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시리즈의 마지막 3권은 ‘세계’를 다룬다. 1권에서는 물질활동, 일상의 ‘소비’에 주목했고, 2권에서는 그 상위인 ‘자본주의’ 경제 구조에 대해 알아보았으니 3권은 시간과 공간을 바탕으로 한 세계를 살펴볼 차례가 되었다.
세계의 시간은 전체사의 상층구조의 작동과 관련을 가진다. 그 상층구조는 아래층에서 작용하는 힘들이 창조하고 부양해준 결과물이지만, 동시에 그 무게가 아래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장소와 시대에 따라서 이러한 아래에서 위로의 움직임과 위에서 아래로의 움직임의 중요성이 변화한다. 그러나 사회적, 경제적으로 가장 발전한 지역에서도 세계의 시간이 모든것을 다 책임지지는 못한다. - P17
세계경제는 지구 전역에 걸쳐 있다. 시스몽디가 이야기했듯이 이것은 "전지구적인 시장 또는 "함께 교역을 하여 오늘날에는 일종의 단일시장을 형성한 인류 전체, 또는 인류의 어느 부분 전체를 가리킨다. 세계-경제(이 말은 사실 어색하고 프랑스어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 표현으로예전에 내가 독일어의 ‘벨트비르트샤프트[Weltwirtschaft]의 번역어를 찾을 때 그다지 논리적이지 않다는 것은 알지만 달리 나은 표현이 없어서 만든 말이다)는 우선 지구의 일부분에만 관련된 말임을 주목해야 한다. 이 말은 경제적으로 독자적이며, 핵심적인 것들을 자급자족할 수 있고, 내부적인 연결과 교역이 유기적인 통일성을 이루는 단위를 가리킨다. - P26
3권의 내용은 우리가 대부분 세계사에서 배우는 경제사의 궤적의 흐름을 보여준다. 시장과 자본의 흐름을 바탕으로 한 ‘경제’의 영역이다. 경제는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고 사회, 문화 등과 엮여서 돌아간다. 그렇기에 15세기에서 18세기까지의 세계 경제의 역사를 살펴보는 일은 그 시기의 경제만이 아닌, 사회와 문화를 확인할 수 있는 방편이 된다.
다만 여기에서 세계의 시간과 공간에 보편성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브로델은 세계 지도의 나라들 중 유럽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부각되어 떠올라 빛을 본 국가가 있다면 그 이면에는 착취 당하는 국가들과 수많은 시민들이 있었음을 인지해야 한다.
세계(또는 세계경제) 차원의 분업은 매번 동등한 파트너 사이에서 조화롭고수정 가능한 협약을 통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결정한 종속관계의 연쇄로서 점진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불평등 교역은 세계의 불평등을 낳고 반대로 세계의 불평등은 끈질기게 교역을 창출한다. 불평등 교역과 세계의 불평등, 이 두 가지는 모두 오래 전부터 존재하던 현실이다. 경제라는 카드놀이에서는 다른 것보다 더 나은 패들이 언제나 존재했으며 때로는 속임수가 개재되기도 했다. 어떤 활동은 다른 활동들보다 더 많은 이윤을 가져다준다. - P62
서유럽은 북쪽과 남쪽으로 지리적으로 구분되었을 뿐 아니라 사회, 문화적으로도 다른 모습으로 대비되었다. 하나는 지중해를 둘러싼 이탈리아와 이슬람과 비잔티움의 남유럽 세계, 다른 하나는 원시적 모습에 가까웠던 북유럽의 세계다.
13세기 두 세계는 샹파뉴 정기시를 통해 물품 교역이 이루어졌다.
14세기 서유럽이 불황을 겪는 와중에도 이탈리아 도시들의 교역은 여전히 활발했다. 이 중 특히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경쟁이 치열했다. 이 중 승리한 것은 베네치아다. 어째서 승리했는가.
