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책] 미국인 이야기 2

category 리뷰/책 2022. 3. 25. 22:33
미국인 이야기 2권은 전쟁의 서막이 부제다.
 
개인적으로 1권보다 2권이 재밌었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니 하나의 주제가 관통되어서인 것 같다.
 
2권은 영국과 아메리카 사이에 갈등이 폭발되어 전쟁이 발발한 뒤 그 전개 과정이 그려진다.
영국은 아메리카를 하위에 두고 싶어했음이  분명했다.
아메리카는 영국의 권력에 의한 압제를 더 이상 두고 보지 못했고 압제라 느꼈다.
둘 사이의 갈등은 피할 수 없는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영국 노스 내각이 들어서면서 톤젠드 법안이 철회되고, 상인들이 수입 거부 운동을 중단하면서 문제는 봉합되는 듯 했다.

 

그러나 종교적 갈등과 경제 문제로 결국 아메리카인들은 통신위원회란 조직을 만들어 대응에 나서게 된다.
영국은 국교회라는 종교를 가지고 있었으나 아메리카인들은 국교회에서 자유로워지길 원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프로테스탄티즘이었다.
또한 상인과 세관 징수관 사이 갈등은 톤젠드 법안 이후에도 지속되고 있었다.
보스턴 선언은 식민지인의 권리의 소중함을 일깨우며 권리는 자연과 이성에서 온 것이므로 어떤 권력도 민중의 권리를 침탈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식민지인들은 차세법 이후 보스턴 앞 바다에 도착한 차 상자를 던지는 것으로 대응했다.
영국 의회는 이를 반란으로 여겨 한층 더 강화된 제재를 단행했으나 식민지인들은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
결국 전면적인 수입 거부 운동이 일어나고 대륙회의에서 권리선언을 발표하면서 조직적인 저항이 시작된다.
 
군중은 전쟁에 나가는 병사들처럼 소리를 내지르며 모임 장소를 빠져나가 선창을 따라 달리면서 그리피스 부두로 갔다.
그곳에는 다트머스호, 엘리너호, 비버호 등이 계류되어 있었는데, 뒤의 두 배 역시 차를 싣고 최근에 도착해 있었다.
얼굴을 검게 칠하고 담요를 몸에 두른 채 '인디언 복장을 한' 약 50명의 남자가 군중 사이에서 빠져나와 배에 오르더니 보스턴 항구 앞바다에 차를 우려내는 작업에 돌입했다.
그들은 신속하게 그 일을 해치웠는데, 차가 든 궤짝을 갑판 위에 올려서 깨부순 다음, 차를 선창 너머 바다로 내던졌다.
배 주위의 바닷물은 곧 차로 뒤덮였고, 아침이 오기도 전에 일부 차는 저 멀리 도체스너 넥까지 흘러내려갔다. - P45
 
영국 의회는 군중의 행동에 대응하여 보스턴 항구법을 통과시키고 이후 매사추세츠 정부법, 정의의 불편 부당한 시행법을 통과시킨다.
보스턴 항구법은 영국 국왕이 재개항을 명령할 때까지 보스턴 항구를 폐쇄하고, 동인도회사가 차 손실에 대해 보스턴 시로부터 전액 배상을 받을 때까지 재개항 명령을 하지 않도록 한 것이었다.
매사추세츠 정부법은 매사추세츠 정부를 왕실 직영 정부로 전환하는 것으로 매사추세츠 식민 정부의 자치권을 크게 축소시키는 것이었다.
정의의 불편부당한 시행법 또한 식민지 권한을 축소한 것으로 식민지에서 중죄를 저지른 영국 관리를 영국이나 다른 식민지로 보내서 재판을 받게 하는 것이었다. (이는 조선 개항기 외국과의 조약에서 치외법권과 상당히 유사한 내용이다.)
 
필라델피아에 대륙회의로 모인 대표들은 영국을 향한 분노보다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여기에서 두각을 드러낸 인물은 존 애덤스와 토머스 제퍼슨이다.
버지니아주 주지사였던 토머스 제퍼슨은 미국 제3대 대통령을 지낸 인물이고 존 애덤스는 매사추세츠주 대표를 거쳐 미국 제2대 대통령을 지낸 인물이다.
 
