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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여행하는 여성, 나혜석과 후미코

category 리뷰/책 2023. 12. 6. 14:13

근대 시기 조선에 예술가였던 나혜석이 있었다면 일본에는 문학가였던 하야시 후미코가 있었다. 둘은 1920년대 말~1930년대 초 세계 여행을 했고 그 여행기를 책으로 출간했다. 나혜석은 1927년 여름부터 시작하여 1929년 3월까지 1년 반 정도의 시간이 흐를 때까지 여행한 뒤 구미 여행기란 이름으로 책을 펴냈다. 하야시 후미코는 1931년 11월부터 시작하여 1932년 6월 돌아와서 삼등 여행기란 이름으로 책을 펴냈다. 그녀의 여행 기간은 나혜석에 비해서 체류 기간이 길지는 않은 편인데 여행 동선이 짧고 들른 장소가 더 적기 때문이다. 어쨌든 지금도 세계 여행을 하려면 시간은 물론이고 비용 문제가 만만치 않은데 둘은 그 시절 세계 여행이라니 일단 놀라웠다. 

 

나혜석이 어떤 인물인가를 드러내는 질문이 있었다. 

 

내게 늘 불안을 주는 네 가지 문제가 있었다. 즉 첫째,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나? 둘째, 남녀 간 어떻게 살아야 평화스럽게 살까? 셋째, 여자의 지위는 어떠한 것인가? 넷째, 그림의 요점은 무엇인가?

 

인간 실존의 문제, 여성으로서의 고민, 화가로서의 위치성이 눈에 들어온다. 

 

하야시 후미코는 처음 알게 된 이름이라 아는 정보가 별로 없었는데 찾아보니 "방랑기"라는 여행기가 당시 60만부까지 팔리면서 베스트셀러 작가로 등극을 했다고 한다. 

 

둘은 공통점이 있지만 차이점이 더 많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단 공통점부터 살펴본다면 여성 문제와 인간으로서의 고민의 문제가 있을 것이다.

 

나혜석은 여성 문제에 이전부터 천착해 있었고 지면이나 인터뷰 등을 통해서 소신을 밝혀왔다. 주체적인 여성으로 산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때 자기 주장을 표현하는 것만으로 따가운 시선을 받기 쉬운 시절이었다. 하물며 그는 유명한 화가였으니 그녀의 말과 행동이 모두의 관심 대상이 되기 쉬웠다. 관심을 받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개인에게는 억압의 기제로 작용하지 않을까. 나는 그녀가 살아가면서 숨이 막힐 것 같은 순간을 여럿 경험했을거란 느낌을 받는다. 그녀의 예술 작품을 보거나 읽는 것만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부녀의 의복은 자기 손으로도 해 입지만 그보다는 상점에서 만든 것을 많이 사서 입는다. 겨울철에는 여름철 옷에 외투만 입으면 그만이다. 여름이면 다림질, 겨울이면 다듬이질로 일생을 허비하는 조선 부인이 불쌍하다.

 

나는 전에 경성에서 어느 극장 앞을 지나면서 동행하던 친척에게 말한 적이 있다. 극장 경영을 하려면 근본 문제 즉 조선 부녀 생활을 급선무로 개량할 필요가 있다고. 실로 여자 생활에 여유가 없는 사회에서 오락 시설은 번영할 수 없다.

 

내가 런던에 체류할 동안 영어를 배우기 위해 여선생 한 명을 정했다. 방금 예순 살 된 처녀로 어느 소학교 교사요, 독신생활을 해가는 가장 원기 있는 좋은 할머니였다. 팽크허스트 여사 참정권운동자연맹 회원이요, 당시 시위운동 때 간부였다. 지금도 여자의 권리 주장이 나오면 열심이다. 그는 이런 말을 한다. "여자는 좋은 의복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을 조절하여 은행에 저금을 하라. 이는 여자의 권리를 찾는 제1조가 된다." 나는 이 말이 늘 잊히지 않는다. 영국 여자들의 선각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에 보고서 여자의 힘이 강하고 약자가 아님을 확신했습니다. 여기서는 여자란 나부터도 할 수 없는 약자로만 생각되더니 거기 가서 보니 정치, 경제, 기타 모든 방면에 여자의 세력이 퍽 많습니다. 특히 외교상에 있어 남모르게 그 내면적 활동력이 굉장했습니다. 우리 조선 여자들도 그리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가 여성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면 눈여겨보지 않았을 지점이다. 나혜석의 극장 이야기를 보니 갑자기 떠오르는 일이 있다. 대학 친구들이 애를 낳고 돌보느라 극장에 가 본지 한참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들은 결혼 전까지 직장을 다니다가 아이를 갖고 경단녀가 되었다. 극장에 가는 것조차 사치가 되어야 하는 일이 되다니 그때 들으면서도 내가 더 억울한 느낌이었다. 

