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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칭기스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category 리뷰/책 2023. 11. 28. 17:13

같은 저자의 책이라도 독자에게 어떻게 전달되느냐에 따라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칭기스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는 20쇄를 넘게 찍을 정도로 현재도 판매되고 있는 책이다. 내가 도서관에서 빌린 책은 24쇄로 2020 년 판이었다. 앞서 읽은 <칭기스 칸, 신 앞에 평등한 제국을 꿈꾸다>는 저자가 뒤에 출판한 책이지만 절판이라 구입 불가다.

사실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린 첫 날 바로 앞부분을 읽었는데 일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못 읽다가 주말에 마저 읽었다. 앞부분을 읽었을 때 좀 지루하고 감흥이 없다 생각했었는데 마지막까지 읽어보았지만 그 느낌을 아주 없애지는 못했던 것 같다.

 

두 권 중 나는 앞서 읽었던 <칭기스 칸, 신 앞에 평등한 제국을 꿈꾸다> 책이 더 좋았다. 이유는 몽골 제국사의 대부분이 칭기스 칸의 영웅적 면모와 몽골군의 전투력, 승리사에 주목해서 기술하는데 이 책은 몽골 제국의 리더가 몽골이 아닌 다른 곳에 있는 백성들의 마음을 어떻게 얻으려 했는가에 주목하기 때문이다(종교라는 테마에 맞추어). 결국 '합치'라는 키워드로 설명할 수 있을텐데 결과가 어떻든 리더의 노력과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가(어쩌면 그것이 기본일 것이다)을 깨닫는 기회가 되었다. 

 

다만 기존에 내가 읽었던 몽골 제국사로 예상되는 이야기들의 나열이라 신선함은 떨어졌다. 아쉬움이 있었지만 어쨌든 장점이 많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한 권으로 20세기까지의 몽골 제국사를 만날 수 있고 저자의 글이 유려하여 잘 읽힌다. 내용은 <몽골 비사>와 집사를 기본으로 하여 인물과 사건에 대한 외부인의 기록을 함께 실어 단편적으로 느껴지지 않게 했다. 

그래도 몽골군들이 전투 시 철저할 정도로 잔혹하거나 무도했다는 기술들은 외부인들의 기록들이 덧붙여져 과장되거나 왜곡되어 전달된 측면이 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지금도 그렇지만 편견을 깨부순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또한 몽골이 민을 다스리기 위해 펼쳤던 다양한 정책들로 인해 아시아를 비롯한 유럽이 입은 혜택이 많다는 점도 인지하게 되었다.

 

몽골 제국은 정확한 명칭으로 ‘예케 몽골 울루스”라고 부른다고 한다. 제국의 시작점인 칭기스 칸의 탄생과 성장부터 시작하여 20세기까지의 역사를 연대별로 기술하여 한 눈에 보기 좋다. 

 

1부는 칭기스 칸의 성장 과정부터 몽골 제국의 성립(1206년)까지를 다룬다. 

당시 몽골 초원은 중앙에 케레이트족, 서쪽에 나이만족, 동쪽에는 타타르족, 이렇게 핵심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테무진은 어린 시절에 수많은 고초를 겪으며 성장했다. 아버지인 예수게이가 타타르족에 의해 죽임을 당하면서 가족들은 부족을 떠나 살아남아야 했고 16세에 아내인 보르테를 만났으나 메르키트족이 약탈해가는 바람에 케레이트족의 수장인 옹칸의 도움을 받아 되찾아와야했다. 의형제를 맺은 자무카와는 관계가 틀어져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 

 

『몽골 비사』에 따르면 테무진은 자신의 작은 씨족의 지도자로 평생을 보내고 싶어했던 것 같지만, 부족들의 공격과 반격이 이어지는 주변의 어지러운 세계는 그런 목가적인 삶을 허락하지 않았다.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초원의 부족들은 서로 무자비하게 물어뜯고 있었다. 과거의 행동에 대한 기억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부족 내의 어느 한 가족이 피해를 입으면 그것이 복수의 근거가 되었고, 이후 오랜 기간 동안 상대를 습격할 수 있는 구실이 되었다. 테무진의 집단이 아무리 조용히 있고 싶어도, 이 소란스러운 세계에서 아무런 접촉 없이 눈에 띄지 않고 살아갈수가 없었다. - P76

 

주르킨 원정(1197), 타타르 원정(1202~1203)을 거치면서 그는 규칙을 정립해 나간다. 

