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 저자나 분야에 대한 신간 알림이 오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주기적으로 알라딘 새로 나온 책이나 새로 나올 책 코너를 뒤지곤 하는데 간혹 놓치는 책이 있을까 해서다.
이 책은 12월 말쯤 새로 나온 책을 확인하다 발견했다. 보자마자 눈이 '하트'가 되었다. 한국 현대사, 그것도 내가 가장 관심 있어하는 해방 직후의 역사이기 때문이었다.
해방 후 3년이 한국 현대사의 중요 기점이 되었음에는 부인하기 어려운 측면이 많다. 내가 왜 이 시기에 관심을 갖는지 생각해보았는데 많은 자료들이 발굴되었음에도 여전히 빈 공간들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시기의 역사를 볼 때마다 좋은 감정보다는 나쁜 감정이 일 때가 많고 답답함을 억누르기 힘들지만 갈수록 감정을 억제하고 거리를 두고 보려고 노력해야한다는 것을 배워가고 있다. 특히 이 시기 역사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한쪽의 주장에 휩쓸려서 다른 주장이나 입장을 배제하거나 무시하기 쉬워진다. 열린 자세로 보아야 한다는 의미다.
서문을 보면서 공감을 하는 부분이 많았다. 특히 한국 현대사의 제대로 된 통사를 찾기 어렵다는 사실 말이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이 있지만 한국현대사를 왜 미국인이 이렇게 잘 알고 있는가 하는 놀라움, (개인적으로) 한국인 연구자들은 이런 작업들을 해주지 않는가 하는 아쉬움 말이다. 지금은 그래도 발굴된 자료들이 늘어났지만 저자가 한국 현대사를 연구하던 시절은 자료 찾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한국 현대사 통사는 여전히 부족함이 많다.
이 책은 해방 직후 1945년만을 다루고 있다. 그래서 '1945년 해방 직후사'다. 『김규식 평전』의 원고 4부 작업을 진행하다가 방대한 양에 출판사 입장을 고려하여 별도의 단행본으로 출간하게 되었다고 한다. 저자는 기존에 『몽양 여운형 평전』과 『우남 이승만 연구』를 내서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저자는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의 개인 정치고문이었던 윌리엄스 소령과 관련한 기록(미국 장로교역사연구소에 소장된 윌리엄스의 강연)을 발견한다. 이는 이 책을 쓰는데 물꼬를 트는 역할을 했다.
이 책은 주로 기존에 알려졌던 해방 직후의 통념인 역사에서 확인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한다.
먼저 해방 후 건준의 성립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지금까지 해방 직후 건준은 해방 당일 여운형과 조선총독부 정무 총감인 엔도가 만나 타협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왔다. 그러나 총독부, 여운형, 한민당 측이 각기 다른 주장의 설명을 함으로써 도대체 진실이 무엇이냐 궁금함을 낳게 한다. 총독부는 종전 후 치안 유지를 위해 여운형과 거래를 했는데 여운형이 약속을 어기고 건준을 행정권 이양의 도구로 삼았다고 주장한다. 여운형 측은 건국동맹(건준 이전 조직)을 기반으로 한 건국 준비로 총독부의 교섭을 받아들였다고 주장한다. 한민당은 여운형이 총독부와 친일정부 수립을 위해 거래한 결과 건준이 탄생하였고 총독부로부터 자금 지원까지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럼 결론이 무엇인가. 1945년 8월 10일부터 15일 사이에 총독부가 종전 대책 수립을 위해 여운형과만 교섭을 한 게 아니고 여운형과 한민당계가 교섭을 진행했으며 해방 후 여운형과 한민당, 총독부 간에 건준의 방향성을 둘러싼 협의와 교섭이 긴밀하게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여운형은 해방 이전부터 한민당 계열과 교섭을 진행했으나 한민당 측이 거부함으로써 협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건준은 단시간에 많은 변화를 겪었다. 미군정과 한민당의 공격으로 2차 개편, 3차 개편이 짧은 시간 내에 이루어졌다. 나는 건준이 초반에는 통일을 지향하며 좌우합작 조직으로 탄생했으나 이후 좌익이 확대되면서 우익이 탈퇴하여 성격이 변화가 되었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애초에 한민당은 건준에 참여를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한민당은 해방 후 건준과 함께 치안유지회를 조직으로 변화시키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이 때의 조직의 명단(한민당 인사들이 포함 등)은 보여주기 식이라는 이야기다.
