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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신장의 역사

category 리뷰/책 2024. 9. 23. 10:23
 
신장의 역사(서울대학교 중앙유라시아연구소 교양 총서 2)(양장본 HardCover)
고대 시기 신장의 지리적 환경에서부터, 현대에 벌어지고 있는 민족 분쟁까지 수천 년에 걸쳐 신장에서 이루어진 역사를 정리한 『신장의 역사』. 다양한 민족들이 등장했다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여정을 드라마틱하고 역동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또한, 신장의 역사를 통사의 체제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 책은 신장이 지금껏 동서 문명의 가교라는 측면만 강조되고, 교류가 이루어진 역사 현장은 주목받지 못한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신장의 민족들이 다양한 외부 세력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만들어간 역사를 다루고 있다. 가령, 어떤 민족이, 언제 지배했느냐에 따라 거사, 고창 등 다양한 언어로 알려진 투루판 지역처럼 신장의 역사는 여러 문화가 만나 때로는 서로 배척하고, 때로는 서로 받아들이며 만들어졌다는 점을 지적한다.
저자
제임스 A 밀워드
출판
사계절
출판일
2013.01.25

위구르의 역사를 읽으면서 위구르 문화 연구가 중국이 신장 자치구를 설정한 이후 본격화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신장 관련 이야기는 논픽션인 <갑골문자>나 근현대 중국사 관련 책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읽은 바 있었으나 신장 자체만을 다룬 역사를 읽지는 못했는데 이제는 묵혀둔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싶어 주저없이 집어 들었다.

 

신장은 1500년 동안 투르크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영토였으나 18세기 중반 이후에는 대부분 중국의 지배 하에 있던 곳이다. 신장은 과거에 ‘중국령 투르키스탄’, ‘투르키스탄’으로 불렸다. 과거 이 지역의 용어를 선택하지 않은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첫째, ‘투르키스탄’은 1930년대와 1940년대 각각 생겼다가 단명한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이 있어 구분이 되지 않는다. 둘째, 중국과 글로벌 지구는 ‘신장’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반면 신장을 중국이 강제로 정복했다고 생각하는 위구르 민족주의자들도 ‘중국령 투르키스탄’을 쓰는 것에 대해 달가워하지 않는다. 따라서 신장이라는 용어를 결국 선택한 것이 아닌가 싶다. 

 

고대 시기 이 지역은 흉노, 쿠차(월지), 유연, 돌궐, 위구르가 거쳐갔다. 

 

흉노가 맹위를 떨치던 시기 동쪽에는 한나라가 자리했다. 한나라는 흉노와 ‘중가리아’라고 불리는 신장 북부 지역을 두고 계속 투쟁했으나 전반적으로 흉노에 밀려 거점을 확보하지는 못했다. 흉노가 타림분지와 투루판 분지를 이용하여 식량을 얻고 세수를 거둬 들이려 한 반면 한은 유목 세력의 자원을 빼앗고 힘을 억제하고자 서쪽으로 이동하려 했다. 이처럼 둘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쿠차는 3~4세기 거대한 불교 도시였는데 3중으로 된 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안에는 천 개의 불교 사원과 불탑이 있었을 정도였다. 쿠차는 한 번쯤 들어봤을 승려 ‘구마라습(쿠마라지바)’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쿠차 인근에는 석굴을 비롯한 많은 불교 사원과 성소가 있었다. 현지 귀족들이나 부유한 상인들은 불교 문화의 영향을 받아 불화나 불경을 제작하는 일에 후원을 많이 했다 한다.

4세기 중반 이후 유연이 흉노 세력을 뚫고 중가리아를 점령한다. 그러나 한 세기 후 유연은 북위의 공격을 받아 에프탈에게 그 자리를 넘겨준다. 돌궐은 유연의 지배 아래 있다가 국가를 건립했는데 중국의 수와 당 왕조의 역사적 흐름에 따라 부침을 겪는다. 

