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교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화교사를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할 것인가. 두 사항이 이 책의 핵심 주제라 할 수 있겠다. '화교'는 낯설지 않은 단어였지만 정작 화교의 기원과 역사를 자세하게 들여다본 적은 없었다. 화교인은 한국을 비롯하여 중국, 타이완 등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에 많이 진출해 있다는 정도만 인식하고 있었을 뿐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화교'라는 용어가 무얼 말하는 것이고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을까. 역사를 따져 보면 다음과 같다.
1909년 청 제국이 선포한 국적법에 등장한 용어가 바로 ‘화‘다. ‘화‘는 중화를 의미하고, ‘교‘는 위진남북조 시기부터 쓰인 용어로서 ‘잠시 머무르는 이‘를 의미한다. 즉 ‘화교‘는 중화인으로 다양한 목적에서) 해외에 잠시 머무르는 이를 의미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화교라고 지칭되는 이들은 귀향 혹은 귀국을 담보로, 잠시 머무르기 위해 동남아시아 및 홍콩으로 진출하여 무역과 노동에 종사하는 중국계 이주자를 의미하게 된 것이다. 그 전까지 청 제국 출신의 해외 거주 중국인은 민난인, 광둥인, 차오저우潮인, 하이난인 커지아인으로 그 출신 지역에 따라 각기 달리 불리거나, 혹은 화상, 화공, 쿨리 등으로 그 직업에 따라 불려왔는데, 이들을 모두 화교라는 용어로 공식화한 것이다. 이후 화교 가운데에도 다양한 부류가 있다는 것이 발견되면서, 학계에서는 해외에 영구 정착한 중국계 이주민의 경우 ‘화인으로, 그들의 2세대, 3세대 후손을 ‘화‘라고 지칭하고 있다. - P43~44
'교'라는 의미가 '잠시 머무르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에 놀랐다. 그러니까 언젠가는 고향에 돌아갈 것을 생각한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이미 화교는 그 역사적 시기가 꽤나 지나 3세대는 기본이고 4~5세대 정도까지는 진행되었으리라 본다.
화교는 근대 시기 민난 이민을 시작으로 고향을 떠나 근로 계약 또는 불법 이민을 통해 타국으로 넘어갔다. 힘든 노동으로 식민 정부의 주요 수입원이기도 한 아편을 달고 살았고 어려움을 함께 할 동향 조직의 네트워크를 조직했다.
화교는 지역, 방언에 기반하여 다양하고 복잡한 구조를 가졌다고 한다. 막연히 나는 푸젠성에서 넘어간 사람들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민난과 푸젠 말고도 다양한 지역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림 삽입]
천복궁은 푸젠 지역 사람들이 주로 모여 푸젠 회관을 만들었고, 민난 지역 사람들이 모인 곳은 진지앙 회관이었다. 이 둘이 나중에 합쳐져 중화총상회 또는 중화회관으로 통합되었다.
화교 네트워크는 이민, 무역, 송금이라는 핵심 구조로 돌아갔다. 화교인들은 일부는 고향에 있는 가족들에게 송금하고 일부는 국내 투자를 하는 형식으로 교비를 사용했다. 교비를 위해서 화교인들은 교비국을 만들었는데 은행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자체적으로 송금 처리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교비국의 형태는 초기에 사람 역할을 하는 귀요핀 같은 수객이나 객두에서 시작하여 나중에는 객잔이나 상업기구 내에 맡기는 형태가 되었다.
화교의 송금은 기본적으로 외국의 화폐를 국내로 보내는 것이어서 그 중간에서 태환, 즉 환전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다만 20세기 이전 수객과 교비국의 주요 태환 방식이 화폐-상품-화폐였다면, 20세기들어 그 방식이 ‘환어음‘ 방식으로 변화하게 된다. 이 환어음 방식은 주로 송금 방법 중 표회에 해당하는 것으로 교비 의뢰를 받은 교비국은 환어음을 구입하여 수신자 개인에게, 혹은 분국이나 연호에 보내는데, 그 환어음의 출처가 바로 은행이었다.
화교 송금 네트워크에서 은행의 역할은 외국 화폐인 화교의 송금을 국내 화폐로 태환해 주는 것이었다. - P88~89
인도와 일본에서 활동하던 화교 상인은 화상으로 불렸다.