역사가들은 존 애덤스와 토머스 제퍼슨을 종종 비교했다.
제퍼슨은 아주 평온한 외양을 유지한 반면, 늘 불안감을 느끼던 애덤스는 단 한순간도 그런 평온함을 얻지 못했다.
제퍼슨은 우아한 반면, 애덤스는 결코 막돼먹지는 않았으나 충동적인 기질로 인해 다소 거칠었다.
그는 제퍼슨처럼 다재다능하지는 못했으나, 제퍼슨 못지않게 날카로웠고, 종교사와 정치학이라는 두 분야에서 애덤스의 학문이 제퍼슨을 능가했다.
그는 열심히 노력해 공직 생활에서 뭔가를 이루고 싶어 했고 인기와 명성을 갈망했지만 오로지 세상의 인정을 받으려고 행동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의 처신은 대체로 청교도의 문화였다. - P67
 
애덤스에 대한 평가가 좀 박하고 제퍼슨은 후하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둘은 여러 면에서 비교가 되었고 그만큼 달랐던 듯하다.
 
토론의 진통 끝에 권리선언 발표가 합의되었다.
발표문에는 식민지의 권리가 자연법, 영국 헌법, 식민지 특허장에 바탕을 두고 있음이 담겼다.
 
청교도 윤리를 강조하면서 아메리카인들은 오래된 생활방식을 상기해냈다.
18세기 동안, 인생 내내 더 많이 획득하고 소비하라는 강요 때문에 잊어버렸던 이전의 생활방식 말이다.
영국과의 위기가 닥치면서 아메리카인은 자신이 본래 어떤 사람이었는지 계속 고민해야 했고, 대륙협회는 아메리카인에게 검소하고 절약하는 생활이라는 새로운 도전 과제를 제시했다. - P85
 
 
영국 내각은 대륙 회의의 결정과 아메리카인들의  지속되는 반란을 진압하라는 결정을 내린다.
렉싱턴과 콩코드에서 아메리카 민병대와 영국군 사이에 개전이 시작되며 드디어 전쟁은 막에 오른다.
 
1775년 4월 18일 영국군은 콩코드를 비밀리에 공격하기 위해 보스턴에서 출발했으나, 이미 소식을 접한 아메리카 민병대가 렉싱턴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렉싱턴과 콩코드 전투는 피할 수 없는 싸움이 되었다.
 
전투에서 영국군은 모두 273명의 사상자를 냈고, 아리카는 95명의 사상자를 냈다.
 
제2차 대륙회의에서 조지 워싱턴이 사령관으로 선출되면서 그는 아메리카 민병대를 군대다운 군대로 만드는 노력을 기울인다.
이어지는 벙커힐 전투와 퀘벡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한 아메리카군은 보스턴에서 영국군을 철수시키는데 성공한다.
 
1775년 6월 뉴잉글랜드 벙커힐에서 아메리카 민병대가 영국군을 몰아내기 위해 선공을 감행했다.
하우가 이끄는 영국 함대는 벙커힐과 브리즈힐에 주둔한 아메리카군에 일제 포격을 퍼부어 영국군의 상륙을 돕는다.
아메리카군은 브리즈힐에서 미스틱강까지 전선을 구축해 상륙한 영국군에 대항했으나 아메리카군이 반도에서 철수하면서 영국군은 찰스타운 넥까지 반도를 완전 점령하였다.
 
조지 워싱턴은 총사령관 자리를 맡기는 했지만 자신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나의 능력과 군사적 경험으로 이 중요하고도 광범위한 신임에 부응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워싱턴은 실패를 예상하는 일을 싫어했고, 그것이 그의 '명성'에 입힐 피해를 의식했다. - p162
 
그는 명예가 실추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에겐 명예라는 가치가 중요한 사람이었고 실패로 인해 주변인들에게 줄 실망 등으로 걱정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전쟁에서 자신이 선택됐다는 믿음, 아메리카인의 자유 수호에 대한 애정이 그것이었다.
 
막상 민병대를 맡고 보니 그들은 너무나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았다.
이 때문에 사병들의 군기와 임무 수행의 기준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고 군법회의도 진행하는 등 규율에 대한 전반적인 점검을 진행했다.
 
