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은 유독 기다림이 긴 경우가 있다. 물론 집에 있는 책 중 상당수가 비치만 된 채 손길을 기다리고 있기에 나의 주절거림이 변명처럼 느껴질 수 있겠다. 어쨌든 이 책도 그런 책 중 하나다. 그래도 이 책은 다른 책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구입은 얼마 되지 않은 쪽에 속한다. 그렇다해도 오래 전부터 읽어봐야지 생각했던 책임에는 분명하다.
우연히도 다른 책을 읽으려다 이 책을 이번에야말로 읽어야겠다 결심하게 되었다. 이처럼 독서의 계기는 얼마든지 만들어질 수 있다.
초판이 2000년, 개정판은 2006년이라 최신 자료가 반영되어 있지 않은 점은 감안해야 한다. 그렇다 해도 이 책은 독특한 위치성을 가진다는 생각을 했다. 저자가 밝히듯 기존에 한국 전쟁을 다룬 책은 그 기원과 배경, 전투 과정과 결과, 영향에 주목했다. 그에 반해 이 책은 한국 전쟁이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에 주목한 점이 다르다.
우리는 한국 전쟁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그런가. 실상은 6월 25일 전쟁이 시작된 이후 9.28 수복, 1.4 후퇴, 흥남 철수 등 몇몇 전투를 외우고 목록화할 뿐이지 전쟁으로 인해 다치고 죽어간 사람들은 잊고 외면하지 않았던가. 전쟁이 한국 정치, 사회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지 우리는 피부로 느끼지만 사회적으로 언급하고 거론하는 것은 여전히 꺼리지 않나 싶다. ‘동족’이라는 단어가 구태의연하고 옛스럽게 느껴지지만 굳이 언급하자면 한반도 내에서 살던 이들이 색깔로 인해 구분되어 희생된 이들이 많았기에 그 뿌리 깊은 애증이란 쉽사리 떨쳐지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제는 6.25보다는 한국 전쟁이라는 명칭이 더 자주 불리는 것 같지만 여전히 남한 사람들에게는 전쟁의 휴전일보다는 개전일이 더 기억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정치권에서 남한이 전쟁을 도발한 북한과 공산주의를 문제시하고 국군 등을 영웅시하며 정치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시민들에게 각인시키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고 여긴다.
전쟁은 정치적 갈등이 폭력으로 극대화되어 발화된 사건이다. 정치는 경제와 사회와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만큼 전쟁의 이면에는 경제와 사회가 있다. 한국 전쟁 이전 남북한은 미소군정 체제 경쟁 속에서 이루어짐으로써 안보 위기와 군사 대결을 내부 사회 통제로 이용했다. 한국 전쟁은 남북한이 협상에 의한 통일이 불가능해졌다고 판단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선택의 결과물이었다. 이처럼 1부는 전쟁이 곧 정치이며, 경제와 사회를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함을 이론적으로 설명해준다.
이 책의 핵심은 2부부터 4부까지의 내용이라 생각한다.
2부는 전쟁이 시작되고 나서 피난을 앞둔 상황을 보여준다. 이승만을 비롯한 최고위층은 국민을 기만하고 수도를 버렸지만 말단 지배층과 군 장성 및 병사들은 본인의 자리를 지키며 국민을 보호하려 애썼다. 인민군이 수도에 가까워진 만큼 국군 통수권자가 잡혀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이해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군의 대응이 잘 이루어지고 있으니 국민은 자리를 지킬 것을 종용하며 정작 본인은 달아나는 행태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개전 초 군대의 대응이 혼란스러웠던 반면 이승만을 비롯한 권력층, 미군은 북한의 동태를 잘 알고 있었다. 다만 미군은 북한이 쳐들어오기 전 자국민을 일본으로 대피시킨 반면 남한 정부는 그런 준비를 일절 하지 않았다. 이승만과 자유당은 5.10 총선거에서 참패한 뒤 재기를 노리고 있었는데, 전쟁은 불리한 형세를 뒤집을 찬스 중 하나였다.
1차 피난이 정치적인 선택에 의한 것으로 정치적, 계급적 동기에 의해 지배층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면 2차 이후 피난은 생존을 위한 피난으로 미군의 무차별 폭격을 피해, 1.4 후퇴 이후 남한 정부에 협력한 것으로 인민군에게 보복 당할 위협 때문에 대규모 민중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3부는 남한과 북한이 본격적으로 전투를 전개하며 점령이 교체되는 동안 벌어진 상황을 다루고 있다. 북한은 남한에서 소작인 등 하위층을 중산층으로 끌어올리고 기존의 지주 계급을 타파시키려는 정책을 펼치려 했다. 그러나 김일성 정부는 인민군은 남한 국가 기구 핵심 구성원인 군인, 검사, 경찰, 우익 단체, 정당 간부 등을 반동 분자로 몰아 처형했다. 남한 정부도 서울 수복 후 서울에 남아 있던 사람들을 사상을 문제 삼아 부역자로 간주해 처형했고, 부역자의 가족과 친지는 1980년대까지 연좌제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같이 반복되는 정복과 해방의 과정에서 국민은 무척 혼란스러웠을 것 같다. 어느 날은 태극기가, 어느 날은 인공기가 걸려 있는 상황에서 대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말이다.
4부는 전쟁 시기 벌어진 학살의 참상을 다룬다. 학살은 군경에 의한 작전에 의한 것, 인민 재판과 군의 재판권 행사에 따른 것, 군경이나 준군사 조직에 의한 비공식 작전에 의한 것, 사적인 보복에 의한 것처럼 그 형태가 다양했다.충북 영동 노근리 학살이나 북한의 신천 학살, 미군의 공중 폭격 등에 의한 피해는 대표적인 공식 작전에서 나온 학살이다.
보복으로서의 학살은 단지 이념 간 대립에 의한 것이 아니라 원수가 된 개인과 가족, 씨족 간에 발생하여 그 참담함을 더한다. 특히 이 경우 공식적으로는 사적 테러를 묵인, 방조하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더 안타까운 것 같다.
학살은 국가 건설 과정 속에서 혁명이라는 미명 아래, 남북 간 내전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게다가 시간이 더할수록 반공주의의 색깔론이 덧칠해지며 반역자를 처단한다는 오명 하에 심해진 측면이 강하다고 여긴다.
저자는 한국 전쟁을 국가주의 틀에서 벗어나 인간의 생존권과 평화적 관점, 탈냉전 정치 공동체적 전망 속에서 새롭게 접근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 전쟁은 분단 이후 현대 한국의 국가와 정치, 사회를 구조화한 출발점이 된 사건이었다. 물론 전쟁 이전 1945년부터 5년 가까운 시간 동안 벌어졌던 여러 사건들이 전쟁의 도화선이 된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그럼에도 지배층에 의한 강요된 관점이 아닌 대중의 목소리와 실체를 통해 전쟁이 재구성되어야 함은 나도 동감하는 바다.
대다수의 국민을 피해자로 만들어 버린 한국 전쟁은 국가, 영토, 주민을 그야말로 초토화시켰다. 요즘 남북한의 위험한 줄타기를 보고 있으면 가슴이 철렁할 때가 한 두번이 아닌지라 이 책을 읽는 마음이 무거우면서도 한편으론 의미가 있는 독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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