 군인이 아니었지만 전쟁에 다른 형태로 참여했고, 여성들은 가정에서 남성을 대신해 삶을 포기하지 않고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국왕파, 흑인, 인디언 등도 참호를 파고 군부대를 따라다니며 세탁이나 간호 등의 업무를 하기도 했다.
 
전쟁의 '이면'은 '외부', 즉 전쟁을 지속하는 민간 사회에도 영향을 미쳤다.
전쟁의 이면과 외부를 구별하는 것은 어느 정도는 기만적이고 더 나아가 엉뚱한 것이기도 하다. - P151
 
전쟁이 일으킨 물리적 파괴는 아메리카인을 고통스럽게 했다. - P152
 
파괴의 아픔보다는 덜 극적이었지만, 전쟁이 불러온 또 다른 슬픔이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전투에서 싸우는 동안 홀로 집을 지켜야 하는 외로움이었다.
주로 여자들이 이러한 외로움을 이겨내야 했다.
나아가 그들은 남은 가족의 단합을 걱정해야 했다. - P154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를 전쟁에 나간 남편을 떠올리며 그립기도 하고 불안해했을 여성들이었을 것이다.
가족들을 위한 생계로 마냥 시름에 빠져 있을 수도 없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당신을 오로지 신의 처분에 맡기는 것 뿐이에요.
우리가 그분을 제대로 믿는다면 그분께서는 우리를 변함없이 지켜주실 테니까요."
사라 호지킨스는 남편과 떨어져 있어야 하는 세월을 잘 견뎠고, 1779년 6월에 조지프는 집으로 돌아왔다. - P156
 
사라 호지킨스는 남편의 목숨을 걱정하며 시간을 보냈지만 적이 그녀의 재산을 빼앗을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여성들이 처한 상황은 더 위태로웠다.
 
메리 피쉬 실리먼은 영국군의 상륙작전에 고통받은 코네티컷 페어필드에 살고 있었다.
남편인 골드 셀렉 실리먼은 1779년 영국군 국왕파 무리에게 납치되었다가 1780년 국왕파 판사와 교환되어 귀향할 수 있었다.
그녀는 전쟁 시작 전만 해도 열성적인 애국자가 아니었으나 영국 정부가 아메리카의 자치권을 제약하는 강압법 제정 이후 반발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메리는 남편의 분노에 공감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편이 참전했던 화이트플레인스의 전투 이후에 그녀는 달라졌다.
남편의 코트 주머니에서 옷을 뚫고 들어온 머스킷 총 탄환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남편이 죽거나 다쳤을지도 모르는 이 단순하지만 극적인 사건으로 인해 메리는 영국에 단호히 저항하게 되었다.
실리먼이 1780년에 풀려났을 때, 메리는 이제 더 이상 원상회복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뉴잉글랜드인이면서 동시에 자유로운 아메리카인으로 거듭났다. - P159
 
 
남편과 아버지가 군대로 떠난 대다수의 가정은 궁핍하게 지내야 했다.
로이스 피터스 역시 그랬지만, 남편의 안장 작업을 이어받으며 아이들의 옷을 만들고, 소를 키우며 치즈를 만들어 생계를 이었다.
게다가 직접 만든 셔츠와 양말과 치즈를 남편에게 보내기도 했다.
가족을 지키는 일은 그녀에게 소중한 것이었다.
 
여성들은 독립 전쟁의 주역이 아니라 보조역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여성들이 자신의 희생과 자립적인 생활을 직접 선택한 것이 아니라, 전쟁이 그것을 강요했다고 비춰지는 것이다.
이 주장은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지만 독립을 쟁취하는 데 많은 여성이 능동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독립하기 한참 전에도 여성들은 솔선수범해 결단력 있는 행동에 나섰다.- P161
 
전쟁 내내 약탈이 계속되면서 민간인들은 고통에 시달렸다.
영국군이 점령하면서 가장 큰 고통을 받은 것은 빈민층의 사람들이었다.
전쟁으로 생필품의 물가가 폭등하면서 큰 피해를 입게 된 것이다.
영국군이 점령한 9개월의 기간 동안 각종 사업이 번창했는데 럼주, 증류주, 당밀 소금 등이 밀수 대상 상품으로 인기를 끌면서 국왕파 상인들은 크게 돈을 벌었다.
돈을 가진 상인이나 영국군 장교들은 다양한 문화 생활을 즐겼는데 매주 무도회를 열고 연극, 연주회, 파티가 개최되었다.
 