대륙회의의 뜻에 따라 아메리카 대륙군은 퀘벡 원정을 떠나게 된다.
이들은 290킬로미터만 여행하면 될 것으로 알았으나 실제로 캐나다 북상까지 560킬로미터를 이동하느라 45일의 강행군을 하게 된다.
 
퀘벡 원정에서 대륙군의 한 부분을 이끌던 몽고메리 장군은 머리에 총을 맞아 전사한다.
조지 워싱턴은 보스턴이 보이는 도체스터 고지를 점령해 보스턴 공격 발판으로 삼으려 했으나 날이 추워 보스턴 항구가 얼어붙어 땅을 굴착하기 어려워 요새화할 수 없었고 그런 상태에서 영국군이 쉽게 공격해올 것은 뻔했다.
하지만 이미 보스턴에 주둔하던 영국군은 철수를 선택했고 1776년 3월 27일 그들이 항구에서 물러나면서 1년에 걸친 전투가 끝이 난다.
 
그것은 존 애덤스가 그 당시 말한 "절반의 전쟁"이 아니었고, 아메리카 측에서 전면적인 노력을 기울인 온전한 전쟁도 아니었다.
캐나다에 대한 점령 시도는 식민지가 "방어선 위에서 행동"한다는 주장, 즉 방어전을 펴는데 만족한다는 애덤스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애덤스의 실망은 이해할 만했다.
그는 보스턴 포위 공격뿐만 아니라 북부로의 공격도 원했다.
나아가 아메리카가 독립을 선언하기를 바랐다.
아마 영국군이 보스턴에서 퇴각한 바로 그 다음 날에 독립 선언이 나왔더라면 그는 더욱 흡족해했을 것이다. - P190
 
 
전쟁 후 아메리카 식민지들은 영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자치를 시작하여 1776년 7월 4일 독립을 선언하게 된다.
 
영국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식민지 의회들은 신중한 태도를 보였으나 이 와중에도 식민지의 독립을 부추기는 주장으로 흔들리게 된다.
대표적인 인물이 토머스 페인이다.
 
토머스 페인은 불우한 청년기를 보냈다. 그러다 페인의 친구이자 세무 관리인 조지 스콧이 1774년 그를 벤저민 프랭클린에게 소개했다.
프랭클린은 페인에게서 재능을 발견하고 페인이 아메리카로 간다고 하자 자신의 사위인 필라델피아 상인 리처드 바크에게 소개장을 써준다.
페인은 1774년 11월 30일 아메리카에 도착하여 바크를 찾아갔고 현지 신문에 시와 논평을 기고하는 일을 했다.
 
페인은 다양한 실패를 경험하는 과정에서 글쓰기 기술을 배웠고 그 기술을 인류에게 혜택을 가져다주는 대의에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가 아메리카인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그들이 평소에 갖고 있던 몇 가지 확신에 심각한 도전을 제기했다.
가령 아메리카인은 그들의 권리가 오래된 정체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들의 이해는 영국과의 전통적인 유대 관계에 의해 보호받는다고 확신했다.
페인은 그런 확신이 "환상"이라고 지적했다. - P204
 
 
최근에 아메리카인이 피의 희생을 치렀고, 그 때문에 '모국'에 대한 아메리카의 사랑은 이미 사라져버렸다.
현재 벌어지는 갈등에 아메리카인들은 많은 열정을 쏟았고, 영국을 향한 그 열정은 곧 증오로 바뀌었다.
이러한 분석의 결론은 너무나 분명했다. "타협은 이제 헛된 꿈이다." - P205
 
《상식》은 아메리카의 독립의 당위성을 일깨워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필라델피아에서 발간된 상식은 신문에 게재되었고 주요 아메리카 도시와 마을에서 책자로 간행된다. 몇 달 사이 10만 부가 발간되고 신문의 지면을 채웠다고 한다.
 
미국의 독립 선언서 작성 위원회는 조머스 제퍼슨, 존 애덤스, 벤저민 프랭클린, 로저 셔먼, 로버트 R. 리빙스턴이 참여했고 대부분은 제퍼슨이 맡았다고 한다.
 