베네치아의 경제적 풍토는 따라서 아주 독특했다. 상업활동은 전반적으로 대단히 활력이 넘쳤지만 그것은 무수히 많은 소규모 사업으로 나뉘어 행해졌다. 장기간 지속되는 회사인 콤파니아(compagnia) 몇몇이 등장하기는 했으나, 피렌체식의 거대주의는 결코 이곳에서 적합한 토양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정부이든 도시귀족 엘리트이든 피렌체에서처럼 도전을 받는 일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마디로 베네치아는 안전한 곳이었다. 달리 말하면 일찍이 유복한 삶에 푹 빠진 상업활동은 이미 검증된 전통적인 방법에만 만족했던 것이다. 그러나 거래의 성격 역시 하나의 원인이 된다. 베네치아에서 상업은 무엇보다도 레반트 무역을 의미했다. 이것은 분명히 막대한 자본을 요구하는 상업이므로 베네치아의 거대한 화폐자본이 여기에 투입되어서 시리아로 갤리 선단이 떠나고 나면 도시 내에 현찰이 문자 그대로 바닥나는 정도였다. 이것은 나중에 서인도로 선단이 떠난 후에 세비야에서 일어났던 현상과 비슷했다. 그러나 자본의 순환은 제법 빠른편이어서 6개월 혹은 1년 정도면 회수되었다. 그래서 선박의 왕복이 이 도시의 모든 활동에 리듬을 부여했다. - P183
베네치아는 비교적 안전했고 지리적 상황이 더 유리했다. 베네치아의 석호를 나오면 아드리아 해로 들어가게 되지만 이곳은 여전히 자국 내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에 비해서 제노바는 도시를 빠져나오면 티레니아 해로 들어가는데 이 바다는 너무 넓어서 효과적으로 감시하기가 어려웠고 사실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있었다. 그리고 베네치아는 오리엔트 방향의 교역로에 섬들이 연이어 있는 것이 이점으로 작용했다. 또 베네치아는 독일 및 중유럽 지역과 연결되어 면화, 후추, 향신료, 은 등의 공급을 쉽게 주고받을 수 있었다.
베네치아는 16세기 초부터 쇠퇴하게 되었는데 1500년 이후부터 안트베르펜이 베네치아의 위치를 대신하게 되었고, 포르투갈이 아프리카 대륙과 대서양 연안의 여러 섬들을 정복하면서 세계를 확장시킨 것이다.
포르투갈의 해상항로가 열린 이후 안트베르펜으로 직접 후추가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1508년 포르투갈 국왕이 상관을 세우는데 그곳은 인도 상관의 안트베르펜 지사였다. 후추와 향신료를 찾는 고객이 포르투갈의 해상을 통해 가능해져서 더는 베네치아의 상관을 거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또 1520~1530년대 아메리카산 은과 스페인 상품이 안트베르펜의 경기를 활성화시켰다. 합스부르크 가문과 발루아 가문 간의 전쟁 이후 1559년 카토-캉브레지 조약이 맺어지면서 스페인과 프랑스, 이탈리아, 발트 방면에서 통상이 재개되자 한자 동맹이 다시 기지개를 켰다.
안트베르펜은 하나의 어음이 여러 사람들 손을 거치면서 유통되다가 어음을 처음 발행했던 사람 자신이 다른 채권의 지불용으로 받게 될 때 어음은 사라진다는 ‘소환’이라는 제도를 통해 채권자들이 마지막 채무자에게까지 책임을 물을 수 있게 했다. 이는 기존의 환어음이나 은행 체제 바깥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유연한 체제로 편리성과 효율성을 둘 다 잡았다. 이 제도는 추후에 프랑스, 영국, 포르투갈에서도 통용되었다.
안트베르펜 이후에는 제노바가 잠시 유럽의 경제를 책임 지게 된다.