 

9~10세기 무렵 세력이 재편된다. 위구르는 돌궐의 뒤를 이었다. 코초 위구르가 ‘고창 위구르’, ‘위구리스탄’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동북부를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했다면 카라한 조는 중가리아 서부를 책임졌고, 탕구트는 (동)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했다. 

소그드인 네트워크는 중가리아를 중심으로 서부와 동부를 왔다 갔다하며 상업 흐름을 장악했다. 

중국과 신장 및 서역의 일부 지역사이에서 교역을 하던 상인들은 대부분 소그드인이었는데 이들은 신장뿐만 아니라 북중국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지역에서도 상업을 장악하고 있었다. 반면 중국의 상인들은 755년까지 당의 사료에서 "놀라울 정도로 부재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 P83

소그드인들은 소그드 문자와 마니교 종교를 믿었다. 위구르인들은 소그드 문자를 이용해 위구르 문자를 만들었고 뵈귀 카간 시절에 마니교 개종을 하기도 했다. 카라한조는 투르크의 이슬람화를 이끌었다. 

 

어느 경우이건 9세기와 10세기 투르크 부족의 정체성(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학문적으로 격렬하고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이다)에 대해 얼버무리는 근본적인 이유는 오늘날 중국의 위구르 민족의 정체성과 신장지역에 대한 이들의 역사적인 ‘권리주장‘을 현대의 민족주의자들이 우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논의는 호도된 것처럼 보인다. 코초 위구르와 카라한조 정권 모두 외부의 정복 엘리트들에 의해 수립되었는데, 이 엘리트 집단은 토하라인과 이란인을, 경우에 따라서는 인도인을 그리고 코초에서는 중국인 주민들을 지배했으며 이들과 통혼했다. 유전학적 유산 이외에도 이 제국의 궁정은 정치적, 역사적 그리고 문화적 유산을 이지역과 자신들이 지배한 백성들에게 남겼다. 정복 부족이 어떠한 이름으로 알려졌건 간에 카라한조의 경우는 후일 역사가들이 부여한 명칭이다-이러한 유산 모두가 후일 이 지역에 거주했던 사람들에게 전해졌고 그들과 함께 역사의 일부가 되었다. - P104~105

 

17세기에 이르러 신장 지역은 이슬람화되었다. 이로서 신장 지역은 문화적으로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의 페르시아 지역과 연결되는 동시에 몽골 이후 북중국 지역의 문화와도 역학 관계로 연결된다. 

청은 러시아가 동진하면서 갈등에 놓이고 영국령 동인도회사가 북진하면서 글로벌 각축전을 벌이게 된다. 

 

1853년에 이르러서는 청 중앙 정부의 국고가 바닥났으며, 각 성의 조세 기반이 반란, 특히 중국의 곡창이자 비단 산업의 중심지인 풍요로운 양쯔 강 중남부의 성들이 태평천국운동으로 인해 황폐해졌다는 점이다. 이해부터 신장에 지급되는 은 보조금은 연체되었으며 곧 지급이 완전히 중단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신장의 청 당국은 처음으로 비축해 놓은 재원을 사용하고 전당포 주인들에게 이자를 붙여서 자금을 투자했으며 위구르 노동자들을 귀금속채굴에 동원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또한 한족과 위구르인들에게 새로운 세금을 부과했으며 벡들도 새로운 세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했다. 관직은 최고 입찰자에게 판매되었고 이들은 이후 자신들의 투자금을 회수하기위해 관할 하에 있는 백성들을 착취했다. 벡들은 청 당국에 뇌물을 제공한 대가로 자유로이 권력을 휘둘렀다. 이와 동시에, 타림분지의 주민들이 점차 동요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장 북부와 남부의 청 팔기군은 노쇠해졌으며 질병과 기아, 아편 중독으로 인해 병력이 손실되고 사기도 떨어졌다. - P183~184

 

청은 무너져 가는 제국의 힘을 짜내어 1876년 신장을 수복하고 1884년 신장 성을 건설한 이후 현지의 한화 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신장은 이슬람 문화권이었기 때문에 서부의 지역들과 문화적으로 더 밀접했다. 1920년대 이후 민족주의와 근대, 사회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등장, 러시아와 중국의 혁명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 동안 중국은 양쩡신, 진수런, 마중잉, 성스차이, 장즈중 등 다양한 군벌이 군림하였다. 