 

몽골 부족 전체는 군대라는 수단에 의해 통일되었다. 아르반(십호)이라고 부르는 10명으로 이루어진 분대로 편성하여 분대원들끼리 서로 형제 역할을 하도록 했다. 분대 열이 모여 자군(백호)이라고 부르는 중대를 이루었다. 몽골의 중대 열이 모이면 1000명이 밍간(천호)이라고 부르는 연대를 이루었다. 밍간이 열 모이면 1만 명이 투멘(만호)이라고 부르는 사단을 이루었다. 

새로운 체제에서는 부족의 모든 구성원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어느 정도 공적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군인으로 복무할 수 없으면 일주일 중 하루 정도에 해당하는 시간을 공적인 일이나 칸을 섬기는 일에 바쳐야 했다. 여기에는 전사의 가축을 돌보고, 연료로 쓸 똥을 모으고, 조리를 하고, 모전을 만들고, 무기를 수리하는 일, 심지어 군대를 위해 노래를 하거나 연예활동을 하는 일도 포함되었다. 새로운 조직에서는 모든 사람이 같은 뼈에 속했다. 이제 그의 무리는 모두 하나의 통일된 민족 구성원이 되었다.
테무진이 십진법에 따른 조직을 채택한 경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역사적 추측이 있다. 이전의 투르크 부족들 가운데도 십진법에 기초한 비슷한 군사조직을 갖춘 예가 있었다. 어쩌면 테무진은 그들에게서 이 체제를 빌려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테무진은 이 체제를 전쟁을 위한 군사전술로 이용했을 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영구적인 구조로 채택했다. - P106

테무진은 군대를 재조직한 뒤 언뜻 작아 보이는 개혁을 한 가지 더 시행했다. 본영은 케룰렌 강변의 아바르가에 둔 채 성산 부르칸 칼둔 주위의 오논, 케룰렌, 툴라 강들의 원류에 자리잡은 몽골 부족의 고향-테무진이 메르키트로부터 피신해 있던 곳이기도 하다 ㅡ을 폐쇄 구역으로 설정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아무도 세 강의 원류에는 설영을 하지 못하게 하라." 테무진은 그렇게 명령했다. 그 명령으로 몽골족의 고향은 왕실 바깥의 외부인들은 접근할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왕실 구성원들은 200년 동안 이곳에 죽은 자들을 묻고, 가족 행사를 열고, 외부인들을 배제한 채 가족회의를 했다. 몽골족은 그 전에도 세 강의 발원지에있는 이 산을 그들의 고향으로 여겼지만, 새로운 법이 나오면서 이곳은훗날 몽골 제국의 은밀한 의식이 열리는 중심이 되었다. 부르칸 칼둔 주위의 땅은 이제 몽골족의 우주에서 공식적으로 신성한 장소의 자리를차지하여, 땅의 중심을 넘어서서 우주의 중심이 되었다. - P107

 

20년 정도 투쟁하면서 테무진은 몽골족 대부분을 다스리게 되었지만 자무카(구르칸)과의 승부는 결정짓지 못한 상태였다. 다행히 테무진과 자무카의 대결에서 테무진은 옹칸의 군대를 흡수하고 자무카가 도망간 틈을 타서 몽골을 통일하고 칭기스 칸으로 즉위한다. 

 

2부는 몽골 제국의 확장 중 1261년 뭉케 칸까지의 역사를 보여주는데 이 때가 몽골 제국이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을 때다.

 

1210년 황금 칸이 죽고 아들이 새 칸으로 즉위하면서 칭기스칸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주르첸 원정이 시작된다. 키타이 부족을 포섭하여 주르첸 내부를 분열시키면서 자연스레 전쟁의 승기를 잡을 수 있었고 칭기스 칸이 죽기 전까지 함께 했던 재상 야율초재를 만나게 된다. 

