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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대사산책천주교박해에서갑신정변까지
카테고리 역사/문화 > 한국사
지은이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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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강준만라는 인물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대중문화의 겉과 속》 이라는 책 때문이었다. 직접 읽은 것도 아니었는데 당시 아이돌그룹을 좋아하던 나는 이 책이 꽤 자극적이고 도발적이었다. 한참 책 때문에 사회가 시끄러웠던 걸로 기억한다. 또한 유시민과의 대립구도에 있는 인물이라는 점이 내게 약간의 오해와 편견을 갖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 현대사 산책》(전18권) 《대중문화의 겉과 속》(전3권) 《한국인 코드》 《한국인을 위한 교양 사전》 《한국 생활 문화 사전》 《역사는 커뮤니케이션이다》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쿨 에너지》외 다수이다.

그는 사회에서 늘 논란거리이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사람들은 그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이아닐까. 그가 내놓는 생각에 공감이든 비판이든 선로를 갖게 된다는 것은 그의 영향력을 입증하는 것이라 본다. 최소한 저자는 대한민국의 정신을 건강하게 만들기 위한 자신의 주장을 책을 통해 펼치려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근대사는 소위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역사이다. 어떤 이의 입을 빌리면 의미 있는 사건이 되지만 다른 어떤 이의 입을 빌리면 혼란과 좌절의 역사가 된다. 저자는 그 논쟁과 논란이 무엇이 ‘역사적 진실’인가 아닌 그 진실의 판단에 영향에 따른 것이라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그 주장이 꽤 흥미로웠다.

또한 이 책은 근대사에 대한 소위 어떤 논지나 주장을 펼치지 않고 논란이 되는 모든 것을 소개한다. 그럼으로써 독자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저자는 근대사에 임하는 자세만큼은 “오늘의 한국을 성공으로 보며 앞으로 더 큰 성공을 할 수 있다고 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 투쟁의 역사가 있었기에 오늘에 감사할 수 있고 미래를 위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니까.


이 책은 여러 가지 사료들을 긁어 모아 이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덧붙이는 형식을 담은 종합서 같은 느낌이다. 다양한 사례와 에피소드로 딱딱하지 않아 쉽고 재미나게 읽을 수 있다. 또한 사건에 대한 여러 주장들을 확인하면서 나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계기도 된다.


1권은 천주교 박해부터 시작해서 갑신정변 까지를 다룬다.


개화기 조선의 지식인은 프랑스 혁명을 어떻게 보았을까?


프랑스 혁명은 알다시피 유럽과 세계 역사에서 정치권력이 소수의 왕족과 귀족에서 일반 시민에게 옮겨지는 획기적인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이것을 조선의 윤치호는 동학전쟁에 비유하였고 유길준은 비판적으로 보았다. 독립신문은 프랑스 혁명 같은 국민 혁명을 일으키는 것을 두려워했다.


[30] 윤치호는 1895년 2월 18일자 일기에서 “... 동학당들이 양반들을 다룸에 있어 보여준 잔인성은 (프랑스)혁명 당시 프랑스 귀족들이 겪었던 유혈적 폭력상태를 연상시킨다”고 썼다.

유길준은 「서유견문」에서 “근대 프랑스의 소란 때 고금 무비의 폭행을 마음대로 휘두른 무리들이 다 무식하고 방탕하고 어리석은 무뢰한들이라 좋은 정부 밑에 있었다 해도 그 생계를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며 프랑스혁명을 비판했다.

「독립신문」 1898년 7월 9일자 논설은 “백여 년 전에 불란서에 났던 민변이 대한에 날까 염려라 하니... 대단히 다른 것이 몇 가지라 ... ”


이양선은 충격과 공포의 대상이었다.


1850년대부터는 조선에 이양선의 출몰이 없는 해가 없었다. 이양선은 말 그대로 ‘이상한 모습을 한 배’라는 뜻인데 조선인의 눈에 비친 서양인들의 배는 놀라운 외양을 가지고 있었던 데다 단순하게 탐험하러 온 것이 아닌 목적성을 가지고 온 것이었기에 공포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56] 서양인들의 배는 조선 선박과는 전혀 다르게 생겼는데 조선인들이 보기에 선체는 마치 태산과 같았고 범죽은 하늘 높이 치솟았으며 빠르기가 마치 나는 새와 같았다.


[59] 이양선들 중엔 탐험과 연안 측량에만 머무르지 않고 재물을 약탈하거나 사람을 죽이는 등 난폭한 행동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여항문화가 지배문화였다면 조선의 운명은 달라졌을까?


여항인은 시전상인층과 실무행정을 맡은 하급관리를 아우르는 중인계층을 의미했다. 이들이 형성한 문화는 문화예술적인 욕구의 증대와 유흥문화의 발달로 표현되었다. 상대적으로 조선의 지배층은 외부 세계에 대한 소식이 어두울 수 밖에 없었고 이는 조선의 운명을 갈등의 소용돌이로 만든 장본인들이 될 수 밖에 없었다고 본다.


