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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칭기스 칸, 신 앞에 평등한 제국을 꿈꾸다

category 리뷰/책 2023. 11. 24. 09:19

몽골이 벌인 정복전쟁의 참상은 여러 책과 영화에서 잘 다루어졌으나, 법률 제정가인 칭기스칸의 역할은 대체로 보아 별로 탐구되지 않은 상태다. 생애 만년에 그는 온 세상의 종교 지도자들을 자신의 야영지로 불러들였다. 이는 서로 반목하는 종교들 사이에 지속적인 평화를 수립하기 위한 계획의 일환이었는데, 사실 여러 종교 사이의 호전적인 적대감이 인류를 크게 괴롭히고 있었다. 그는 원래 자신의 영적 정수를 찾기 위해 종교에 귀를 기울였으나 이것이 결국에는 사회 내에서 종교가 수행하는 역할을 이해하는 탐구과정으로 확대되었다. - P23

 

잭 웨더포드의 책을 처음 읽었다. 일 때문에 지난주에 이어 이번 주까지 내내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터였고 책이 나를 구해주기를 바랐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주말에 다 읽지 못한 것을 후회할 만큼 재미나게 읽었다. 저자의 글 솜씨인지(아니면 번역자의 공?) 이 책의 글이 재미난 것인지는 판단을 보류해야겠으나(다른 책을 이제 곧 집어들 것이다) 어려운 내용을 풀어서 참 재미나게 썼다고 여긴다. 마치 소설 같은 아름다운 묘사로 장면을 상상하며 읽을 수 있었다고 해야 할까. 도서관에 갔다가 읽을 책이 안 보여서 시큰둥하다가 발견한 책 치곤 마치 바다에서 대왕 오징어을 건진 기분이었다. 물론 도서관에서 발견하고 이거 심상치 않다 싶어 알라딘에서 검색을 해 보긴 했지 아니나 다를까 괜찮을 것 같다 여기고 바로 대출을 했다. 

 

기존에 칭기스 칸을 다룬 책이나 매체들은 몽골의 전쟁사나 개인의 영웅담 같은 이야기에만 주목하여 비슷한 내용들이 많았다. '왜 그런 주제에만 천착하지?' 하는 생각을 했고 다른 내용은 없나 궁금해하던 찰나였다. 그리고 이 책은 몽골이 왜 제국을 그리 유지할 수 있었는지 그 방점을 종교에서 가져온다. 생각해보면 당연하지 않은가. 몽골의 통치자들은 그 넓은 영토를 유지하는데 다양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어떤 방식으로 다스려야하는지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무자비한 탄압만으로 그 넓은 영토와 사람들을 다스리기에는 불가능하다. 사람들을 이해시키고 납득시킬 만한 것으로 어쩌면 믿음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이 책은 칭기스 칸이 여러 종교 지도자들을 만나며 제국을 다스리는 방법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때문에 전쟁사는 핵심만 담고 종교를 통한 사회 통합 과정에 많은 비중을 두었다. 

 

칭기스 칸이 처음부터 종교를 적극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몽골인들은 샤먼에 기반한 전통 믿음 체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종교를 즉각 수용하기에는 부담이 있었을 것이다. 몽골의 환경은 이런 믿음 체계를 가질 수 있게 한 배경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산간의 숲 지대인 캉가이는 풍성한 생명의 어머니였지만, 수목의 생장 한계선 위의 높은 산간 지대는 커다란 암석과 험준한 절벽이 영원한 눈과 얼음을 헤치고 비죽 튀어나와 있는, 어떤 생명도 살지 못하는 땅이었다. 이런 남성적 요소가 대지에 딱딱한 뼈를 제공했다. 여성적 숲과 남성적 암벽은 함께 모든 존재의 기원을 형성했다. 그것들은 남성, 여성, 불멸이라는 3대 영혼으로 구성된 우주를 형성했다. 그리하여 모든 피조물은 두 개의 필멸하는 영혼과 하나의 불멸하는 영혼을 갖게 되었다. 몽골의신앙에 따르면,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뼈에 남성적영혼을 살과 피에 여성적 영혼을, 그리고 마음과 심장에 불멸의 영혼을 지니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 - P61

 

