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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키메라 - 만주국의 초상

category 리뷰/책 2024. 7. 25. 14:38
 
키메라
1932년에 중국 동북지방에서 건국되었다가 1945년에 태평양전쟁에서의 일본의 패망과 함께 홀연히 자취를 감춘 나라 만주국. 이 책은 만주국이 왜 건국되었고 그 목적은 무엇이었는지, 운영과정은 어떠했고, 일본인과 중국인은 이 과정에 어떻게 관여했는지 등 만주국의 전체상을 알 수 있는 입문서다. 일본의 인문학자 야마무로 신이치는 이 만주국의 초상을 그리스의 신화에 나오는 머리는 사자, 몸은 양, 꼬리는 용인 괴물 ‘키메라’에 빗대어 그려 나갔다. 2009년 나온 번역본에서 번역 오류를 바로잡고 애매한 문장을 좀 더 명확하게 고쳐 새로이 출간했다.
저자
야마무로 신이치
출판
책과함께
출판일
2024.02.08

만주국은 불과 13년 정도의 짧은 역사를 가졌으나 당시 식민지 국가였던 조선, 중국 등 주변국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45년 이후 만주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지만 대한민국의 뿌리와 관련이 깊어 들여다볼수록 마음을 무겁게 한다. 현대 일본은 과거의 영광을 꿈꾸며 그 역사를 되짚어보지 않을지. 사실 일본인이 만주국의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 견해가 개인적으로 궁금했다.



이 책은 만주국의 성립부터 소멸까지의 과정을 그리며 전체상을 개략적으로 알 수 있도록 하는 입문서적 성격을 지녔다. 입문서답게 분량도 적당해서 부담도 없고 만주국에 대해 본격적인 탐색에 들어가기 전에 핵심 개념을 정리하고 간다는 생각으로 읽으면 될 것 같다. 1989년 <최후의 ‘만주국’ 붐을 읽는다>라는 글이 발표되었을 때 저자는 고도성장기가 끝나고 일본 경제의 거품이 꺼질 무렵 과거의 역사를 돌아보고 현재와 미래를 어떻게 가져가야 할 것인가 고민을 했다고 한다. 이 책은 그런 저자의 생각에서 출발하여 만들어졌다. 



개인적으로는 만주국을 괴뢰국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저자는 만주국이 괴뢰국가이고, 국가 형태를 취한 식민지지배의 통치 양식 가운데 하나였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서구의 제국주의 지배에서 벗어나 통합 아시아를 꿈꾼 이상국이기도 했다고 이야기한다. 솔직히 이상국가라는 이야기는 선뜻 받아들여지지가 않아서 왜 그렇게 말하는지 뒷 이야기를 지켜보기로 했다.



1920년대 만주와 몽골에 대한 권익 싸움으로 중국과 일본은 격렬하게 대립 중이었다. 1928년 10월 이시하라 간지가 관동군 작전주임참모로 부임했다(그는 향후 이타가키 세이시로와 만주사변을 계획하고 실행한다). 이시하라는 장쭤린 폭살 사건 전 1927년부터 이미 만주와 몽골을 영유해야 한다는 생각(만몽영유론)을 가지고 있었다. 

만몽 영유가 불가결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그것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절실한 현안이 있고, 그것이 또한 일본의 국운을 좌우할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일본의 국운을 결정하는 과제였던가. 첫째로 들 수 있는 것이 총력전 수행을 위한 자급자족권의 확립이라는 과제인데, 이것은 당연히 일본의 국가개조와 맞물려 있었다. 그리고 둘째로 들 수 있는 것은 국방·전략상의 거점 확보라는 과제인데, 이것은 또한 조선 통치와 방공(防)이라는 이데올로기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물론 이 두 가지 과제는 연관되어 있어 일련의 문제로도 볼 수 있기 때문에, 만몽 영유를 달성하면이 과제들이 한꺼번에 해결된다고 생각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또한 "국내의 불안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대외 진출에 의존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도 작동하고 있었다. - P43