 

초원지대를 다스리는 주르첸의 권력은 군사적인 힘에서 나온다기보다는 중국 전역의 작업장과 도시로부터 목자들에게 흘러드는 물자의 확고한 통제에서 나왔다. 초원지대의 칸의 지위는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교역 물자를 꾸준하게 공급하는 능력에 달려 있었다. 전장의 승리는 곧 패자의 재물을 약탈할 기회였기 때문에 이 두 가지 능력은 보통 일치했다. 그러나 칭기스 칸이 모든 부족을 이기고 통일을 해내는 전례없는 업적을 이룩해내자 그의 의도와 관계없이 약탈은 끝이 났고 더불어 물자의 흐름도 막히게 되었다. 모든 제조품은 남부에서 나왔기 때문에 칭기스칸은 남부의 통치자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신종의 의무를 약속하고 봉신으로서 물자를 받거나 아니면 그들을 공격하여 물자를 빼앗아야 했다. - P141~142

 

칭기스 칸이 주르첸을 얻으려고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중국의 다양한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문화적인 이유도 있지만 결국 경제적인 이유가 컸다. 비단길을 확보하는 것은 실크로드의 물자가 오가는 길을 확보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이어 중앙아시아와 이슬람 세계의 원정이 시작되었다.

 

현대의 아프가니스탄의 산맥으로부터 흑해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은 투르크족 술탄 무함마드 2세가 통치하고 있었으며, 그의 제국은 호라즘이라고 불렀다. 칭기스칸은 이곳에서 나는 이국적인 상품들을 원했으며, 그 목적을 이루기위해 이 머나먼 땅의 술탄과 교역 상대로서 동반자 관계를 맺을 수 있기를 바랐다. - P171

 

이번에도 정치적인 욕심도 있겠지만 경제적인 이유가 컸다. 또 호라즘은 무슬림 이웃들과 좋지 않은 관계였기 때문에 몽골인들은 페르시아인이나 타지크인들을 적극 이용했다고 한다. 또 주르첸 도시들을 공격하면서 배웠던 기술과 경험들이 있었다. 특히 중앙아시아 귀족들은 철저히 죽여 후환이 없도록 했다. 

 

이 시대의 연대기 기록자들은 칭기스 칸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전하는데, 사실 믿기는 힘들다. “사람이 알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은 적을 정복하여 눈앞에서 몰아내는 것이다. 그들의 말을 타고 그들의 소유를 빼앗는 것이다. 그들에게 귀중한 사람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보는 것이고, 그들의 부인과 딸을 품에 안는 것이다.” 그는 공포가 자신의 전사들의 행동이 아니라 서기나 학자의 펜을 통해 가장 빠르게 퍼져나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문이 나오기 이전 시대에는 지식인의 편지가 여론 형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몽골군은 한 도시를 정복하면 다른 도시들로 대표단을 보냈다. 그러면 이들은 칭기스 칸 전사들이 거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저지른 전례 없는 잔혹행위에 대해 이야기했다. … 칭기스 칸이 승리를 거둘 때마다 새로운 선전물이 홍수처럼 퍼져나갔다. 더불어 칭기스 칸의 불패 신화도 퍼져나갔다. - P181

 

이 때는 이미 종이가 사용되고 있는 시기였던만큼 선전물이 유포되기 너무나 좋았다는 것이 몽골인들에게는 오히려 독이 되었던 것 같다. 

 

탕구트 원정에서 칭기스 칸이 사망하고 우구데이가 취임하면서 유럽 원정이 시작되었다. 우구데이는 카라코룸에 궁궐을 지으면서 부족의 이동성이 정주성으로 바뀌고 술까지 좋아하여 부를 다 탕진하고 말았다. 정작 원정은 수베데이와 제베 주도 하에 이루어졌고 무거운 갑옷을 입은 유럽 기사들을 상대로 몽골군은 승리한다. 

 

그들은 중앙아시아, 러시아, 우크라이나, 폴란드, 헝가리의 초원지대를 따라 이동했다. 초원이 끝나자 몽골군도 발을 멈추었다. 전사 한 명당 말이 다섯 마리였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쓸 만한 목초지가 필요했다. 숲, 강, 작물과 도랑, 산 울타리와 나무 방책이 있는경작지에서 장애물을 헤치며 느릿느릿 나아가야 하는 경우에는 속도, 기동성, 기습 능력이라는 그들의 장점이 모두 사라졌다. 부드러운 고랑은 말에게는 불안정한 바닥이었다. 밭이 시작되는 곳에서 초원지대의 건조한 기후는 해안지대의 습한 기후로 바뀌었다. 이곳에서는 습기 때문에 몽골 활의 힘과 정확성이 사라졌다. - P238

 

기동성 확보가 안 되고 기후 문제도 겹치면서 더 이상 몽골군은 나아가지 않았다. 또 이 때 우구데이가 사망한 탓도 있었다. 그의 사망 후 10년 동안 대칸 즉위를 둘러싼 투쟁이 이어진다. 