피식민인으로서 인도 상인은 ‘대영제국‘의 제국민이라는 정치적·사회적 지위를 활용하여 아시아에서 그 상업적 영역을 확장했고, 일본 상인의 경우 본국의 제국적 인프라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아시아 시장에 진출했다. 두 상인 집단 모두 근대 시기 ‘제국‘이라는 초국적, 초지역적 정치체제의 보호 아래 비교적 쉽게 아시아 시장에서 나름의 영역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 동남아시아 시장에서 두 그룹은 때로는 화상과 협력하고, 때로는 경쟁하면서 존재감을 과시했지만, 21세기 현재까지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아시아 전역에 깊게 뿌리내려 ‘아시아의 유대인‘이라 불리며 초국적 네트워크를 유지한 이들은 화상이 유일하다. - P114
이들을 비롯하여 일찍부터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한 화교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제국주의 세력과 결탁 또는 협력했다는 꼬리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이들 중 일부는 같은 친일을 했지만 서로 다른 평가를 받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링분컹은 평가에서 살아남았으나 오분호는 살아남지 못했다.
인종, 문화, 종교, 공동체에의 소속감 등은 흔히 인류문명의 형성에 중요한 요소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화상에게 이러한 가치들은 언제든지 변화할 수 있는,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요소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한 지역에서 수 세대에 걸쳐 공동체를 형성한 화상의 경우에는 본국의 지원 없이, 심지어 돌아갈 수도 없는상황에서 낯선 타국에 뿌리내려야 한다는 절박함의 발로였다. 또 여러 지역에 초국적으로 네트워크를 형성한 근대 화상의 경우 여러 정치체에 동시에 ‘협력‘해야 한다는 생존 조건으로 인해 형성된 화상만의 특징이다. - P120
탄카키는 애국주의자였지만 친공 활동으로 다른 평가를 받았던 인물이다.
탄카키가 1946년에 보낸 전보의 수신인은 각각 대통령 트루먼, 마셜 장군, 주중대사 레이턴이었다. 그는 스스로 화교지원기금조직Overseas Chinese Relief Fund Organization의 회장이라고 칭하면서 동남아시아 전체 화교overseas Chinese in Southeast Asia의 이름으로 메시지를 전한다고 하였다. 그 핵심 내용은 미국이 중국의 국공내전에 개입하는 것은 주권의 침입이니 국민당 정부의 장제스에 대한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그만두라는 것이었다. 동남아시아, 특히 영국령 말라야, 해협식민지,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화교공동체에서 지도자 격의 존경을 받고 있던 탄카키의 전보는 그가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지역의 화교를 순식간에 ‘친공산당파‘와 ‘친국민당파‘로 갈라서게 만듦으로써 항일전쟁을 거치면서 동남아 화교 사회에 잠재되어 있던 갈등의 불씨를 당긴 사건이었다. - P154
화교는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에 진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포르투갈, 스페인까지 나아가면서 인종 간 결합으로 많은 혼혈인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는 비단 화교만의 일은 아니고 제국주의 세력이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다양한 흐름들이 나타났다. 문제는 이런 것들이 문화적 다양성으로 인정되지 않고 차별이나 갈등 구조를 만들어내거나 충돌까지 나아가는 양상에 이른다는 것이다. 지배 세력이 있으면 피지배 세력이 생기고 이것은 반복될 수 없는 문제인가 여러 가지로 고민을 낳게 한다.
스페인령 필리핀 사회의 중국계 메스티조 그룹과 말레이-인도네시아 지역 중국계 페라나칸 그룹의 탄생과 활동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들이 중국 상인의 동남아 진출과 적응, 현지화의 과정에서 탄생했다는 점이다. 또한 동남아시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화교의 상업 네트워크와 동남아 현지 사회를 링크시켜 주는 역할과 서구 식민 세력의 현지 통치를 용이하게 해 주는 역할 모두 ‘훌륭하게‘ 소화했다는 사실이다. 그로 인해 17세기에서 19세기까지 동남아시아 지역사회가 ‘중국인-동남아 현지 사회-서구 제국‘이라는 삼각 구도로 작동하는 과정에서 윤활유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다만 이러한 중국계 혼혈의 적극적 활동은 근본적으로 동남아시아 현지 주민에 대한 서구 세력의 가혹한 착취를 대리함과 동시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이루어졌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 P196
개인적으로 가장 재밌게 읽은 부분은 '숍하우스' 부분이다. 타이완에 놀러갈 때마다 익숙하게 보았던 건물의 양식(1층은 여러 개의 기둥들이 받치고 있고 베란다 복도를 가지며 건물 1층이 안쪽으로 들어가 있어 햇빛을 막아주는 형태...)이었는데 그 의문이 드디어 풀렸다. 숍하우스의 기원이 정확히 언제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어찌 됐든 중국 상인이나 노동자가 동남아시아 등지로 진출한 것이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해당 양식은 기후적으로는 뜨거운 햇빛을 막아주어 서늘함을 유지시켜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디자인적으로 독특하고 아름다운 미관 양식으로 자리매김한 것 같다.
