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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대사산책 2권

category 리뷰/책 2011. 10. 18. 05:43
한국 근대사 산책 2 한국 근대사 산책 2
강준만 | 인물과사상사 | 200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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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 이어 2권이다.

 

2권에 담은 내용은 개신교 입국에서부터 을미사변까지를 다루었다.

 

여러 가지 기억에 남는 것이 많은데 외국선교사인 알렌과
김옥균이 한 업적(!)에 대한 논란.
조선인들이 담배를 그렇게 사랑했다는 것.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청국이 조선에 가하는 힘이 가해졌고
그에 따라 위안스카이(원세개)의 오만방자함이 극에 달했다는 것.
유길준의 너무 늦어버린 한반도중립화론(!).
한반도에 독이 된 청일전쟁.
의의와 한계를 동시에 지닌 동학농민전쟁.
전봉준과 김개남의 역할과 둘의 갈등.
3국간섭과 을미사변과 단발령까지...

 

 

이 책은 대부분의 내용을 동학농민전쟁에 할애했다.


그만큼 여전히 그 명제가 풀리지 않고 있는 사건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그동안 조선민중에 대한 위에 대한 저항으로만 생각했던 나의 얕은 지식에 부끄러웠다.
그리고 그 중심인물에 전봉준만 자리하고 있었는데 새로이 김개남이라는 중심인물과
동학파 내부에도 세력이 여러 개 존재했고 파들 간에 갈등이 심하게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피사체가 되어야 했던 조선인에게 사진은 폭력이었다.

세계 속의 한국은 일본인들이 찍은 사진으로 인해 결코 우호적이거나 중립적인 이미지를 가질 수 없었다. 피사체가 되어야만 했던 사진에 대한 민중의 저항이 조선의 운명과 비슷하기에 안타까울 수 밖에 없다.

 

[15] “일반인들 사이에는 사진이 수명을 단축하고 어린아이들을 잡아다 삶아서 사진 약으로 쓴다는 배외세력의 유언비어가 하나의 원성으로 깊이 잠재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
1880년대 일본인 사진관들은 ‘일그러진 조선의 모습을 서양인들에게 판매하는 데에 열을 올렸다. ... 편향되고 부정적인 풍경이 담긴 사진이 서양인들 사이에서 유통되면서 조선은 문명의 계몽이 필요한 미개 사회의 이미지로 굳어져 갔다.

 

 

일부 조선인에게 기독교는 착취당하는 현실에 대한 보호막이었다.

 

조선인들에게 기독교는 서양을 대변하는 것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일부 조선 민중에게는 대안 모델이었고 현실에 대한 보호막이었으며 방파제이기도 했던 것이다.

 

[107] 일본의 횡포가 심해질수록 높아진 조선 민중의 반일 정서는 갈길을 몰라 헤매다가 기독교 쪽으로 방향을 잡게 되었다. 박정신은 “비서양, 비기독교 국가인 일본이 ‘적’으로 뚜렷이 등장하는 역사적 전개는 개혁적 조선 사람으로 하여금 일본을 통해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고 일본을 의지해서 나라를 개혁하려는 이전의 생각을 송두리째 저버리게 하였다. 서양으로부터 직접 문물을 수용하고자 했고 서양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제중원이 영아 살해의 총본산?

 

서양 의학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가운데 제중원도 그것을 피해가지는 못했나보다. 1886년 전국에 만연한 콜레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가운데 기독교 선교사들이 버려진 사람들을 치료해 구하기도 하였으나 어린이들을 유괴하여 사진약을 만든다는 것으로 비춰졌으니...

 

[95] “외국인이 아이를 죽이는 것은 약을 쓰기 위해서이고 제중원이 그것의 총본산”이라는 내용이었다. 서양인들이 아이를 훔쳐다가 솥에 잡아먹을 뿐만 아니라 부인을 잡아가다 젖가슴을 베어간다는 이야기마저 해외로 퍼져나갔다. 가마꾼들이 제중원 의사의 탑승을 거부하고 성난 군중이 선교사 습격을 시도하기도 했다.

 

 

왜 원세개만 가마를 타고 입궐했을까?

 

알렌이 원세개의 행동을 문제삼은 이유는 이미 조선 내에서 영향력이 가장 있었던 외국인이었기도 했지만 호색한인 원세개가 제중원에서 기녀들을 데려가는 것 때문에 신경이 거슬려서이기도 했다. 

 

[113] 알렌은 일본과 서양의 외교관들은 걸어서 입궐하는 데 반해, 원세개는 가마를 타고 입궐하는 걸 문제 삼았다. 이와 관련 F. H. 해링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럴 수는 없으며 그렇게 하려면 모두가 그래야 하고 아니면 전부가 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항의는 성공하지 못하고 말았다. 원세개는 여전히 가마를 타고 다녔고 다른 외교관들은 주위가 꽤 보기 좋은 도보구역에서 배알했다.