관동군은 국제적으로 1929년 세계경제공황의 상황으로 미국과 영국이 정신이 없을 때, 중국이 통일을 위해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대결로 전력을 기울이고 있어 만주사변을 일으킬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국내적으로는 여론이 정부보다는 군부를 지지했던 이유도 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난 이유로는 우선 1929년 가을 이래 세계공황에 의해 "자본주의 일본의 국민경제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 국민이 만몽에서 그에 대한 해결을 구했다는 경제적 배경을 들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장쭤린 폭살 사건으로 만몽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한 반성으로 군부가 "앞으로는 반드시 여론의 후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어떻게 하면 여론을 환기시킬까를 연구하고 조직적으로 목적을 달성하기를 도모하면서 매우 정력적으로 여론 조작을 추진한 것도 한 원인이었음에 틀림없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1월에는 사회민중당도 만주사변 지지를 결의하고, 12월11일 와카쓰키 내각의 총사퇴에 의해 시데하라 외교가 종언을 맞이하는 등 사태는 급전되었고, 만몽 처리에 관해서는 관동군이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 P85~86



만주국 건설에는 만주 현지 지역의 군벌과 친일 단체 협조의 힘이 컸다. 

장쭤린의 책사이자 평톈 지방자치유지위원회 의원이었던 위청한은 장쉐량 군벌 및 난징 정부의 입김에서부터 벗어나 자체적인 이상적 왕도정치를 실현시키고 군대를 폐지한 뒤 군사적 기능을 일본에 위임하겠다 했다. 

또한 만주청년연맹은 ① 둥베이 4성의 철저한 문호개방, ② 현주 각 민족협화의 취지에 의해 자유평등을 지향하고, 현 주민으로 자유국민을 구성한다. ③ 군벌을 배제하고 철저한 문치주의로 다스리며 병란이 잦은 중국 본토로부터 분리하여 둥베이 4성의 경제적 개발을 철저히 한다는 것 등이 강조하면서 위청한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구미에 맞는 것이었다.

중국 본토로부터 단절된 왕도국가를 건설해 아시아 부흥의 초석으로 삼는다는 생각은 가사기를 중심으로 한 ‘다이유호카이’라는 단체도 꿈꾸던 바다. 



만주국 정치를 결정했던 것은, 괴뢰국가·보호국화라는 국제 여론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표면상으로는 현지 중국인의 자주적 발의의 의해 정치적 결정이 이루어지는 형식을 취하면서도 내면적으로는 관동군의 지도하에 일계 관리에 의해 일본의 통치 의사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실현하는가 하는 요청이었다. 그리하여 표면과 내면의 괴리라는 모순을 가지고 있으면서 만주국으로 하여금 "영원히 우리 국책에 순응하게 하는 것, 그것이 일·만 관계의 기조가 되었던 것이다. - P203

1929년 세계 공황 이후 일본 경제 막다른 길에 몰린다. 일본 농촌은 노동 쟁의가 최고조에 이르고 실업자 수도 상당했으며 결식 아동이 속출하고 생활고로 부모자식이 동반 자살, 딸을 파는 부모도 많았다고 한다. 이는 역설적으로 만주국에서 희망을 찾겠다는 만주국 붐을 일으킨다. 하지만 과대하게 선전된 만몽의 자원과 이권에 일본인의 활동은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정적 자원에 수요는 많으니 당연한 귀결이 아니었을까. 게다가 만주국 건국을 둘러싸고 정부 계열 간 균열이 발생하면서 자치지도부 사람들이 중앙정부로부터 배제되는 상황이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1932년 만주국 승인 결의안이 만장일치로 가결되고 <일만의정서>에 의해 만주국 통치의 실권은 일본이 법적으로 장악하게 되었다. 쇼와 천황은 무토 노부요시 관동군 사령관에게 “장쉐량 시대보다도 한층 선정을 베풀도록 노력하라”는 훈시를 했다. 



일본인은 만주국의 제제를 천황제와 유사한 형태로 만드는 것에는 이상할 정도로 열의를 보였다. 천황제의 황실에 대응하여 제실이 만들어졌고, 국문장에 대응하여 제제 실시 후 일본식으로 난화(花)가 문장이 되었다. 이외에 궁성(宮城)에 대응한 제궁(宮), 행행(行)에 대응한 순수 나중에 순행), 어진영(御眞)에 대응한 어용(御容: 나중에 어영御影), 황위에 대응한 제위, 황후에 대응한 제후라는 식으로 만주국제제는 천황제의 모조)로서 만들어져 갔던 것이다. - P255

일본은 이렇게 천황제 시스템을 이용하여 만주국 체제를 이용하여 구성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일본과 만주국은 마치 마주보고 있는 거울상처럼 일본은 만주국의 상 속으로 각각을 투영시켜 무한의 상을 겹쳐간다.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이 자기이고 그 모든 것이 타자인 것처럼 진위를 가리기 힘들게 되어 간다. 