제노바는 제약적인 지리 조건 때문에 언제나 망을 보며 살아야 했다. 별수 없이 위험을 감수하면서 동시에 각별히 신중해야 했다. (…) 제노바는 언제든지 방향을 바꾸고 또 그때마다 필요한 변화를 수용했다. 외부세계를 독점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 그곳을 조직했다가 그곳이 살아가기에 불편하거나 이용가치가 없어지면 가차 없이 버렸다. - P223
제노바의 부는 스페인령 아메리카의 은에 기대는 것보다 더 큰 정도로 이탈리아 자체의 부에 근거하고 있었다. 피아첸차 정기시라는 강력한 체제를 통해서 이탈리아 도시들의 부는 제노바로 이끌려 갔다. 제노바인인든 타지인이든 소액 대출자가 아주 적은 보상만을 받고 그들이 저축한 돈을 은행업자에게 맡겼다. 이렇게 스페인의 재정과 이탈리아 반도의 경제는 항시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 P231
암스테르담은 중간자적 위치에 있다. 과거의 베네치아, 안트베르펜, 제노바 같은 도시 경제의 중심 시스템에서 세계를 지배하는 근대국가 경제 시스템으로 건너가는 길목에 있는 것이다. 네덜란드는 좁은 국토와 부족한 자연자원으로 곡물 반 이상을 수입해야 했고 인구 절반이 도시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함께 살기 위해 서로 돕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암스테르담은 기본적인 어업을 기반으로 저렴한 조선비용으로 해운업을 성장시켜나갔다.
늦어도 1550년경 이후에는 네덜란드의 화물선들이 북유럽과 스페인 및 폴그투갈 사이의 해상무역 대부분을 장악하게 되었다. 암스테르담에 거래소가 개장되었고 보험국이 설립되었다. 1602년 3월 동인도회사가 설립되었다. 이 회사는 국가 속의 국가로 독립적 성격을 지니는 것이 특징이었다. 동인도 회사는 아시아의 사업에 대해서 독점적 이익을 챙기기 위해 끊임없이 나아갔다. 네덜란드는 1650~1660년대쯤 제국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동인도 회사의 도움으로 아시아 시장에서 포르투갈의 힘을 밀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다. 1696년을 전후한 30-40년 동안에 동인도회사의 사정이 지속적으로 악화되었다.
유럽에서 후추의 우월성이 사라진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것은 1670년부터 잠재적으로 보이던 현상이다. 이외의 보상으로서 고급 향신료들이 중요한지위를 계속 유지하거나 혹은 상대적으로 나아졌으며, 비단류나 면직류 염색을 한 것이든 아니든와 같은 인도의 직물이 갈수록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고 또 차, 커피, 라카, 중국 도자기 등의 새로운 상품들이 등장했다. 또 과거의 유통로와 시장에서 고장이 일어났고, 이 회사가 많이 이용하던 순환로에 틈새가 벌어졌다. 이런 경우에 흔히 있는 일이지만 때로는 옛 체제가 계속 살아남는 것이 새로운 적응을 방해하고는 한다. 가장 중요한 혁신은 차 무역의 확대 그리고 각국 상인들에게 중국이 개방된 일일 것이다. 1698년부터 영국 동인도회사가 재빨리 직교역(즉, 현찰교역)에 뛰어든 반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기존의 방식을고집했다. 즉, 후추와 약간의 계피 그리고 산탈 목재, 산호 등을 사러 바타비아에 오는 정크선들에서 중국 상품을 구매하는 데에 익숙했기 때문에 현찰에 의존하는 일 없이 상품을 통해서 거래하는 간접교역을 계속했다. 마지막으로 면화, 은 그리고 종국적으로는 아편을 주고 차를 구하는 벵골-중국사이의 연결이 영국에 이익을 주었다. 게다가 그동안 이 회사의 성공에 큰도움을 주던 코로만델 해안이 인도 내의 전쟁으로 인해서 황폐해진 것이 큰타격을 가했다. - P306~307
프랑스 리옹과 파리는 전국 시장으로 이름을 날렸던 도시들이다. 사실 세계 경제사에서 프랑스의 힘은 뚜렷하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생각되었는데 18세기 프랑스의 경제성장은 두드러졌다고 한다. 당시 프랑스 국민총생산은 영국보다 두 배 이상 컸다. 강물을 이용한 운하와 내륙 도로의 도로망이 수송에 유리함을 제공했으니 프랑스 전국시장이 발전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든 셈이다.
그러나 영국은 7년전쟁과 베르사유 조약을 거치며 세계 경제를 주름잡는 국가로 부상한다.
