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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국근대사산책 4권(초서)

category 리뷰/책 2011. 11. 3. 05:51

[9] 외부대신은 외세와 황실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면서 파리 목숨 신세가 되었다. 스스로 그 자리에서 도망가려는 외부대신들도 있었다.

이미 18987월 외부대신 유기환이 독일영사 크린에게 불려가 모욕과 구타를 당하는 해괴한 일이 일어났을 정도로, 외부지신의 지위는 땅에 떨어져있었다.

 

[14] 지난 20여 년간 굶주린 열강들에 의해 당할 대로 당한 상태였던지라 이미 정신이 혼미해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16] 이 당시 공직이라 함은 백성 뜯어먹는 면허장 그 이상의 것은 아니었던걸까?

 

[32] 진정한 의미의 개혁은 안에서부터 나오는 것이지 밖에서부터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사회개혁의 필요성이 고조되면 개혁은 마치 태양이 자연스럽게 솟아오르듯 소리없이 이루어지는 법이다.

 

[44] “의정대신 모씨는 몰래 궁중의 수챗구멍으로 빠져나갔고 그밖의 대소 입직관리들은 궁성의 담을 넘어 도망쳐 나갔다. 얼마나 한심한 이야기인가.

국제 정치와 동맹에 의한 세력구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자기 나라 땅이 외국군의 전장이 되는데도 기껏해야 국외중립을 선언하는 것 이상의 행동을 보여주지 못한 지도층이 특히 웃음거리가 되었다.

 

[53] 황성신문190456일자 논설에서도 황인종의 나라인 동양3국이 단결해야 하며 한 나라만 생각하게 되면 동양이 무너지고 말 것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일본의 횡포를 견제하기 위해 한 말이었지만, 일본에겐 꿈에도 그럴 뜻이 없었다. 모든 건 일본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해야만 했다.

 

[66] 대한일보는 일본인이 발행하였지만 송병준이 관계하였다. 춘원 이광수(1892~1950)는 자서전에서 대한일보에 구경을 가서 처음으로 전화통을 보았고, 그날 신문에 자기의 사진과 함께 “13세 나이 어린 소년이란 기사가 게재되었다고 말했다. 1904~1905년에 있었던 일로 보인다. 이광수보다 두 살 위인 육당 최남선이 1904대한일보에 논설을 투곳한 걸로 보아, 이 신문은 당시 적잖은 한국인 독자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76] 러일전쟁 때 러시아 군인들은 한국인과 일본을 구별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단발을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 하는 기준으로 사람을 죽였다. 그래서 전투가 벌어지는 곳에선 기가 막힌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80] 일본 요릿집이 번창하는 것에서 영향을 받아 생겨난 조선 요릿집들이 목욕을 주요 메뉴 중 하나로 제공하였다.

 

[104] 철도는 새로운 미신의 숭배 대상으로 떠올랐다. 한 일본인 기관사는 경부선을 달리는 동안 심한 경우는 하루에 세 번 이상이나 급정거를 해야 했다. 철로에 조선 사람들은 하얀 종이를 나풀거려놓고서 기차가 오는데도 절을 하고 있는 통에 질색이었다고 회고했다. 철도가 만든 개화미신은 철도로 인해 한국인이 겪은 고통과 굴욕을 떨쳐내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렇게 믿는 게 속 편하지 않겠는가.

 

[106] 최근에 차마 볼 수 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어떤 소년이 몽둥이를 가지고 철로 위에서 놀다가 철도 위에 몽둥이를 하나 남겨두었다. 일본인들은 소년을 붙들어서 총살시켰다. 이 범죄자는 겨우 7살이었다. 이 이상의 야만성과 잔인성이 있을 수 있겠는가?

 

[117] 19051월에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국무장관 헤이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한국인들을 위해서 일본에 간섭할 수 없다. 한국인들은 자신들을 위해 주먹 한번 휘두르지 못했다. 한국인들이 자신을 위해서도 스스로 하지 못한 일을, 자기 나라에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을 위해서 해주겠다고 나설 국가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루스벨트는 힘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믿는 철저한 사회진화론자였다. 그는 이미 19008월에 뉴욕 주지사로서 부통령 후보가 되었을 때에 나는 일본이 한국을 손에 넣는 것을 보고 싶다고 했을 만큼 일찍부터 일본에 편향적이었고, 이 편향성은 이후 내내 유지·강화되었다.

 

[132] 200978월 한승동은 우리는 아직도 걸핏하면 동아시아 안정을 들먹이는 가쓰라, 태프트들이 주도권을 쥔 세계에 살고 있다.”고 개탄하면서 당시의 망언들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가쓰라는 대한제국 정부의 잘못된 행태가 러일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해괴한 주장을 폈다. 일본은 한국 정부가 다시는 다른 외국과의 전쟁을 일본에 강요하는 조약을 맺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궤변을 늘어놨다. 태프트는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는 것이 동아시아 안정에 직접 공헌하는 것이라며 맞장구쳤다.”