 

 

동학농민전쟁의 횃불은 전라도 고부에서 타올랐다. 왜 하필 호남인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도 호남지역의 쌀 생산이 전국 쌀 생산의 대부분을 차지한 것과 관련이 깊다. 일본은 쌀을 수탈해 자국에서 몇 배 이상으로 팔아 이윤을 챙겼다. 또한 전라도 수령 출신이 거의 서울과 충청도 출신이었는데 그들은 고부 봉기를 일어나게 만든 장본인이면서도 벌을 받기는커녕 계속 승승장구했다.

 

[129] 일본 자국주의가 커가기 위한 자본축적의 주요 공간이던 이 호남벌은 또한 수탈과 약탈로서도 전국에서 으뜸이었으니 근대 한국의 역사적 모순이 모조리 뒤얽힌 지역이다.
여기에 중앙정부의 인사 문제까지 가세했다. “특정한 사람을 따돌리면 처음에는 외로움을 느끼다가 부당성을 인식하면 그것을 깨기 위해 저항하게 된다. 호남 지방의 역사는 여기에서 나왔던 것이다. 그 뒤의 푸대접도 이런 맥락과 충분히 연결되어 있다. 저항은 개혁으로 가는 길이요. 개혁이 미진하면 다시 혁명을 이룩하는 동력이 된다.”

 

 

조선 개혁의 길이 김옥균이 생각했던 길 한 가지밖엔 없었던 걸까?

 

김옥균은 예 중심의 조선이 국민 중심의 조선으로 대변환을 겪고 있는 긴박함을 제대로 읽었으나 비전을 실천할 수 있는 역량 동원에 실패했다. 중국 대신에 등장한 서구 열강의 근대 국가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고 대신 일본의 도움을 받으며 시도했으나 오히려 일본에 배신당하면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설익은 역량으로 무리한 추진을 함으로 씁쓸한 결과를 낳은 것이다.

 

[140] 김옥균이 일본의 절해고도 오가사와라 유배 시절에 남긴 휘호가 ‘정관’ 이라는 게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정관이란 사물을 관찰하고 그 이치를 생각한다는 뜻이다. 과연 조선의 개혁을 위한 길이 오직 김옥균이 생각했던 길 한 가지밖엔 없었던 것인가? 쿠데타건 합법적 방식이건 여러 갈등세력 간 ‘제로섬 게임’을 기반으로 삼는 개혁 방안은 오늘날에도 기승을 부리고 있으니 이를 어찌 보아야 할 것인가?

 

 

단발령은 조선 민중과 일제의 상징투쟁이었다.

 

왜 친일내각은 단발령에 집착했을까? 권력 기반이 취약했던 당시 정권은 개혁 강박증에 시달렸고 빠르면서 가지적인 성과를 원했으므로 서양식 짧은 머리가 개혁의 모습으로 간주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다.

 

[339] 그 동기와 음모가 무엇이었던 단발령은 피차 ‘상징’ 투쟁이었다. 단발령에 저항했던 민중은 친일내각 이상으로 머리카락에 큰 의미를 부여했기에 충돌은 불가피했다. ...
단발령은 그렇잖아도 명성황후 시해로 들끓고 있던 민심을 크게 자극하여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 일본과 친일정부에 대해 무력으로 항쟁하는 결과를 낳게 만들었다.

 

 

왜 조선인은 머리카락과 모자에 집착했을까?

 

모자는 신분과 권력의 상징이었고 그 세월이 길어지면서 숭배 대상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머리카락도 개성을 표현하고 유행을 따르기 위함일 뿐 아니라 억압과 저항이 동시에 표출되는 마당이자 상징이자 개인적인 심경과 결단의 표현 매체이기 때문이었다.

 

[343] 조선인의 모자에 대한 집념은 이른바 존두사상 때문인데 이는 양반문화와 접목돼 관모 숭배로 나타났다. 이를 잘 보여준 사건이 갑신정변 때 일어났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날 밤 김옥균은 고종을 만나러 왕궁에 들어가다가 무감에 의해 제지당했다. 왜 그랬을까? 이규태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황제를 지키는 근위의 사명감에서가 아니라 평복무관으로는 입궐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김옥균이 일갈하자 겁을 집어먹은 이 무감은 착관의 예장만이라도 갖추어달라고 애걸하였다. 이 무장에게는 관이 쿠데타보다 더 중요했던 것이다.”

 

읽으면서 여러번 분노를 터뜨렸다.
과연 알고 당하는 것과 모르고 당하는 것 둘 중에 어느 것이 그나마 더 나을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당시의 무지함과 어리석음이 가져온 결과가 여전히 우리의 목을 옥죄고 있는 현실이지만

결국 당시의 역사적 사실과 논란거리를 모두 알고 진실을 파헤치려는 우리의 노력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이글은 "인터파크도서"에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