대륙회의가 7월 4일 최종 승인한 문서는 위기 사태의 책임자로 영국 국왕과 영국 의회를 지목했다.
독립 선언은 존 로크의 계약 이론을 바탕에 두었다. 
아메리카를 통치하는 영국인이 아메리카-영국 관계의 합의 사항을 위반했고 시정 사항을 여러 차례 건의했으나 거부 당했으니 아메리카는 독립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선언서에는 한계가 존재한다. 예상하겠지만 모든 것이 평등하다는 것에 역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아메리카인에게는 흑인 노예를 해방할 의사가 없었다. 대규모 백인 농장주들이 있었고 그들은 흑인을 지배하고 군림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들을 결코 평등하게 바라보지 않았을 것이다.
 
전쟁은 완전히 종결된 것이 아니었고 양측은 더욱 신중하게 접근했다.
하우가 이끄는 영국군은 뉴욕의 여러 요새에서 워싱턴이 이끄는 아메리카군을 몰아냈으나 결정적인 승리는 아니었다.
고전을 거듭하던 워싱턴은 1776년 크리스마스 트랜턴의 공격으로 마침내 전쟁의 분위기를 바꿀 기회를 잡는다.
 
아메리카가 독립을 선언한 직후 1776년 8월 뉴욕 브루클린 하이츠를 둘러싸고 벌어진 롱아일랜드 전투에서 아메리카군은 영국군에 패한다.
워싱턴은 패배 후 하우가 이끄는 영국군의 또 다른 공세가 있을까 불안했다. 
아군과 적군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그는 진지전과 방어전을 선택했다. 
이는 영국군이 대양과 해안지대, 대부분의 강을 선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군은 해상에서만 강했던 게 아니라 육지에서도 강했다. 
그들은 정규 군대로 일정 이상의 기량을 발휘했다. 
반면 아메리카군은 들쑥날쑥한 기량을 보일 수밖에 없었고 지휘하는 장군들 입장에서는 병사들의 미흡함이 두드러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8월 29일 워싱턴은 참모회의에서 나온 건의에 따라 브루클린 하이츠를 지킬 수 없음을 깨닫고 철수를 결정한다.
아메리카군은 영국군의 포위 공격을 예상하여 영국군을 피해 비밀리에 강 건너 뉴욕으로 철수하였다.
그리고 맨해튼에서도 철수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아메리카군은 영국군의 공세에 밀려 진지를 옮겨 다니며 고전했다.
 
영국 군함은 허드슨강 양쪽의 요새인 포트 워싱턴과 포트 리를 돌파하며 내륙으로 북상했다.
결국 버티지 못하고 항복한 아메리카군은 후퇴를 거듭하다 12월 3일 델라웨어강의 트랜턴에 도착했다.
 
필라델피아를 사수하기 위해 워싱턴은 이곳에서 영국군에 선제공격을 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이 결정은 모 아니면 도였다. 위험하고 무모할 수 있었던 그의 결정에 운명은 뒤바뀌었다.
 
그가 델라웨어강 위쪽으로 밀고 올라가기로 결정한 것은 그의 오래된 열정, 즉 영광과 명예를 얻기 위해 공격하려는 열정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또한 그는 영국군이 봄에 반드시 필라델피아를 공격하려고 할 것이니 그 예봉을 꺾어놓자는 생각도 했다.
"나는 필라델피아를 생각하면 몸이 떨려옵니다"라고 그는 썼다. 하지만 이런 무모한 공격을 감행해야할 만큼 그 도시가 중요한가?
그곳은 아메리카의 수도였고, 그 도시를 잃으면 공동의 대의에 큰 손상을 입을 터였다.
그것은 "모든 고결한 아메리카인의 가슴을 아프게 할 것"이라고 워싱턴은 존 핸콕에게 썼다. 공격의 배경은 바로 그것이었다.
일반 대중의 사기를 유지하고, 대중의 미지근한 애착심을 더욱 강하게 하려는 뜻이었다. - P273
 
추운 날씨로 델라웨어강은 얼어붙었고 워싱턴은 트랜턴 공격을 진두지휘하며 강을 건넜다.
크리스마스 날 밤, 2400명 정도로 구성된 주력 부대가 맥콩키 나루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집결했다.
부대는 둘로 나뉘어 한 갈래는 위쪽인 페닝턴로드로 가고, 다른 한쪽은 리버로드로 향했다.
대포로 헤센인들이 전투대형을 갖추지 못하게 만들고 난 뒤 서서히 포위하는 형태로 전개되었고 전투는 1시간도 안 되어 끝났다.
헤센인과 영국군은 도망쳤고 워싱턴은 펜실베니아로 들어갔다.
워싱턴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병사들을 독려하여 프린스턴까지 북상했고, 직접 말에 타고 지휘하며 승리를 이끌었다.
 