[62] 차라리 여항문화가 조선의 지배적인 문화였다면 조선의 운명은 달라질 수 있었을까? 부질없는 가정법이긴 하지만 나중에 개화사상 수입과 유통에 앞장선 선구자들이 주로 중인계급이라는 점에서 한번쯤 생각해봄직한 의문이다.


왜 조선은 철없는 어린이를 임금 자리에 앉혔을까?


조선 시대 중기 이후 세도정치가 판을 쳤다. 이는 허울 뿐인 왕을 자리에 앉히고 실권은 외척이 장악하겠다는 심산이었을 것이다. 또한 그것은 정치적인 대립 안에서 이루어졌다.


[76] 안동 김씨의 60년 세도정치(1804~1862) 때문이었다는 설명이 유력하다. 어린 임금을 앉혀놓고 실권은 세도가문이 장악하겠다는 음모의 산물이었다는 듯이다. 그러나 오수창은 앞 시기의 숙종도 열넷의 나이로 즉위했지만 세도정치가 실시되지는 않았다며 순조 이후 “국왕 외척의 전권은 어느 날 돌출된 것이 아니라 붕당 간의 대립이 그 극한까지 나아가 더 이상 계속될 수 없는 상황에서 권위에 위협을 느낀 국왕으로부터 선택과 후원을 받음으로써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다.


조선인은 착한 미개인?


19세기 조선을 바라보는 서양인의 시각은 어떠했을까. 당시 서양 선교사들 중 다블뤼라는 사람이 가졌던 시각의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처음에는 조선의 상태를 반야만 상태로 바라보았지만 후에는 조선인들의 문화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조선인의 상부상조 정신에 감동한다는 말을 밝혔다는 것이 흥미롭다.


[98] 조선인들은 반야만 상태에 있기 때문에 성격이 매우 까다롭다. 이 나라에는 교육이란 것이 전혀 없다.


[99] “이 나라에서는 자선 행위를 진정으로 존숭하고 실천한다. ... 없는 사람과 나누는 것, 이것이 바로 조선인이 가진 덕성 중의 하나이다.“


칸트는 알아도 최한기는 모르는 한국인!


먼저 최한기라는 사람을 알 필요가 있다. 최한기는 한국 과학의 아버지로 개항 이전까지 서양의 자연과학을 가장 많이 그리고 제대로 소개한 전도사였다. 당시에는 빛을 보지 못하고 계승자를 얻지 못한 채 오랫동안 잊혀졌다 1960년대부터 연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190] 2003년 김용헌은 “칸트는 알아도 최한기는 모르는 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심지어는 캉유웨이나 후쿠자와 유키치의 이름은 대충이나마 알고 있지만 최한기의 이름은 왠지 낯설다. 지난 100여 년 동안 근대화, 아니 서구화의 길을 걸으면서 우리는 그를 잊고 지냈다. 지독한 식민지성!“이라고 개탄했다.


한국 축구는 축구 종가 영국의 피를 물려받았다?


영국을 모태로 하는 근대 축구가 한국에 전파된 것은 1882년 영국 측량함에 타고 있던 승무원들을 통해서였다고 한다. 사실 삼국시대부터 ‘축국’이라는 놀이가 있었다고 하지만 현대의 축구의 형태를 알게 된 것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던 것이다.


[248] 1882년 6월 인천항에 상륙한 영국 측량함 플라잉피시호의 해군 승무원들은 선상생활의 지루함을 덜기 위해 연안 부두에서 공을 찼고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지켜보는 주민들에게도 축구를 가르쳤다. 이후 주민들이 선원들이 두고 간 공을 차면서 한국의 근대축구는 시작됐다. ...

플라잉피시호가 놀다간 지 1개월이 지난 1882년 7월엔 다른 영국 군함 엥가운드호가 인천항에 입항했다. 승무원들은 서울에 들어와 축구를 했는데 이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구경했다. 승무원들은 구경하던 사람들에게 공을 주었고 이후 공놀이가 서울에서도 시작되었다.


갑신정변은 개화 청년들의 성급한 오판이었나?


갑신정변은 청군의 불법 궁궐침범과 군사적 공격, 개화당의 일본군 차병과 일본군의 철병, 민중의 지지 결여, 시민층의 미성숙, 정변 과정에서 민비와 청군이 비밀리에 연락하는 것을 색출하지 못한 것 등의 원인으로 인하여 3일 천하로 끝났다.


[335] 급진개화파들이 품은 뜻은 나름대로 확고한 명분에 근거했던 것일망정 쿠데타의 방법은 너무도 어수룩해 그들의 ‘책임윤리’를 의심케 할 만한 것이었다. 또한 민심에 대해서도 큰 오판을 했다. 그들은 “국왕의 명의로 내정개혁안을 발표하기만 하면 즉시 민중적 지지를 얻게 되리라고 기대했”지만 “실상은 그들에 대한 민중적 분노가 가라앉지 않고 그 모든 일이 일본의 식민지 전략의 차원에서 꾸며진 것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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