칭기스 칸은 처음에는 정주 문명의 종교 기관들을 매우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거대한 사원, 엄청난 부, 화려한 의식 행렬 등을 자랑하는 대규모 종교들은 가짜에 불과하다고 의심했다. 그렇지만 이 이상한 기관들의 지도자들이 하는 말은 듣고 싶어 했다. 많은 저술을 남긴 13세기의 학자 겸 연대기 작가 바르 헤브라이우스Bar Hebraeus는 이렇게 썼다. 칭기스칸은 ‘고매한 현자들‘을 소환하여 여러 언어로 된 그들의 성스러운 경전을 읽어달라고 했고, 그런 다음에는 자신이 보는 앞에서 그들의 종교를 저마다 설명하고 토론하게 했다. 수도자, 신부, 점성술사, 마법사, 예언자, 연금술사, 점쟁이, 현자, 점술가, 허풍선이 들은 몇 달에 걸쳐넓은 강을 건너고 높은 산을 지나 먼 곳의 국경을 통과하여 마침내 그의 유목 캠프에 도착했다. - P40

 

테무진과 두 아들인 톨루이와 오고데이는 기독교도 아내를 받아들였고 모든 몽골 칸은 기독교 어머니 소생이거나 기독교인 아내를 두었다. 칭기스 칸이 거쳐간 세계는 많은 부족들 중 위구르족은 공식 종교로 마니교를 썼다. 위구르 제국이 붕괴된 후에는 몽골 스텝 부족들 상당수가 기독교로 개종하기도 했는데 테무진은 평생 기독교와 중요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카라키타이를 정복함으로써 테무진은 무슬림, 불교, 도교 등 다양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만난다. 칭기스칸은 새로 해방된 땅의 각 도시와 마을에 전령들을 보내, 자신의 법률을 널리 전파하여 모든 사람이 그 내용을 들어서 알도록 했다. 그는 "각자 자신의 신앙을 지키며 그 신조를 따라야 한다"라고 선포했다. 이것은 그때 이후 그가 추진한 정복에서 기본적인 원칙이 되었다. 그는 평생 동안 신하들을 위해 이 원칙을 지켰다. 기존의 믿음 체계를 파괴하지 않고 각자의 종교를 지키게 했던 원칙을 세운 일은 칭기스 칸의 새로운 면모를 보게 하였다.

 

어느덧 칭기스 칸의 제국 궁정은 다양한 종교인들이 모인 회합의 자리가 된다. 종교인은 새로운 사회를 조직하는 데에 아주 적절한 선택이었다. 

칭기스 칸의 궁정은 마법의 돌을 가진 몽골 샤먼, 도교 연금술사, 독경하는 불교 승려와 점성술가, 기도하는 물라, 노래하는 기독교인, 유교의 궁정 의례 담당관, 티베트의 점술가, 다양한 종류의 독립적인 심령술사와 강신술사, 영혼을 불러온다고 소문이 났거나 마법의 술수를 부려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독심술사 등 다양한 영적 위력을 지닌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칭기스칸의 캠프는 유목민의 대학과 같은 특성을 지녔으며, 다양한 언어, 문화, 종교를 지닌 학자들로 이루어진 정신적 동물원의 종합판과 같았다. 그 캠프는 밝은 노란색, 하얀색, 반짝이는 오렌지색, 핏빛 적색, 아주 진한 검은색으로 된 제의祭衣가 넘쳐났다. 하루가 염주, 북, 공, 호루라기, 나무 종 같은 종교적인 소리로 시작하여, 신들린 채 모닥불 옆에서 깃털 장식을 달고 춤을 추는 샤먼, 불태운 양의 어깨뼈에 생긴 금을 읽는 주술사,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점성술사, 지골을 던져서 운수를 알아보는 병사들의 소란스러움으로 끝났다. - P243~244

 

무엇보다 이 책에서 흥미로웠던 이야기는 구처기와 야율초재에 대한 것이었다. 구처기는 중국 도교 중 하나인 전진교의 추앙 받는 지도자였고 야율초재는 요 왕실의 후예로 스텝 부족인 거란 부족의 일원이었다. 야율초재는 요 왕조가 여진족에 의해 무너졌을 때 칭기스 칸을 모시기로 결정하고 이후 끝까지 그의 곁에 남았던 사람이었다. 그의 뿌리는 유목 민족이었으나 중국에서 오래 생활을 한 덕분에 중국의 사상(특히 유교)과 문화를 받아들이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구처기는 칭기스 칸의 요청에 따라 몽골 궁중으로 와서 그를 만난다. 그러나 야율초재는 구처기에게 불호에 가까운 감정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대화를 시작하며 시를 주고받을 때, 나는 솔직히 어느 정도 그를 인정했다. 하지만 우리가 구면이 되면서 나는 그의 정체를 완전히 파악했다. 그 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를 인정하지 않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그를 비웃었다." 야율초재는 구처기를 가짜라고 생각했다. 반면 구처기를 따라 나섰던 이지상은 스승을 두둔하는 입장의 글을 남겼다.  

