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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허삼관 매혈기

category 리뷰/책 2024. 9. 23. 10:19
 
허삼관 매혈기
전 세계적으로 중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위화의 등단 40주년을 맞아 대표작 《인생》, 《허삼관 매혈기》 개정판이 도서출판 푸른숲에서 출간되었다. 2007년 3판 출간 이후 무려 16년 만의 개정이다. 1996년 국내 첫 출간 이후 지난 30여 년간 여러 세대를 통과하면서도 줄곧 큰 사랑을 받아온 두 작품을 새 모습으로 만나볼 수 있게 되었다. 내부적으로는 번역가 최용만과 백원담이 완성도에 심혈을 기울여 문장을 다시 세밀히 손보았으며, 외부적으로는 전통적 디자인에서 탈피해 모던한 디자인으로서 고전의 면모를 강조하였다. 위화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모옌, 루쉰문학상을 수상한 옌렌커와 함께 중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거장이다. 《인생》과 《허삼관 매혈기》는 굴곡진 역경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휴머니즘을 감동적으로 담아내온 위화의 필치가 가장 잘 담겨 있는 대표작이다. 2000년대 국내에서 가히 ‘위화 열풍’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45개국 이상에 번역되어 전 세계인의 마음을 울렸다. 삶이 계속되는 한 영원히 유효한 이야기의 품격을 이제 두 눈으로 확인할 차례다.
저자
위화
출판
푸른숲
출판일
2023.09.05

 

가능할까?

야곱 알만스의 일개 백성도

장미와 같이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이

죽어갈 수 있을까?

 

남들 앞에서는 다소 비굴해 보이지만, 자식과 마누라 앞에서는 자신만만해 집에서 늘 잔소리가 많은 사람. 그는 그의 삶이 그렇듯 현실적인 사람이다. 그의 이름은 허삼관이다. 

 

허삼관은 성안의 날실 공장에서 누에고치를 대주는 일을 하는 노동자로 일한다. 이 부근에는 피를 팔고 돈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 피를 잘 만들기 위해 몸을 관리하는데, 물도 마시지 않고 물을 마신 뒤에는 오줌까지 참는 모습이 웃프기 짝이 없다. 혈두는 병원에서 피 파는 걸 관리하는 사람인데 사람들은 그에게 좋은 값을 받으려고 아첨을 하며 갖은 노력을 다한다. 방씨와 근룡은 허삼관과 피를 함께 파는 동지다. 

 

방씨가 말했다.

"우리가 판 건 힘이라구. 이제 알겠나? 자네 같은 성안 사람들이 말하는 피가 바로 우리 촌사람들이 말하는 힘일세. 힘에는 두 가지가 있지. 하나는 피에서 나오는 힘이고, 나머지 하나는 살에서 나오는 힘이야. 피에서 나오는 힘은 살에서 나오는 힘보다 훨씬 더 쳐주는 법일세."

허삼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어요. 그 힘이란 게 주머니 속의 돈이랑 똑같은 거군요. 쓰고 나서 다시 벌어들이는...."

 

허삼관에게는 허옥란이라는 아내와 일락이, 이락이, 삼락이라고 하는 세 명의 아들이 있다. 가족이 있다는 것은 소위 바람 잘 날 없는 일들이 많을 수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허삼관은 집안에 일이 있을 때마다 피를 팔고 35원을 받은 후 돼지간볶음에 황주를 먹으러 가는 것이 루틴이었다. 

 

잠시 후 돼지간볶음 세 접시와 황주 세 잔이 나왔다. 허삼관이 돼지간을 집으려고 젓가락을 들다 보니, 방씨와 근룡이는 술잔을 먼저 들어 입술에 살짝 대고 눈을 가늘게 뜬 채 한 모금씩 마셨다.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카" 소리가 터져나왔고, 찌푸렸던 얼굴이 기지개를 켜듯 팽팽해졌다.

"이번에는 깔끔하게 됐구먼."

방씨가 한숨 돌리며 말했다.

허삼관도 들었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술잔을 들어 한 모금 살짝 맛보았다. 황주가 목줄기를 타고 따뜻한 기운을 전하며 흘러내리자 그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카" 소리가 새어나왔다. 방씨와 근이가 그 모습을 보더니 소리 내어 웃었다.

 

평범한 직장인이 일터에 문제가 없다면, 사회가 혼란하지 않다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문화대혁명으로 먹고 살 길이 어려워지고, 농촌 소개령이 떨어지지 않고, 아들과 떨어져야 할 일이 없었다면 집안은 덜 힘들지 않을 수 있었을지.

이 때 먹는 돼지간볶음과 황주는 자신의 몸을 내어 놓고 소정의 보상을 받는 개념일 것이다. 그러나 피를 한 번에 팔 때 두 그릇을 뺀다고 한다. 몸에 들어가는 주사 바늘 자체가 싫은 나로서는 검진 때 한 번씩 빼는 그 주사 바늘만큼의 피도 겁이 나는데 하물며 두 컵도 아니고 두 그릇이라니 생각만 해도 버거웠다. 아무튼 한 번 피를 팔고 나면 세 달은 쉬어야 보충이 될 정도라고 한다. 1950~1960년대 무렵은 중국도 먹을 것이 변변치 않던 시절이었다. 먹는 것이 부실한 마당에 피를 내어놓는다는 것은 목숨을 담보로 한 행위일지 모른다. 

 

가끔 아버지가 만들어주셨던 오이냉국이 생각날 때가 있다. 찬 음식에 시큼한 식초를 더한 이 음식은 원래 내 기호에 맞지 않는 음식이었다. 어릴 때는 집안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드는 아버지가 싫어 피해다니기 바빴었다. 그러다 어느 날 아버지가 조금은 변했다고 생각이 들었을 때가 찾아왔는데, 이따금씩 오이냉국을 만들어서 우리에게 내어주시곤 했다. 그때는 이 음식을 먹으면서 '참 맛대가리 없다.' 했지만 겉으로는 아무 말 없이 먹고는 했다. 그러나 한참을 지나 지금의 나이가 되었을 때 이따금씩 이 음식이 생각날 때가 있는데 이 책을 읽으며 이 때의 기억이 또 떠올랐다. 구체적인 기억도 아니고 그저 스냅샷 같은 장면으로 기억될 뿐인데도 내 뇌리에 잔상처럼 남은 것을 보면 이는 내게 제법 중요한 기억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사람마다 긴 인생을 지나며 고비는 찾아온다. 허삼관의 인생에도 여러 번 고비가 있었다. 작품 마지막 무렵 최후의 죽을 고비가 지나고 시간이 꽤 흐른 뒤 허삼관은 거리에서 어떤 냄새를 맡으며 피를 팔고 나와서 먹던 음식들을 떠올린다.

 

"난 그냥 돼지간볶음하고 황주가 먹고 싶어."

 

마침내 돼지간볶음 세 접시와 황주 한 병, 두 냥짜리 황주 두 사발을 마주한 허삼관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음식 자체에 대한 욕구보다는 아픔과 고통을 넘기고 승화시킨 그 때의 기억과 감각을 찾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각자의 삶에서 다시 떠올리기 싫은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한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더 큰 고비가 찾아오면 사라지는 것이 낫겠다 싶을 때도 있지 않나. 그런 험난한 순간을 넘어온 이들에게 이 책은 결코 웃을 수 없는 씁쓸함을 남기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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