숍하우스의 기원에 관한 다양한 논의에는 나름대로의 근거가 뚜렷하여 그 진위를 밝혀내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다만 근거가 확실한 부분들을 종합하여 재구성해 볼 수는 있다. 송대 이후 명·청 시기까지 중국 동남 연해 지역의 주요 항구도시에는 ‘점옥‘ 형태의 주상복합의 건축양식이 존재하였고, 이러한 건축양식은 푸젠과 광둥 출신 중국 상인 및 노동자가 동남아시아로 진출하면서 외부로 전파되었다. 특히 말레이시아와 자바섬의 주요 항구도시에 형성된 중국인 거주지와 시장에는 비슷한 형태의 건축양식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후 영국 식민제국이 말레이반도에 진출하면서 19세기 초기 싱가포르를 중심으로 도시 개발을 진행한다. 그 과정에서 인도의 벵갈 지방에서 가져온 벙갈로우 건축양식을 도입하였고, 동시에 중국의 주상복합 건축양식을 혼합하여 동남아시아 특유의 식민지 도시건축문화, 즉 숍하우스 건축문화를 형성했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 P212~213
싱가포르는 전 인구의 75%가 화교라고 할 정도로 많은 이들이 진출해 있는 국가다. 그래서 이 책에도 꽤 많은 부분을 할애해 싱가포르의 화교 정착 과정을 설명해주고 있다. 싱가포르는 말레이 연방으로부터 1965년 독립하여 싱가포르 공화국으로 탄생했는데 현재는 다인종 다민족 국가로 작지만 알맹이가 튼실한 나라로 잘 알려져 있다. 독립할 때 말레이 정부의 경계로 우여 곡절이 많았다고 한다. 리콴유의 힘도 경계한 것이겠지만 말레이 정부가 무엇보다 다인종 다민족에 대한 공존을 경계했음을 느낄 수가 있다.
실제 리콴유가 이끄는 인민행동당은 싱가포르에서의 지지를 바탕으로 말레이 연방 중앙정계에까지 영향을 행사할 의도가 있었는데, 이에 대해 말레이 중앙정부가 경계했다는 것이다. 실제 기록에 따르면, 말레이 주요 정당들은 1964년 싱가포르의 인민행동당이 말레이 연방의 보통선거에 뛰어들 것을 결정한 것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무엇보다 싱가포르의 인민행동당이 추구하는 사회의 구조가 다인종들 사이의 공존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말레이 무슬림 위주의 중앙집권적 국가의 수립을 계획하고 있던 말레이시아 중앙정계의 반감을 사게 되었던 것이다. - P288
동남아시아를 전체적으로 다룬 역사책도 몇 권 없으니, 화교만을 주제로 다룬 책은 더욱 드물다 해야겠다. 그렇기에 이 책은 출간 자체에 의의를 가진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을 연구를 목적으로 접하든 나처럼 교양으로 접근하든 어느 정도의 목적은 달성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생각보다 잘 읽혔고 관심을 가질 만한 역사적 요소가 많아 흥미롭게 잘 읽었다.
'리뷰 >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 베트남과 그 이웃 중국 (3) | 2024.09.25 |
---|---|
[책] 위안부, 더 많은 논쟁을 할 책임 (4) | 2024.09.24 |
[책] 신장의 역사 (1) | 2024.09.23 |
[책] 위구르 유목제국사 (2) | 2024.09.23 |
[책] 체공녀 연대기 (0) | 2024.09.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