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문제는 그것이 발생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얼마나 피해자들의 증언이 정확한가, 당시의 법이나 규칙에 얼마나 부합하거나 위반하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위안부' 피해자들이 겪은 현실을 다른 맥락으로 이동시킬 수 있는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맥락 혹은 질문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이다.
이 책은 일본군 위안부 운동과 담론에 대한 쟁점을 들여다보고 앞으로의 위안부 담론을 포스트 식민 페미니즘적으로 어떻게 모색할지 고민하는 글들이 실려 있다.
저자는 '위안부 연구'와 관하여 이브 세즈윅의 '편집증적 읽기와 회복적 읽기'를 가져와 제시한다. 편집증적 읽기는 글을 읽기 전에 이미 텍스트에 대한 의심을 전제하며 그것을 문제제기하는 의심의 방법론이다. 반면 회복적 읽기는 자신이 알고 있는 앎의 한계에 부딪치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단정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선언적 지식에서 벗어나는 앎의 형태를 만날 수 있게 해준다는 의미에서 편집증적 읽기보다 열려있는 관점이다. 당연히 저자는 후자의 읽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는 간단하게는 책을 읽는 방식이지만 사회적으로 다양한 상황의 복잡한 문제에서 사용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몇 가지 주목한 점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정대협의 위안부 문제에 관한 인식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인 위안부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민족주의, 보편주의 관점에서.
두 번째, 위안부 모집에 강제성은 없었는가? 램지어가 주장하는 대로 계약에 따른 경제적 논리로 설명이 가능한 것인가.
세 번째, 소녀상에 설정된 고정 이미지는 어떻게 볼 것인가. 위안부 관련 판매 굿즈에 돈을 내는 사람들의 심리는?
네 번째, 영화 귀향에서처럼 피해자를 두둔하는 방식이 결국 가해자들의 방식대로 재현된다면 이는 또 하나의 폭력 방식이 되는 것이 아닌가.
다 섯째, 위안부 문제는 보편의 문제인가, 지역적으로 다르게 적용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부분이다.
1. 정대협은 1990년대 초 위안부 피해자들의 대책 마련과 후원을 위해서 탄생한 민간 단체다. 몇 년전 정대협 기금 논란이 터진 이후에는 그 성격이 . 고노 담화 이후 정대협은 자신들이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문제를 노출시켰는데 정대협이 발표한 내용은 조선인 위안부는 강제로 끌려갔기 때문에 성 노예적 성격을 부여할 수 있으나 일본인 위안부는 공창 출신이 많았기에 동일한 성격을 부여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일본인 학자 야마시타 영애는 이는 잘못된 인식이라고 이야기한다. 정대협의 관점은 민족주의적 인식이 농후한 인식이었다 생각된다.
야마시타 영에는 또 위안부 피해 보상에 대한 국민기금 정책에서도 일본 정부가 책임을 지지 않고 국민기금에서 피해자들에게 돈을 지불하는 것은 책임을 피하기 위함이라 하여 거절한 것에 대해 불편을 느꼈다고 한다. 정작 피해 당사자들의 의견은 반영된 것인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이 문제는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같은 피해자라고 해서 다 같은 대응을 원하는 것은 아닐 것 같다.
2. 박유하가 한참 논란이 될 때가 있었는데 램지어의 논문 발표 이후에는 그 파장도 그렇고 논란이 저물 줄을 모른다는 생각이다. 램지어는 <태평양전쟁기 섹스 계약> 논문에서 '모든 인간은 합리적 경제인'이라는 경제적 이유를 들어 위안부 여성들이 합리적 계약에 의한 선택이라는 논리를 편다. 그러나 합리적 인간으로서의 경제인이라는 생각에 계층 간 권력 관계는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모든 이들에게 적용될 수도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면 다 되는 것이라는 식으로 기존의 패권적 경제 질서를 옹호하는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 그의 논문은 식민 지배를 옹호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성 매매 산업조차도 옹호하고 있는 것이 문제적으로 보인다. 여전히 '반일'을 넘어서지 못하는 사회 정치적 상황에서 그의 주장은 민족주의를 넘어서려는 노력을 좌초시킬 소지가 다분하다.