 

칭기스 칸은 마지막으로 탕구트 원정에 나섰다가 사고로 급격하게 건강이 안 좋아졌고 이후 회복하지 못한 채 사망한다. 많은 종교인들과 만나고 그들의 종교를 받아들이려 노력했으나 마지막에는 몽골인으로 죽었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몽골인들은 죽음이라는 단어를 기피하여 그 대신에 완곡하게 ‘신이 되었다‘라는 표현을 쓴다. 그리하여 1227년 여름에 칭기스칸은 신이 되었다. 예수이 카툰은 칭기스칸의 시신을 펠트로 감싸는 작업을 감독했으며 친위대는 황제를 고향으로 데려가 매장할 준비를 했다. 칭기스칸은 불교, 이슬람교, 기독교, 도교, 그 외의 어떤 종교에도 소속되지 않은 채 몽골인으로 죽었다. - P378

 

칭기스 칸 사후 제국 확장을 위한 정복 전쟁이 이어지는 동시에 형제들 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마침내 어지러운 궁정 상황을 마무리하고 몽케 칸이 즉위하는데 그는 앞선 칭기스 칸과는 달리 몽골 전통 종교에 집착하는 쪽이었다. 특히나 이 때 도교는 몽골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종교 기관이 되었다. 이지상의 지도에 따라 도교는 오고데이의 가문과 밀접하게 지내며 그들 편을 들었고 그의 권력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몽케는 도교의 위상을 떨어뜨릴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불교에 더 힘을 실어주었다. 소림사는 육식을 정당화했기 때문에 몽골인들에게 거부감이 없었는데 이곳에서 승려들의 전투 실력을 향상시키는 훈련을 하면서 지금의 소림사가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잭 웨더포드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책 <칭기스 칸과 근대 세계의 형성>을 집필하면서 기번의 논평을 접했기 때문이었다. "징기스칸의 종교 관련 법률과 로크 씨 사이에서 독특한 유사성이 발견된다." 호기심을 따라간 저자가 얻은 결론은 독자도 놀라게 할 만한 것이다. 토머스 제퍼슨이 칭기스 칸을 알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데 과연 그의 법률에 담은 내용도 칭기스 칸의 종교적 사회 통합을 염두에 둔 것일까. 이 책을 읽어보니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반영했다고 여겨진다. 

 

토머스 제퍼슨은 당시 널리 퍼진 중국 관련 주제에 관심을 공유한 많은 지식인들 중 한 사람이었다. 1771년 8월 3일에 처남 로버트 스킵위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칭기스칸을 다룬 머피와 볼테르의 연극에는신경 쓰지 말고 당시 프랑스어로 번역되었던 원극의 대본을 읽어보라고 권했다. 제퍼슨은 칭기스칸을 다룬 페티스 드 라 크루아의 전기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 제퍼슨 역시 모든 종교에는 일부 좋은 면이있지만 그것들 중 어느 하나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과거에 그는 프랑스어로 된 칭기스 칸 전기를 여러 부 구입했다. 그중 일부는 자신이 가졌고 나머지는 자기 딸을 포함해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 P469

 

제퍼슨은 1777년에 종교적 자유에 관한 법안을 작성하기 시작했지만, 버지니아 식민지 의회가 1786년 1월 16일 법을 제정하기 전까지 알맞은단어를 찾는 데 고심했고 이 작업은 거의 10년이 걸렸다. 그의 제안은 치열한 논쟁·편집·수정의 대상이 되었지만, 최종 확정된 핵심적인 단어들은 칭기스 칸의 칙령에서 사용된 단어들과 유사했다. 제퍼슨의 새로운법은 이렇게 규정했다. "그 누구도 종교적 의견이나 신앙으로 고통을 겪어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은 종교에 관하여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문장들은 중앙아시아에서 미국으로 전해졌고, 몽골어에서 페르시아어로, 다시 터키어, 프랑스어를 거쳐 마침내 영어로 번역되었다. 번역된 문헌들에는 칭기스칸의 칙령에서 사용된 단어들이 사용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거기에는 신을 탐구하고자 하는 포괄적이고 광범위한 칭기스칸의 정신이 완벽하게 구현되어 있다. - P470~471

 

이 책은 재밌게 읽기도 했고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아 오별을 줄 수밖에 없었다. 다만 절판이라니... 진심으로 재판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