 

1944년 신장 북부의 3개 지구에서 발생한 반란과 뒤이어 생긴 동투르키스탄 공화국 정부는 지역의 반중국적 정서와 (‘범투르크적‘이지 않은) 투르크 민족주의적 정서로부터 발생한 것으로, 이 운동은 정치단체를 돕고 주요 지도자들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군수물자와 군사훈련, 고문들을 제공한 소련으로부터 지원을 받았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소련에 의해 가능해졌으며 또한 통제되었다. 소련은 신장의 위구르족과 카자흐족 및 다른 민족들 사이의 민족주의적 열망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후원하고 이용했으며, 1945년 9월에는 동투르키스탄 민족주의자들의 희망보다는 아시아에서의 소련의 전략적 목표와 관련된 이유로 인해 결정적인 순간에 이를 제지했다. - P327

 

중국은 토지 개혁 운동 이후 통치를 확립하고 사회주의 이행을 진행하였으며 신장 지역에 자치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55년 신장위구르자치구가 들어서면서 신장이 중국의 통제 하에 들어오게 된다. 이후 문화대혁명 기간을 지나 중국에 개혁개방 바람이 불었으나 신장 지역은 큰 변화가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1990년대 이후가 되면 교육과 의료, 기간 시설에 투자가 이루어지며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변화가 일어난다. 개발 붐이 일어나며 이주를 통해 인구가 급증한 것이다. 이로 인한 개발로 인한 환경의 문제, 중국의 지배력과 탄압에 의한 인권 문제를 고민해보아야 할 것 같다.

 

‘엄중 처벌‘ 캠페인 아래 범죄자들과 분리주의 집단들을 체포하기 위한 노력을 강화하는 것에 더해, 1996년의 7호 문건은 1990년대 신장 소수민족들 사이의 문화 영역에 대한 전면적인 통제를 집대성했다. 이러한 통제는 종교와 교육 문제에서 특히 명백했다. - P468

 

2000년대 초 당의 이론가들은 이미 이와 동일한 방향으로 민족 체제의 기본적인 개념들을 수정하고 있었다. 이를 보여 주는 징후 중 하나가 공식적 영역에서 ‘민족‘이라는 용어를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변화였는데, 스탈린식 민족 이론과 정책을 반영하는 ‘nationality‘라는 기존의 번역 대신 중화인민공화국의 공식적인 자료들은 ‘ethnic‘이라는 용어를 채택했다. 일례로 ‘Nationalities Affairs Commission‘ ‘Ethnic Affairs Commission‘]되었으며, 2005년 2월 발표된 백서는 ‘중국 소수 민족을 위한 지역 자치Regional Autonomy’s for Ethnic Minorities in China‘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다. 이처럼 사장된 스탈린식 민족 정책으로부터 이탈함으로써 중국은 일거에 이데올로기적으로 성가신 ‘다국적 국가multi-national state‘로부터 미국과 같은 ‘다민족 국가multi-ethnic state‘로 변모했다. 본래의 중국어 용어가 변하지 않은 채로 남아 있기는 했으나, 새로운 영어 번역은 사실상 위구르인과 티베트인 및 다른 민족들을 (영어에서는 자결권과 아마도 국민 국가를 암시하는 ‘국민‘의 지위로부터 민족 (그리고 국가에 포함된 sub-national) 집단의 지위로 격하시켜 버렸다. 1990년대 폭력 사건의 여파 속에서 자치와 민족에 대한 재해석은 카슈가르로의 철로 확장만큼이나 명백히 신장에 대한 중화인민공화국의 통합주의적 접근법을 잘 보여 준다. - P473~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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