3. 소녀상은 늘 정형화된 모습이다. 단발 머리에 한복을 입고 두 손은 무릎 위에 가지런히 댄 모습. 이런 소녀상의 모습이 위안부가 할머니에서 소녀로 이미지화되는 데 한몫을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소녀상이 훼손되는 일이 발생하면 마치 피해자의 신체가 훼손된 것처럼 대응하는 경우도 있으니 말이다. 해외 각국에 전시 성폭력 문제의 해결 촉구를 위해 소녀상이 세워지고 있다. 이를 철거하려는 일이 발생할 때마다 현지에서도 그렇고 국내 정치로도 끊임없이 논란이 된다. 소녀상은 어느새 소비되는 물체처럼 되어 버렸다.
과거 나는 위안부를 상징하는 나비, 할머니들이 그린 그림이 담긴 에코백이나 노트 등 여러 굿즈 물품을 산 이력이 있다. 내 생각은 그랬다. 직접 위안부 할머니를 대하지는 못하지만 내가 산 물품이 그분들께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무언가를 했고, 이것으로 충분하다라는 식으로 마음의 위안을 삼은 것은 아니었는지 반성을 하게 되었다. 사실은 이 문제 자체에 대한 본질에 대해서 진지한 고민은 없이 말이다.
4. 영화 <귀향>은 역사적 사건, 폭력을 어떤 방식으로 재현해야 하는가 생각하게 만든다. 사실 나는 이 영화를 보지 못했으나 책에서 언급하는 장면의 내용, 카메라 워크 등을 떠올리는 것 자체만으로 충분히 힘겨웠다. 재현은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비단 현재에 노출시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영화의 내용과 구성에는 주관적인 입장이 들어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취하고 뺄 것인가에 따라 영화의 내용은 달라진다. 하물며 같은 내용을 조감도로 보느냐 투시도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비춰지기도 한다. 극적인 효과를 위해 감독 및 스탭진이 여러 개의 장치를 두었으리라 짐작할 만하지만 거기에 과연 피해자들의 입장은 고려되었는가 하는 것은 의문점이 있다. 주체성이 부정되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는 일은 현재도 역시나 불편하다. 위안부 여성들이 겪은 성폭력을 포르노그래피적으로 표현한 설정은 문제적이라 할 수밖에 없다.
5. 일본 제국주의와 위안부 문제는 한국과 일본의 대응으로 인해 이슈가 세계적으로 뻗어나갔다. 이로써 위안부는 글로벌화된 피해자 또는 희생자가 되어 보편 인권의 문제에서 다루어지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인권과 보편성 측면에서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것에 부족함은 없는가 생각해보게 된다. 어느 제국주의든 전시 성폭력에 노출된 피해자들이 있었다. 다만 상황은 지역적으로 다르게 나타나기 마련인데 이를 보편적으로 정리가 가능하냐 하는 문제다. 반대로 지역과 맥락을 고려하면 보편 인권과 폭력에 대한 피해의 문제에 대한 고민을 모으지 못한다는 단점이 생긴다. 글로벌 보편적 관점은 좋으나 차별되고 배제되는 소수자에 대한 고려가 있어야 할 것이라는 필진의 말에 공감했다.
향후 위안부 담론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이제 정말 다양한 시각에서 고민해볼 때가 되었다.
1991년 이전 ‘위안부‘ 담론은 당사자가 드러나지 않은채 주로 재현/표상(re-presentation)으로만 존재했다. 익히 알려져 있듯, 재현/표상은 어떤 실재를 다시 (re, 再) 앞에 존재하게(presentation, 現)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표상은 문체, 수사적 표현법, 설명의 기교, 관습, 제도 등 역사적·사회적 여러 조건에 기반을 둔 표상 체계를 통해 생산되고 인식 주체의 위치성과 이데올로기에 연루되기 때문에, 언제나 있는 그대로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변형된 것으로 나타난다. 주의해야 할 점은 이 ‘변형된 것‘으로서의 표상이 실재하는 대상을 배제하고 표상 기술에 의존해 하나의 존재로 인식된다는 점이다.‘ 오랫동안 피해자가 공식적으로 등장하지 않았던 ‘위안부‘ 문제야말로 표상이 존재를 대체한 가장 명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참전 군인의 회고 속에 등장한 ‘위안부‘나 이를 민족 수난사의 상징으로 번역한 ‘위안부‘의 모습은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재현 주체의 욕망과 당대 사회의 성차별적 표상 체계에 연루된 것이며, 그러한 욕망에 따라 계속해서 변형 · 증식되어 왔다. - P388~389
미학자 자크 랑시에르(Jacques Rencière)는 끔찍한 일을 이미지로 만든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비인간성, 즉 인간성이 부정되는 과정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미지는 한 표현을 다른 표현으로 대체함으로써 ‘본래의‘ 말이 할 수 있는 것보다 사건의 감각적 직조를 더욱 강렬하게 체험하게 만드는 형상이다. 따라서 형상화된 것은 사건의 ‘있는 그대로의 현존‘일 수없다. 그러므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의 재현에 대한 질문을 바꿔야 한다. 가장 중요하게 다뤄야 할 점은 ‘가시적인 것을 분배하는 방식 내에 희생자를 어떻게 위치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미지는 절대 홀로 작동하지 않으며, 가시성의 장치(apparatus of visuality)에 속한다. 이미지로 재현된 신체의 지위와 그 신체가 받아야 하는 주의) 유형은 그것을 규제하는 가시성의 장치 속에서 만들어진다. - P108~109