 

[143] 포츠머스조약은 한국엔 재앙이었다. 일본이 한국을 집어삼키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나라는 하나도 없었다.

 

[147] 한국은 러일전쟁에서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할까?

러일전쟁은 실질적으로 한국 지배권을 둘러싼 제국주의 열강 간의 전쟁이었다. 러일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러시아도, 중국도 아닌, 일본의 식민지가 된 조선이었다. 침략전쟁을 긍정하는 방향으로 불러들인 러일전쟁에 대한 일본의 기억은 우려할 만하다. 반면 러일전쟁에 대한 우리의 깊이 있는 기억이 없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러일전쟁은 오늘날 우리에게 국가의 지도세력이 국제 정세를 잘못 판단하면 국민이 엄청난 희생을 치르거나 나라조차도 망칠 수 있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162] 어떤 국가든지 각자의 상황과 입장에 따라서 상대국과의 관계는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영원한 적도, 아군도 없다. 영원한 이익만이 존재할 뿐이다.

 

[168] 고종이 반대하고 비준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러한 주장은 애국적일지 모르지만 진실은 아니다. 진실이 아닌 것에서 진정한 애국심이 솟을 수는 없다. 나라의 체면을 생각해 무능한 군주를 감싸는 억지 주장을 펴기 보다는 통렬하게 책임을 물음으로써 역사에서 교훈을 얻으려는 자세가 보다 애국적인 것이 아닐까.

 

[224] 독일인 애쏜 써드는 1902년에 발표한 글에서 학교에서까지 자기 나라의 역사나 학문에는 등을 돌린 채 수백 년 동안 중국 학문에만 관심을 두고 열중했다. 이 나라 젊은이들은 중국의 요순시대에 대해서는 꿰뚫고 있지만 자기 선조 나라인 신라 역사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고 말했다.

 

[229] 장지연은 1907대한자강회월보(5)를 통해 한국인들이 하루 빨리 고쳐야 할 다섯가지 병근으로 당파의 고질, 기질의 악벽, 의뢰의 정신, 나태의 고증, 국가사상의 결핍 등을 들었다.

이러한 한국인들의 잘못된 습성의 지적은 본래 외국인, 특히 일본인들에 의하여 선도된 것이었다. 즉 이 시기 일본인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거론되던 한국민족열등성론이 한국인들에게 영향을 주어,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비록 자기비판적인 의도 위에서이긴 하나 자주 거론되면서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도 또한 사회진화론과 함께 식민주의자들의 식민주의이론이 한국인들 스스로에 의해 내재화되는 모습의 하나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298] 역사적 명예의 획득을 둘러싼 사실상의 서울대·연세대 갈등의 해법은 박에스더의 삶에 있는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제중원 설립정신의 계승이리라. 오늘날 서울대·연세대병원의 최우선 목표는 과연 백성을 구제한다는 제중인가?

 

[321] 당시 고종은 일본의 핍박과 잇따르는 시해기도에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 상태였던 것 같다. 심지어 차라리 해외에 나가 죽어도 좋다는 말을 소모프 총영사에게 했을 정도였다. 의병의 도움을 받아 일본 감시요원을 따돌린 뒤 러시아나 청국 국경까지 탈출할 기회를 엿보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에 만약이란 가정법은 없다지만 한일병합 이전에 고종의 러시아 망명이 성공했더라면 역사는 또 어떻게, 어디로 흘러갔을지 자못 궁금한 장면이다.

 

[342] 최종고는 국제화, 세계화를 부르짖는 오늘날과 100년전 미···러 열강에 우롱당하던 구한말 상황과의 유사성을 지적하면서, 우루과이라운드를 비롯한 국제적 도전 앞에 제2의 개국을 두려워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유길준은 무슨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는가? 국내 정치적으로도 개혁을 부르짖는 마당에, 개화가 잘못되어 개혁이 필요했다면 개혁의 구호만으로 참된 개화가 이루어질까?”

 

[361] 1925년 당시 한국인 급수 호수는 29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던 반면, 일본인은 89.9퍼센트에 이르렀다. 조선은 상수도가 늦게 발전해 잦은 전염병 창궐로 몸살을 앓았지만, 먼 훗날 세계에서 가장 물 값이 싼 상수도 대국으로 변하게 된다.

 

[369] 총칼 앞에 무너진 한국의 보통 사람들에겐 오직 교육만이 살 길이었다. 먼 훗날 세계에서 가장 살벌한 경제체제를 갖게 되는 한국의 대학입시 전쟁은 바로 그런 교육구국론을 외쳐야 했던 세월이 너무도 길었던 탓에 한으로 유전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