겨울이 되자 전투는 잠시 중지가 되었다가 봄이 되어 다시 재개되었다.
영국 내각은 하우에게 작전지휘를 내리지 못했고 존 버고인은 캐나다에서 남하해 아메리카 공격에 참여했지만 하우와 손발이 맞지 않았다.
 
하우에게 전쟁의 전체적 국면과 현재 진행 상황을 살피도록 지시하는 책임은 아메리카 식민지 담당 장관 조지 저메인 경의 몫이었다.
저메인은 북부에서 모종의 작전이 구상되고 있다는 막연한 소식을 하우에게 알려주었을 뿐 그 이상은 조치하지 않았다.
버고인이 북부 원정대의 지휘권을 받는 것이 거의 확실했던 3월 3일과 4월 19일 사이에 저메인 장관은 하우에게 여덟 번이나 편지를 쓰면서도 버고인 부대의 임무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었다.
저메인은 캐나다의 칼턴에게 버고인이 남하침공부대의 맡을 것이라고 알리면서 그 편지의 사본을 하우에게 보냈다.
그러나 이 편지에는 전략에 대한 설명은 없었고, 하우 부대가 버고인 부대와 협력해야 한다는 지시도 없었다.
그 대신 저메인은 하우에게 보낸 편지들에서 필라델피아 침공 계획을 승인하면서 그 계획이 적절하며 하우의 암울한 전망과는 반대로 그것으로 전쟁이 종결될 것이라는 격려를 써서 보냈다. - P296
 
버고인 부대는 다양한 병력이 모인 혼성 부대였고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했다. 이에 맞서는 아메리카 북부군의 지휘관 필립 스카일러는 부대를 제대로 장악하지 못했으나 호레이쇼 게이츠로 지휘관이 교체되면서 아메리카군에 호기로 작용했다. 결국 호레이쇼 게이츠와 베네딕트 아놀드가 이끄는 아메리카군에게 영국군이 항복하고 만다.
하우는 브랜디와인과 저먼타운에서 아메리카군을 물리쳤으나 완전한 승리 상태는 아니었다.
 
영국과 아메리카 사이의 관계가 흔들리자 유럽의 판도도 불안정해졌다.
영국의 라이벌인 프랑스와 스페인이 영국을 흔들기 위한 기회를 엿보았다. 프랑스와 아메리카가 비밀리에 접촉함으로써 전쟁의 양상은 유럽의 정세를 흔드는 것으로 변모한다.
 
1778년 3월 영국은 윌리엄 하우 대신 총사령관으로 헨리 클린턴 장군을 임명한다.
전쟁은 프랑스에 대항하는 것이 되어야 했기에 서인도제도에 일부 병력을, 플로리다로 일부 병력을 파견하고, 나머지 병력은 직접 이끌고 뉴욕으로 철수하라는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하지만 영국의 핵심 전력은 아메리카에 있었고 서인도제도에서 프랑스에 맞설 군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겨울이 되어 워싱턴이 이끄는 아메리카군은 포지 계곡으로 이동해 겨울 숙영을 했으나 추위와 배고픔에 어려움을 겪었다.
워싱턴 자신도 간단한 식사를 했고 모자란 식량을 구해보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대륙회의 의원들은 필요 식량을 민간에서 강제 징발하라고 권유했으나 워싱턴은 이를 물리쳤다. 혁명의 원칙을 훼손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물론 때때로 물자를 압수하거나 무력으로 빼앗는 경우도 생겼으나 이 때도 약속어음을 주고서 가져오고 판매자 이익을 가능한 보호하려 애썼다.
탈영 병사는 많지 않았으나 일부 병사들은 인근 농가를 약탈하거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총을 쏘는 병사들이 생겼다.
열악한 환경은 군기 저하를 불러올 수 있었다.
 
병사들에게 군사 훈련을 시킬 조련사로 프로이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슈토이벤 남작이 등장했다.
그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소개장으로 아메리카에 도착해 대륙회의를 찾아간 뒤 포지계곡으로 가게 된 것이다.
슈토이벤은 프로이센군의 앞서가는 병영 체계와 전투 방식을 워싱턴 군대에 전수해주었다.
 