영화감독 장뤼크고다르(Jean-Luc Godard)는 "트래킹 (tracking)은 모럴"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우리가 자리를 잡아서는 안 되고 타자대신에 결코 말해서도 안 되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때 역사 과정 속에서 멈춰야 할 지점을 인정하는 정직함이 필요하다. 두려움과 떨림의 태도 속에서 접근해야만 할 대상이 있으며, 성폭력이라는 주제 또한 분명 그러하다. - P121
<귀향>은 시각화 과정에서 특정한 이미지 기호의 선택과 배제, 표백과 과잉 현존을 통해 ‘민족적 수난‘과 ‘순결한 소녀‘라는 의미망의 연결을 만들어낸다. - P137
일본군 ‘위안부‘ 운동 단체에 후원금을 보내거나 후원 물품을 구매하는 데에는 ‘돕는다‘는 술어가 사용된다. 사회적 약자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에게 금전적·정서적 지원을 한다는 의미다. 이처럼 ‘선한 의도‘는 소녀상을 방문하거나 일본군 ‘위안부‘ 관련 굿즈를 구매하는 시민들에게서도 발견된다. 자신의 작은 일상적 행동이 ‘우리 할머니‘들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시민됨과 주체성을 확인하는 데 따른 효용감을 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군 ‘위안부‘ 단체가 생활 지원 외에 다른 사업을 하고 있다든가 1993년 일본군 ‘위안부‘ 특별법이 제정되어 정부 차원의 생활 지원이 제공되고 있다는 것보다, ‘우리 할머니‘들이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우선한다. - P168
국제정치학자 세라 버트런드에 따르면 안보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침묵에는 첫 번째, 서발턴의 발화 행위를 억제하는 강제된 침묵, 두 번째, 서발턴을 위해 타인이 대신 발화하는 데서 생겨나는 침묵이 있다. 첫 번째 침묵은 다시 세 가지로 유형화할 수 있다.
첫째, 서발턴의 발화 자체가 억제되는, 발화 행위에서의 침묵. 둘째, 서발턴의 발화 후 이를 들을 수 있는 청중이 없는 발화 수반 행위의 좌절. 셋째, 서발턴의 발화를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발화 수반 행위의 불능. 중요한 것은 이 중 두 가지 형태의 침묵이 서로 결합해 효과를 증폭시킨다는 것이다. 즉, 서발턴의 침묵이 강제됨에 따라 그것을 대신하는 발화가 나타나며, 이들을 대신하는 발화가 있기 때문에 서발턴은 스스로 발화 행위를 끝맺기 어려워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 P239~240
배봉기는 전후 오키나와에서 살기 위해 자신을 드러내야만 했던 순간 이전에는 전쟁 전과 전쟁 후의 삶에 대해 발화할 수 없었다. 일본 제국령이었다가 전후 미국의 통치를 받은 오키나와에 ‘제국 신민‘으로 들어왔다가 ‘무국적자‘로 살아야 했던 배봉기의 역정은 결코 드러낼 수 없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을 드러낸 이후 오키나와에서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청중이 있었지만, 남한에서는 그러한 청중이 형성될 수 없었다. 미국이 주도한 동아시아 냉전 체제의 하
위 파트너로서 남한은 조총련과 관계 맺은 이들에 대한 관심을 금기시했다. 또한 배봉기의 죽음은 민단과 조총련 간 경쟁적인 ‘대신 말하기‘의 정치를 활성화했고, 이는 배봉기라는 존재의 복합성과 귀향에 대해 가질 수밖에 없는 복잡다단한 감정을 단순화했다. - P264~265
램지어는 ‘위안부‘ 피해자들이 계약이라는 합리적 경제행위에 참여한다는 주장을 게임이론을 도입함으로써 사실로 전제하고 있다. 그는 게임이론이라는 이론적 틀을 표방하고 있을 뿐, 논문에서 어떤 수학적 계산도 내놓지 않는다. 그가 표방하는 게임이론은 업소와 여성 간 "신뢰할 수 있는 약속(credible commitment)"에 기반한 게임적 상황을 전제하는 도구로 소환된다. 이러한 경제 논리는 게임의 규칙과 질서를 지정하고 공유한 자들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적 가상에 의존하고 있다. 합리적 인간으로서의 경제인이라는 모형을 통해 사회적 현실을 분석할 때 현실과 동떨어진 지식이 생산될뿐 아니라, 지배적 권력관계를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기존의 패권적 경제 질서를 옹호하는 결과가 초래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모델은 인간의 본성을 동질화하고 일반화하려는 본질주의적 보편주의에 근거해 사람들 간의 차이를 배제와 차별의 이유로 자연화하고 정당화하는 원리로 사용된다. - P286~287
리지웨이에 따르면, 성에 대한 공통된 문화적 믿음으로서의 성별 고정관념은 사회에서 성별 관계의 물질적 구조를 만들어내는 암묵적인 문화적 규칙, 다시 말해 공유 지식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러한 공유 지식이 다시금 사회적 관계와 게임적 규칙을 만들어내는 원리로 작동하면서 성별 불평등을 강화하고 있다는것이 그의 주장이다.