 

마침내 몽케 칸이 즉위하였고 그는 송나라와 아랍국들을 위한 정복 기반을 다진다. 몽골 제국은 

뭉케 칸 치세에 가장 넓은 땅을 차지했다. 뭉케는 칭기스 칸의 후손 가운데 몽골 제국 전체로부터 대칸으로 인정받은 마지막 칸이었다. 뭉케 이후에도 많은 칸들이 제국의 여러 지역을 다스렸고 그들 가운데 다수가 칭기스칸의 상속자로서 대한 칭호를 차지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다른 분파나 가문 전체가 인정한 대칸은 한 사람도 없었다. 뭉케 칸은 제2차 몽골 세계대전을 시작했지만 마무리하지는 못했다. 이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남기지 않고 그냥 제풀에 사그라졌다. - P276~277

몽골 제국은 이제 별도의 정부를 갖춘 네 개의 주요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쿠빌라이는 중국, 티베트, 만주, 고려, 몽골 동부를 다스렸지만, 몽골과 만주에서는 늘 문제가발생했다. 킵착칸국(황금 오르도에 세운 나라)은 동유럽의 슬라브 국가들을 다스렸으며, 이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쿠빌라이를 대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터키에 이르기까지 훌레구와 그의 후손이 다스리는 땅은 ‘봉신의 제국‘을 뜻하는 일 칸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수백 년간 아랍의 지배를 통해 페르시아 문화가 다시 나타나면서 근대 이란의 기초가 놓이게 되었다. 가장 전통적인 몽골인은 중앙의 초원지대를 차지했다. 이곳은 모굴리스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으며, 지금으로 치자면 북쪽의 카자흐스탄과 시베리아로부터 중앙아시아의 투르키스탄을 가로질러 남쪽의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지역을 포말했다. 이 지역은 한동안 우구데이와 투레게네의 손자 카이두 밑에서 통일을 이루고 있었다. 그는 부하라에서 통치하면서 쿠빌라이 칸의 권력과 대등하게 맞섰다. 그러나 이 지역은 이후 수백 년 동안 여러 차례 분할되었다. - P280

 

3부는 현대까지의 몽골의 이야기를 담았다.

 

쿠빌라이 치세가 되면 기존의 몽골 체제와는 다른 체제로 꾸려진다. 그는 중국을 정복하고 통일 과업을 이루었고  온건한 법을 통해 민심을 수습했다. 또 실용주의 노선을 통해 민중이 자신이 원하는 말과 글을 쓰도록 장려하였고 힘이 아닌(과거와의 단절) 교역과 외교를 통한 제국을 추구했다. 이 때 역법, 수학, 역사, 인쇄술이 동서양을 넘나드는 계기가 되었다. 

 

몽골은 제국을 정복하면서 전쟁 방법에서 혁명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보편적 문화와 세계체제의 핵을 만들어냈다. 이 새로운 지구문화는몽골 제국의 종언 이후에도 오랫동안 발전을 거듭했으며, 이후 수백 년동안 근대세계체제의 기반이 되었다. 이 문화에는 원래 몽골이 강조했던 자유교역, 자유로운 교통, 지식 공유, 세속 정치, 여러 종교의 공존, 국제법, 치외법권 등이 고스란히 살아 있었다.

유럽은 몽골의 직접 지배를 받은 적은 없지만 여러 면에서 몽골의 세계체제로부터 가장 많은 이득을 얻었다. 유럽인은 몽골 정복이라는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교역, 기술 이전, ‘세계 인식의 대전환‘에 따른모든 혜택을 입었다. 몽골은 헝가리와 독일에서 기사를 죽였지만 도시를 파괴하거나 점령하지는 않았다. 로마 멸망 이후 문명의 주류와 차단되었던 유럽인은 열심히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고, 새 옷을 입고, 새 음악을 듣고, 새 음식을 먹었다. 그들의 생활수준은 거의 모든 면에서 급속하게 높아졌다. - P333

 

다만 페스트가 확산되면서 운송 체제는 중단될 수 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국제 교역은 위축되면서 내부 갈등이 심화되었다. 자연스레 인종을 비롯한 소수자 차별과 종교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후 얼마 가지 않아서 페르시아와 중국에서 몽골 제국은 붕괴되었고 킵착 칸국만이 400여 년간 유지되었다.

 

도서관에서 대출하여 읽었으나 몽골의 역사를 빠르게 확인하기에 좋다고 생각하여 얼마 전 책을 구입하였다. 이런 책은 절판이 안 되고 유지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