한쪽에서는 사치가, 다른 한쪽에서는 굶주림이 이어지는 상황은 씁쓸함이 들게 만든다.
 
아메리카 내부의 모든 사람의 의견은 일치했을까. 당연히 아니다.
약 50만 명의 사람들이 영국에 충성했고, 8만 명은 아메리카를 떠났다. 이들은 국왕파였는데 아메리카 총 인구의 약 16퍼센트 정도에 해당했고 백인을 기준으로 하면 19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인구였다.
국왕파는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국왕파는 유서 깊은 전통과 의회 같은 오랜 역사를 가진 기구들이 자유를 만들고 보호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역설했다.
따라서 이러한 국왕파 대다수는 독립 선언의 방안이 제시됐을 때 아메리카의 위기가 정점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아메리카에 새로운 기반이나 정치권력이 생겨났다는 점을 믿지 않았다.
예전의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국왕파는 예전의 것을 고수하려고 했고 그로 인해 고통받았다. - P195
 
영국에 충성하는 그들은 기존의 아메리카를 고수하는 것이 이득이였을 것이다.
아메리카의 독립은 그들에게 원치 않는 움직임이었고 그에 대한 반발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국왕파와는 다르게 흑인 노예들은 자유의 대의의 원칙에 부응했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은 노예 해방에 어려움을 겪게 만들었다.
인종주의와 경제적 필요성은 혐오와 맞물려 심리적 강화를 불러 일으켰다.
 
모든 북부 주는 어떻게든 점진적인 노예 해방을 추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다수 북부 주는 노예의 자식은 반드시 출생 후 몇년 뒤 해방되어야 한다고 명시한 법안을 통과시킴으로써 노예 해방을 향해 나아갔다. - P198
 
 
남부 주는 북부 주의 선례를 따르지 않았다. 남부에서는 노예제가 너무나 깊이 정착돼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노예 무역을 폐지하자는 북부 주의 주장에 동의했다.
이런 조치들을 다 종합하더라도 노예제 폐지와 관련된 대책들은 별로 인상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런 조치들은 노예제를 무너트리지 않았다.
노예제는 남북 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계속 번창할 터였다. - P199
 
독립 혁명 과정에서 인디언은 많은 인명 피해와 물질적 손실을 겪었다.
서부 경계지를 따라 벌어진 싸움으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고 농지와 거주지도 잃은 것이다.
일부 인디언은 싸움을 피해 달아나기도 했지만 대다수의 인디언들은 참담한 운명에 휩싸였다.
 
 
1781년이 되면 독립 전쟁은 막바지로 향한다.
아메리카군은 요크타운에서 영국군을 포위하면서 항복을 받아낸다.
요크타운 전투를 마지막으로 미국과 영국, 프랑스와 스페인은 강화회담을 벌이게 되고 1782년 11월 공식 합의에 이른다.
 
영국군 사령관 콘월리스는 리치먼드, 포인트 오브 포크, 샬러츠빌을 점령하고 체서피크만에 해군 기지를 건설하라는 명령에 따라 요크타운에 요새를 구축했다.
그러나 드 그라스 제독이 가세하면서 프랑스 해군은 우세한 전력을 확보하게 된다.
거기에 프랑스 육군에 로샹보 백작이 합류한다. 그는 워싱턴보다 7살이나 많았으나 유럽의 전쟁에서 잔뼈가 굵은 활약을 보여준 베테랑 군인이었다.
대륙군은 영국군 몰래 체서피크만 방향으로 남하하였고, 영국군은 윌밍턴에서 올라와 요크타운에서 맞붙게 되었다.
프랑스 함대와 영국 함대는 체서피크만에서 해전을 벌였다.
 
프랑스 함대는 영국 함대에 승리하여 영국 함대가 뉴욕으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요크타운에 2개의 방어선을 만든 영국군에 맞서 아메리카군과 프랑스 육군 연합군은 포위 작전을 벌여 최종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는 미리 배치한 대포들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면서 영국군의 보루를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요크타운의 전투로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지만 영국 의회는 전쟁에 더 이상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1782년 3월 20일 노스는 총리직을 사퇴하고 로킹엄이 총리에 오른다.
새로운 내각이 들어서자 강화조약을 위한 협상에 들어간다.
 
하지만 강화 협상은 쉽지 않음을 예고했다.
영국 뿐 아니라 프랑스, 스페인이 생각하는 바가 다 달랐기 때문이었다.
 