마이클 최에 따르면, "공유 지식은 집단적 조정을 도울뿐만 아니라 집단과 집단적 정체성, ‘상상된 공동체(imaginedcommunity)‘를 창출할 수도 있다." 램지어 논문의 주장은 일본 우익뿐 아니라 한국과 미국의 역사 수정주의 집단과 결합하고 강화"되어 자신들의 입장을 집단화하고 있다. - P296
일본군 '위안부'의 역사는 이제 관련 당사자나 '귀속국'을 떠나 국제적인 지평에서 논의되고 있다. 캐럴 글럭은 '이동하는 비유'로서 글로벌 기억 경관에 등장한 일본군 '위안부'에 주목했다. 그는 '위안부'가 홀로코스트 희생자처럼 '상징 권력'을 가진 '글로벌 희생자'로 보편화되는 순간, 그것은 일본이나 아시아인의 손을 떠난 문제가 된다고 했다. 또한 미국에서 '위안부' 연구를 이끈 마거릿 스테츠는 미국 대학에서 초국적 텍스트로셔 '위안부'를 가르쳐야 하는 이유와 필요성을 제기하며 '위안부'학의 가능성을 전망했다. 이것은 '위안부' 역사가 국제사회의 인정 체계 안으로 편입돼 글로벌 기억 장소로 이동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 P315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법적 등록의 대상으로 범주화하고 거기에 안착한 상황은 현재 한계에 다다랐다. 우선 신고와 등록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임을 승인받는 권위적일뿐만 아니라 배타적인 형식이다. 국민기금부터 근래의 정의기억연대 논란에 이르기까지, 법적 등록이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사회적 맥락에 따른 다양한 입장의 표현을 억누르고 단일한 대응을 강제하는 물적 토대로 작용했음을 부인할수 없다." 또한 이는 ‘위안부‘ 운동의 대중화를 자극했던 문학/영화 텍스트의 서사 양식을 지배하는 형식이 되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커밍아웃이 꼭 정부에 등록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지 않았다면 일본군 ‘위안부‘ 운동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를 상상해볼 필요가 있다. 이는 무엇보다 일본군 ‘위안부‘에 국적이라는 경계를 부여해 고통과 의미의 경중을 달리하는 인식의 형성에 부지중에 기여한 것은 아닌지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 P418~419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피해국 위안부들의 상황은 한국의 여성운동의 성과로 드러나고 여러 나라가 활발하게 연대했지만, 일본인 위안부에 대한 증언과 가시화, 연구는 최근의 일이다. 군 위안부 정책 전반에 대해 일본 정부가 ‘정부 관여 부인‘을 ‘정부 관여‘로 바꾸게 만든 요시미 요시아키(吉見明)의 관련 자료 중에는 일본 정부가 자국 여성의 모집을 포함해 위안소를 통제하고 감독했음을 증명하는 문서가 있다. 1938년 3월 4일자 ‘군 위안부 종업부(軍 慰安 從業婦)등에 관한 모집에 관한 건‘이 바로 그것이다. - P447
민족주의와 젠더가 맺는 관계는 상황적이다. 그것은 로컬의 역사적 맥락과 해당 공동체 구성원의 행위성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 P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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