그러나 일본과 만주가 긴밀하게 이렇게 움직이려 했으나 전쟁 상황은 날로 악화일로를 걸어갔고 상황은 점점 어려워져갔다.

일. 만 관계가 진정으로 새로운 이념하에서 독자적인 국제관계를 창출했다고 한다면, 그것을 말하는 데 적합한 개념과 체계로써 구미의 정치학이나 법률학도 납득시킬 수 있을 만큼의 설명 능력을 제고해야 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노력 없이 구미의 정치학과 법률학에서 말하는 ‘괴뢰국가의 개념으로 규정하는 것은 아시아 역사 자체가 용납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 자체가 바로 지적 오만이고 지적 제국주의의 다른 형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또한 만주국을 괴뢰국가로 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아시아 역사 자체"란 도대체 어디의, 어떤 역사란 말인가. 건국 이래 일관되게 만주국을 괴뢰국가로 지탄해 왔던 중화민국과 삼십 몇 만이나 되는 반만항일군 전사들, 그리고 앞에서 든 겐코쿠대학의 중국인 학생은 포함되지 않는 것일까. 아시아를 거론할 때 우리들
일본인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항상 아시아 담론을 기만의 방패로삼아 왔다. 만약 자신의 삶을 경멸할 생각이 없다면 21세기에는 이러한 ‘아시아‘라는 담론으로 자신과 타자를 함께 속이는 일만큼은 절대로 하지 않았으면 하고 절실히 생각한다. - P334

재만 조선인은 만주국 시대에 일본인=‘동양궤이즈(東洋鬼구)‘에 다음가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얼웨이즈(鬼)‘로서 전후에는 참혹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지만, 경제적 이유 등으로 귀국도 할 수없어 112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만주에 잔류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족은 일본인 다음가는 "만주국 중요 구성분자"로서 국방의 책무를 담당했는데, 동시에 ‘황국신민‘으로서 징병 · 징용되어 중국·남방전선에 동원됨으로써 전범이 되거나 시베리아에 억류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패전 후에는 일본국적을 상실했기 때문에 보호나 보상의대상에서도 제외되었다. - P399



윗 구절을 읽으며 이 책을 읽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일본이 만주국을 통해 설사 이상향을 꿈꾸었다고 해도 그 방향은 분명 평화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고 주변을 핍박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한계를 지닐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고 여긴다. 



책의 말미에는 보론을 싣고 있다. 책의 특성상 간단하게 다뤄져 언급하지 못했던 질문을 추려 저자가 답을 하는 형태여서 독자가 궁금해 가려웠던 부분을 긁어주었다. 



1945년 만주국이 무너지고 나서 일본인은 어떤 상황에 처했을까. 급속도로 증가했던 재만 일본인은 중국의 내전으로 일본으로 귀환하려다 상당수가 목숨을 잃거나 시베리아에 억류당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일부는 속죄하는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현지에 남아 전문 지식과 기술을 중국인에게 전했다고 한다. 현지에 자발적으로 남은 이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잘 몰랐던 부분이었는데 이번 기회에 알게 됐다. 



대한민국 정부의 탄생에도 여러 인물이 만주국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국가 탄생 이후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친일 청산과 현재도 뿌리 깊은 이념 때문에 벌어지는 색깔 논쟁은 고질병이 된 것이 아닌가 싶어 씁쓸해진다. 



이미 소멸해버린 만주라는 공간, 만주국이라는 국가를 거론하는 것은 일종의 시대착오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무참한 희생을 조금이나마 보상하고 거기에서 조금이라도 인류의 예지를 이끌어내어 후세에 교훈을 남기기 위해서라도 우리들은 그것을 과거의 사실로 망각할 수는 없는 게 아닐까. 

만주국이 그러한 사상과제를 가지고 있는 이상, 그것은 ‘영원한 현재’로서 계속 존재할 터이다. - P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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