워싱턴은 필라델피아에 파견되 있던 스파이로부터 영국군이 그곳에서 뉴욕으로 떠날 것 같다는 첩보를 받는다.
프랑스의 라파예트 후작은 적 보급선을 타격하겠다고 워싱턴에게 제안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그는 필라델피아로 떠났다.
라파예트가 아메리카로 건너온 1777년은 21세도 채 되지 않은 나이였다. 부모와 왕은 그가 목숨을 버리지 않길 원했으나 영국의 독재에 맞서 싸우기 위한 목적 하나로 아메리카로 건너갔다.
 
워싱턴은 아메리카군을 이끌고 포지 계곡에서 동쪽으로 이동하여 델라웨어강을 건넜고, 영국군은 앨런 타운을 지나 샌디 훅 방향으로 진군했다. 양군은 몬머스 법원 청사에서 충돌하였다.
영국군은 찌는 더위에 긴 거리를 이동하여 지쳐 있었다. 
울퉁불퉁한 길과 모직 군복, 성가신 소총 등으로 인해 더욱 버거운 상태였다.
헤센인 용병 부대는 영국군보다 더 두꺼운 군복을 입었기에 고통이 더 컸다.
 
워싱턴은 지휘관들을 사령부로 소집했다. 이 중에 찰스 리가 있었다.
그는 워싱턴과 하우 사이의 포로 교환 합의에 의해 4월에 영국군 포로 신세에서 해방되어 아메리카군에 돌아온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가 영국군에 잡혀 있는 동안 영국군에게 작전 계획을 제공하는 등 동료를 배반한 흔적이 보인다.
포로 신분에서 돌아온 뒤에도 아메리카군은 영국군을 이길 수 없다는 식의 발언을 했고 워싱턴이 지휘관을 맡아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 라파예트가 적임자라고 했다가 라파예트가 다시 지휘를 맡겠다 하자 돌변하여 지휘관을 맡겠다 선언하는 모습을 보인다.
여러 가지로 볼 때 그는 지휘관을 맡기에는 자격이 없는 인물이었으나 워싱턴은 그에게 지휘권을 부여했다.
하지만 그것이 패인이었다. 그는 전투에서 다른 지휘관들에게 제대로 지시를 내리지 않았고 전선 구축에 대한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다행히 워싱턴은 불리해진 상황에서 퇴각하는 아메리카군을 잘 이끌어내었다.
 
해가 바뀌기 전까지 양측에게 전투는 계속 이어졌으나 1778년 말이 되자 영국 내각과 의회 내 비관론이 커졌다.
식민지에 병력을 집중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고 아메리카 전쟁도 실패라는 것이었다.
아메리카군도 초조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워싱턴은 전쟁 종결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남부에 희망을 걸기로 한다.
 
1779년 12월 26일 영국군 원정대는 뉴욕을 떠났다.
찰스턴은 남부 도시들 중 유일하게 1만2천명의 시민이 거주하는 지역이었다. 거주민들은 주로 영국인의 후손이었으나 흑인 노예도 많았고 프랑스 신교도도, 소수지만 프랑스인과 독일인도 있었다.
찰스턴에서 공성전이 발생했고 캠던 전투에서 승리를 취한 영국군은 남부를 반격의 기회로 삼을 수 있게 되었다.

 

 

2권은 둘 간의 많은 전투를 담고 있어 많은 전투명이 나오고 관련된 사건과 인물이 수없이 등장한다.
이 때문에 흐름을 놓치면 곤란할 수 있다.
집중해서 읽기를 권한다^^;
 
나는 이틀 만에 몰아 읽었는데
아메리카의 독립이 쉽게 얻어진 게 아니구나~
꾀를 가진 사람들이 머리를 짜내고 더 좋은 미래를 위해 많은 거래가 오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비록 한계를 가지기는 하지만 아메리카의 독립선언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리뷰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0) 2022.04.11
[책] 미국인 이야기 3  (0) 2022.03.27
[책] 미국인 이야기 1  (0) 2022.03.20
[책]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1  (0) 2022.03.18
[책] 대한계년사 9  (0) 2022.0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