3개월 간의 협상이 진행된 결과 1782년 11월 30일 미국과 영국 간의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미 합중국이 주권을 가진 독립국임이 인정되었고 국경 문제도 합의를 보았다.
1783년 1월 20일 프랑스와 영국도 강화 조약에 서명했다. 스페인과 영국도 비슷한 시기 강화에 동의했다.
 
1783년 아메리카 북쪽 국경은 오늘날의 국경과 비슷했고, 남쪽 국경은 위도 31도, 서쪽은 미시시피강으로 정해졌다.
평화조약 체결 소식에 아메리카에서는 축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1783년 11월 25일 영국군이 뉴욕에서 철수하고 조지 워싱턴과 대륙군은 뉴욕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 속에 입성했다.
 
아메리카인이 전쟁에서 최종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대의를 향한 열망이었던 것 같다.
 
대의는 아메리카인의 치열한 저항에 영향을 주었다.
독립 혁명 기간 중 아메리카에서 제기된 무언의 질문은 "무엇이 우리를 하나의 국민으로 결합하고 있는가?"였다.
1760년 전까지 아메리카인은 언어, 혈연, 친척, 무역, 자유, 입헌주의 등 영국인과 많은 요소를 공유했다.
독립혁명이 발발하기 전 몇 년 동안 아메리카가 겪은 경험은 이런 유대 관계를 느슨하게 풀어놓았다.
이익은 상호적이지 않았고, 가치는 공유되지 않았으며, 공통점은 손상되거나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영국은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메리카인이 자유를 손상하는 행동에 대해 저항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 P254
 
종전 후 군사권, 영토권, 재정권을 두고 이견을 정리하는 작업이 남았다.
 
전쟁 후 워싱턴은 대륙군의 총사령관 직에서 사임했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그의 행동은 위엄과 기개, 결단력이 느껴졌다.
 
"제게 부여된 일을 끝마친 지금, 저는 이 위대한 작전의 무대에서 내려오고자 합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내려온 이 장엄한 기관에 애정을 담아 작별을 고합니다.
여기서 저는 사직서를 제출하고 모든 공직에서 떠나고자 합니다." - P263
 
대륙회의는 전쟁이 끝난 뒤 아메리카 영토를 재정립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미국이 영국과 맺은 조약은 불명확했고, 스페인 등 다른 나라들도 이 조약을 존중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메리카 서부에서 주권을 수립하려는 대륙회의에 맞서 영국군은 5대호의 모피 교역 요충지를 장악하고 있었기에 이곳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또한 미시시피강 동쪽 영역도 미합중국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었는데 스페인이 미시시피강을 자유롭게 탐사할 독점 권리를 요구했다.
서부와 동부 간의 갈등도 첨예했다.
 
재정권을 둘러싼 주 정부와 대륙회의의 갈등도 컸다.
정부는 독립 혁명 전 돈을 마구 찍어내고 그 돈으로 각종 비용을 충당했다.
무절제한 화폐 발행으로 화폐 가치는 급락하였고 세수는 걷히지 않았다.
대륙회의는 통화 회수를 위해 특별 증서를 발행했으나 각 주 정부와 공채 모집관이 계획을 따르지 않아 실패했다.
 
연합헌장이 작성되고 주 헌법이 비준되었으나 아메리카인들은 연합회의가 중앙정부의 역할을 맡게 하는 것을 경계했다.
연합규약은 16개월 간의 토론 끝에 대륙회의에서 1777년 11월 채택됐다.
연합규약 2조는 각 주들이 대륙회의보다 우월한 지위임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783년 아메리카인들은 사실상 연합회의가 아니라 주 정부의 지시를 따르고 있었다.
당시 주들은 독립 혁명의 목적에 자극을 받아 많은 일을 해낸 상태였기 때문에 자신감이 넘쳤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될까?
 
1781년 이후로 아메리카는 많은 점을 배웠다.
연합규약으로는 추진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주 헌법은 풍부한 정치적인 지혜를 담고 있지만, 역시 그것만으로는 일이 되지 않았다.
뭔가 획기적인 조치를 취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미합중국은 쪼개진 주권을 지닌 소규모 공화국들의 유별난 연합체로서 강력한 군주제가 번성하던 세계에서 오래 살아남지 못할 터였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고민하며 사람들은 헌법제정회의로 모였다. - P328
 
1787년 5월 25일 필라델피아에서 헌법제정회의가 열렸다.
회의에 참석한 대표자들은 토론을 거쳐 미국의 뼈대가 되는 헌법을 만들었다.
본래 연합규약을 개정하여 개정할 목적으로 모인 것이었으나 많은 이들이 새로운 연방정부가 필요하다는 데 동의하여 다른 모습으로 전개되었다.
9월 17일 55명의 대표 중 39명이 헌법에 서명하면서 비로서 헌법이 비준되었다.
 