민족통일전선을 주장했던 건준은 좌익 중심의 인공을 건설함으로써 수명을 다했다. 북한에서는 소련군이 인민위원회로 정권을 이양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한의 조선공산당은 이에 맞는 조직인 인공을 구성한 것이다. 그러나 인공의 수립으로 건준 내부에서 갈등하던 좌우익의 정권 수립 방략이 흐름을 잃게 되었다. 미군정은 인민공화국의 해체를 요구했고 지방인민위원회는 미군정의 요청을 거부하면서 중앙인민위원회와 지방인민위원회가 흐름을 달리 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윌리엄스는 해방 후 초반 하지와 몇 개월을 함께 일했을 뿐이지만 미군정의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조지 윌리엄스는 공주 영명학교를 설립한 선교사인 프랭크 윌리엄스의 아들로 제물포에서 태어났다. 그는 해군 의무장교로 한국 땅을 처음 밟은 하지를 에스코트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유창한 한국어 실력으로 하지의 개인 정치 고문 역할을 맡게 된다. 그는 기독교, 연희전문학교, 친미, 반공의 입장에 따라 미군정에 인사를 좌지우지했다. 또한 이 무렵 한국에 있던 선교사 자제들이 미군정 초기 정책을 결정하는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했다. 고문회의의 인사는 이렇게 기독교, 한민당 출신자로 채워졌다.
미군정에 또 주목하지 않은 인물들이 여럿 등장한다. 하지의 공식 통역인 이묘묵, 조선총독부의 공식 영어 통역관 오다 야스마, 사상 전담 검사인 나가사키 유조 등은 여운형과 건준, 인공을 친일정권이자 공산주의자라고 매도했으며 한민당은 친미적이고 좋은 교육을 받은 민주주의자 애국자로 둔갑시켰다. 그러면서 미군정 하의 권력을 꿰차고 승승장구했다. 한민당은 미군정의 핵심 정당으로 부상하며 권력을 독점하였다는 사실이 뼈아프다.
미군정은 미 국무부가 특정 정치 세력과 연계하지 말라는 지침(다자간 신탁 통치)을 위반하고 조선총독부의 정책을 답습, 공산주의를 배격했으며 임시정부를 적극 지지하는 정책을 펼쳤다. 미군정은 한민당의 조언에 따라 한국인이 인공을 부정하고 임시정부를 지지한다고 생각하여 임정의 귀국을 서두르면서 정무위원회를 만들었다. 이승만은 10월 한국에 들어와 한민당 계열과 함께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조직하는데 이것이 미군정 하의 정무위원회이다. 그러나 귀국한 임시정부는 물론 좌익 세력도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참가를 거부하면서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 전 미군정 하 과도정부를 세우겠다는 계획은 실패하였다.
모스크바 3상 회의 후 정국은 반탁 운동 vs 찬탁 운동으로 휘몰아치게 되는데 1945년 12월까지 반탁 운동을 주도한 것은 미군정과 이승만, 한민당 계열이었던 것이다. 이 무렵에는 임정이 반탁을 주도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놀라웠던 점은 여운형이 건준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건국동맹의 준비를 오랫동안 해왔고 건준을 위해 한민당계와도 협상을 시도한 일이다. 또 단 몇 개월간 일했을 뿐인 윌리엄스, 주한 선교사들이 한국에 끼친 영향이다. 한민당의 숨은 세력인 이묘묵, 오다 야스마, 나가사키 유조의 주장은 당황스러웠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나는 한민당과 이승만과의 조합으로 우익 정당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것이 미군정과 연결되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모스크바 3상 회의 전 물밑 작업이 그리 이루어졌을 줄도 몰랐다.
까도 까도 놀라울 정도로 양파 같은 것이 이 시기의 역사가 아닐까.
저자가 해방 후 역사를 연구해주어 독자로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앞으로도 숨어 있는 자료가 여전히 있지 않을까 궁금해하며 후속 작업이 이어지기를 고대한다. 특히 김규식 평전 작업이 얼른 끝마쳐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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