영국의 전체 경제공간은 런던이라는 최정점에 복종한다. 정치적인 중앙집권, 영국 국왕의 권력, 상업활동의 집중 같은 요인들이 어우러져서 수도 런던의 위대함을 만들었다. 반대로 이 위대함이 이번에는 자기가 지배하는 공간을 조직하는 힘이 되며 이곳에 행정망과 시장망의 다양한 연결을 창출한다. 그라스는 보급영역의 조직화라는 점에서 런던이 파리보다 한 세기 이상앞서 있다고 주장했다. 런던에 우위를 가져온 요인 중에는 런던의 항구활동이 대단히 활발하다는 점(런던의 항구는 적게 잡아도 영국 전체 교역의 5분의 4 이상을 차지했다)도 작용했고 여기에 덧붙인다면 사치와 낭비곧문화적 창조와도 연결된다의 거대한 기생적 기구로서 파리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는 점도 작용했다. 마지막으로 특히 중요한 것은 런던이 일찍부터 수출입을 거의 독점한 결과 영국 전체의 생산 및 재분배망을 통제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영국의 다양한 지역들에 대해서 런던이라는 수도는 일종의 조차장(場)이었다. 모든 것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가 국내로든지 국외로든지 다시 배분되어 나갔다. - P511
영국이 산업혁명을 성취하게 된 힘은 단지 팽창하는 영국 시장의 상승 또는 조직화에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또 물질적 풍성함에 있었던 것도 아니다(사실 활기 넘치던 18세기에는 영국만이 아니라 유럽 전역이 풍성함을 누렸다). 그것은 영국이 스스로 인식하지도 못한 채 근대적인 해결책들을 취하도록 만든 일련의 기회들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파운드 스털링 화라는 근대적인 화폐, 근대적인 방향으로 형성되고 변형되던 은행제도, 그리고 장기채 또는 영구채라는 안정성 속에 닻을 내린 공채 경험적으로 만들어진 가장 효율적인 걸작품 등이 그런 예들이다. 이 마지막 것은 되돌아보건대 영국의 경제가 건강하다는 최고의 표시였다. 이른바 영국의 재정혁명으로부터 탄생한 이 솜씨 좋은 체제는 영구히 지불되는 공채이자를 규칙적으로 지불했다. 이자지불을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는 것은 파운드 스털링 화의 가치를 계속 유지한 것만큼이나 특출한 묘기에 속한다. - P526
세계 곳곳에서 벌어졌던 지배와 저항의 흐름도 살펴본다. 아메리카, 아프리카, 러시아, 튀르키예, 아시아를 살펴본다. 아메리카, 아시아, 러시아 등은 특히나 한반도와 더 밀접한 거리에 있었기 때문인지 더 집중해서 읽게 되었다. 그런데 20세기 미국이 강자를 차지하지 않았다면 이 챕터는 안 쓰여졌을까라는 삐딱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어쨌든.
영국은 산업 혁명으로 근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산업화는 개발, 발전을 낳았지만 ‘성장’이라는 키워드가 지금은 양면성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면 시간이 제법 흐른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돈과 자본의 가치는 무시할 수가 없다. 자본주의는 무너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 가속화되어 부익부빈익빈의 불평등을 낳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와 시장 경제는 언제까지 가게 될까 의문을 품으며 오늘도 월급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직장인은 노동의 가치가 노동자에게 제대로 반영될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희망한다.
사회 전체가 산업생활 방식을 향해서 움직여간다는 의미의 산업주의(industrialisme)라는 말이 산업혁명이라는말보다 더 넓은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분명하다. 농업 우위의 사회로부터 산업생산 우위의 사회로의 이행을 뜻하는 그 자체가 이미 심대한 움직임이다-산업화는 앞에서 이야기한 것보다 더 넓은 의미를 가진다는 것도 분명하다. 산업혁명은 말하자면 산업화의 가속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근대화라는 말은 산업화보다도 더 넓은 뜻을 가진다. "산업발전만이 근대경제의 전부가 아니다. " 성장은 더더욱 넓은 뜻을 가진다. 이 말은 역사의 총체성을 포함한다. - P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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