55명의 대표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최소한 34명은 법률 교육을 받았고, 21명은 법조인이었다. 농장주와 농부는 18명, 노예주는 19명, 상인은 7명이었다. 나머지 8명은 변호사이자 상인이었다.
이들 중 다수가 주의 공직을 맡았거나 대륙회의에 있었거나 독립전쟁의 참전 용사였다.
이 짧은 개요로 이 회의에 믿음직한 시민, 자산가, 정치 및 사회 분야 지도자가 모였다는 점을 알 수 있고, 실제로도 그랬다.
변화에 저항한다는 의미에서 소수는 융통성 없는 보수주의자였다.
대표들은 대부분 30대나 40대 젊은 사람이었고, 몇 명의 예외가 있을 뿐이었다. - P337
 
인구비례와 대표성에 관한 입장 차이로 합의를 보기 까지 대토론이 이어졌다.
작은 주들은 평등하게 한 표를 갖게 되는 것을 고수하기를 원했으나 큰 주는 인구에 비례해 투표권을 갖게 되는 것을 원했다.
헌법제정회의는 토론과 논쟁을 통해 이성과 지성을 작용시켰던 반면 비합리성, 열정 등도 일부 작용했다.
 
대위원회가 제출한 최종 보고서는 '대타협'이라고 불리지만, 사실은 엘스워스와 코네티컷 대표단이 고안해낸 작은 주들의 방안을 수용한 것이었다.
대타협은 인구 4만 명당 한 명의 연방의회 의원을 두고, 다섯 명의 노예를 세 명의 자유민으로 산정하며, 연방 하원만이 재정 법안을 발의할 권한을 가지고, 상원에서는 각 주가 동등한 대표 구성을 갖는다는 내용을 담았다. - P359
 
대표들은 9월 17일 서명에 참여했다. 헌법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은 이들도 대부분 서명했다.
헌법은 보수적이었으나 공화국의 가치를 어느 정도 구현한 안이었다.
권력을 제한함으로서 부패를 막고 다수의 폭정으로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도 엿보이는 것이었다.
연방주의자들과 반연방주의자들 사이의 첨예한 갈등이 존재했으나 결국 연방주의자들이 승리하면서 헌법은 비준되었다.
 
연방 하원은 인민이 선출하는 기관이었다.
따라서 계층, 지위, 숫자와 무관하게 인민은 자유로웠고 동시에 구속받았다.
자유롭다고 한 것은 공화국이 도덕적인 인민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고, 구속을 받는다고 한 것은 이런 다양한 부류의 인민이 인간적인 약점을 지녔기 때문이다.
대표들은 이런 추정을 공화주의의 언어로 표현했다.
그들은 간접적으로 '두 번 태어난 사람들'의 자녀들에게 익숙한 옛 도덕적 확신을 상기시켰다.
대표들은 인간의 이기심, 욕망, 악을 행하려는 성향 등을 분명히 고려했다.
인간이 지닌 매우 악한 충동 중 최악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본능이다.
이런 본능을 제약할 수 있는 정부를 설립한 것은, 헌법 자체에 신교 문화의 지속적인 관심사인 도덕성이 반영됐음을 보여준다. - P385
 
 
헌법 비준 과정은 대체적으로 평화롭게 진행됐다.
비록 반연방주의자들은 헌법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들은 헌법에서 자유로운 영국인들의 권리장전의 내용이 빠졌다는 것과 큰 영토를 지닌 나라에서 공화정 자체가 존속할 수 없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연방주의자들이 비준회의에서 우위를 점했다.
 
조지워싱턴은 1789년 4월 30일 뉴욕에서 미합중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식을 치렀다.
 
 
1권에서부터 3권까지의 시리즈 1 중에서 압권은 3권이라고 생각한다.
아메리카를 구성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목표와 희망을 엿볼 수 있고 또 대의를 위해 나선 대표들의 리더십을 통해서 많은 것을 느끼게 했다.
합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들은 중요한 목표가 있었기에 결론적으로 합의에 이를 수 있었다.
여성, 노동자, 흑인 노예들의 시선에서 미 합중국의 대의를 위한 행동들은 감동적이었다.
(이는 개정판에서 많이 보강된 부분이라고 한다.)
 
부디 4권부터 12권까지 남은 시리즈의 책들도 늦지 않게 완간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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