 

하야시 후미코도 여성 문제와 관련되어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파리 주택은 거의 아파트라서 일본처럼 그렇게 널찍하고 틀에 박힌 부엌을 소유한 집은 별로 없다. 게다가 집 밖 레스토랑을 이용하는 가족이 많은 탓에 굳이 엄청난 부엌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일본에서 레스토랑을 여전히 사치스러운 존재로 여기는 동안에는 가정주부가 부엌에서 해방되는 일은 아주 먼 이야기겠지. 잠시 유럽에 살다 돌아오고 나서야 깨닫고 놀란 것은, 주변 여인들이 아침부터 밤까지 부엌에서 줄곧 일한다는 사실이다.

 

일본 여성도 그렇지만 조선 여성도 마찬가지다. 그 때는 가정주부가 육아와 살림을 하지 않으면 비도덕적이라고 난타당할 때였다. 지금은 일하는 여성들이 있으나 결국 가사 노동의 짐은 여성이 더 많이 가져간다. 현실적으로 제도적인 뒷받침이 너무나 부족한 것 같다. 

 

실존에 대한 고민은 상대적으로 하야시 후미코의 입장이 더 감정 이입이 잘 되었다. 영국에 가서는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심신이 무척 불안했던 것 같다. '삼등 여행기'라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나혜석은 일등 칸 기차를 타고 좋은 호텔에서 묵는 등 비교적 여유로운 여행을 했지만 하야시 후미코는 삼등 칸 기차를 타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숙소에 묵으며 여행을 했다. 때문에 막판에는 여행 경비가 떨어져 오가지도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나의 감정과 상황을 솔직히 직시하고 표현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좌절할 것 같은 순간에도 오뚝이처럼 긍정성이 발휘되기도 하는 모습이어서 인간적으로 연민이 가기도 했다.

 

어쨌든 어느 곳에 있더라도 죽는 건 매한가지라고

 

슈트케이스 안에는 차마 버리지 못한 파리의 찌꺼기들, 접시 한 장과 전골냄비, 포크와 스푼, 밥솥과 밥그릇 따위가 들어 있다. 그러니까 아직은 팔팔하다. 까짓것! 좀 낑낑거리기는 해도, 이따금 눈물이 한가득 고이긴 해도 말이다.

 

앞으로 사오일 후면 드디어 무일푼 신세가 된다. 물론 돈이 없다고 해서 죽어버리는 시시한 짓은 안 할 생각이다. 런던은 매일매일 안개가 자욱하다. 아, 진짜 좋은 일을 하고 싶다!

 

얼음 아래로 흘러내리듯 헤엄치는 물고기 냄새를 피부로 느끼며 이대로 아무렇지 않게 바다에 뛰어드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내 머릿속에는 절대로 죽고 싶지 않다는 감정이 허세를 부리고 있지만.... 이럴 때 위스키라도 갖고 있다면 한층 즐겁겠지. 나는 입술을 벌리고 진눈깨비를 혓바닥으로 받아봤다. 진눈깨비는 눈과 코, 입술과 어깨를 보슬보슬 두드리며 사라져갔다.

 

특히 마지막 표현은 정말 멋지다고 느꼈다. 그 풍경이 오롯이 연상됐고 나도 마치 진눈깨비를 맛보는 느낌이었다. 

 

여행에 대한 정보도 제법 상세하다. 나혜석이 여행 장소에 대한 묘사를 자세히 했다면 하야시 후미코는 여행 경비와 동선 등을 상세히 적어 둔 것이 눈에 띄었다. 

 

하얗게 내려 쌓인 눈이 천 길 골짜기에 묻혀 있고, 쳐다보니 융프라우의 맑고 깨끗한 설암이 눈앞 지척에 나타나 있다. 첩첩산중에 사계절 내내 눈이 쌓여 빙하가 되고, 빙하가 녹아 물이 되어 흘러 폭포로 떨어지고, 폭포가 시내가 되어 냇물로 흘러 곳곳에 호수가 되는 것이 스위스의 생명이다. 이것을 보러 각국 사람이 모여들고 이것을 팔아 스위스 국민이 살아간다.

 

스위스의 설산이 예전만큼 쌓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겨울에도 눈이 예전만큼 내리지 않고 여름이 점점 길어져만 가고 빙하는 녹고 있다. 스위스의 아름다운 자연을 볼 날도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은 것 같아 씁쓸해진다.

 

파리에서 유명한 것은 지하철이다. 땅 밑 사층으로 차가 놓여 있을 뿐 아니라 한 선은 센강 아래로 다닌다는 말을 들으면 누구든 곧이듣지 않을 것이다. 사기 조각으로 쌓은 원형 정류장은 깨끗도 하거니와 땅속 길은 찾을 수 없이 복잡하다.

 

지금은 한국 지하철도 제법 잘 되어 있지 않은가.

 

마드리드는 다른 도시와 같이 내놓을 만한 성당도 없고 역사적 전설도 없건만 이 도시를 찾아 세계인이 모여드는 이유는 오직 프라도미술관이 있는 까닭이다.

 

지금은 마드리드에 대성당이 들어섰지만 프라도미술관은 여전히 세계인을 불러 모은다.

 

여행 가이드북은 1~2년만 지나도 쓸모 없는 것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생각보다 놀라웠던 것은 변화하는 것만큼이나 변하지 않는 것들이 여전히 많다는 사실이었다. 한국은 보존되어야할 가치를 등한시하고 그저 아파트, 빌딩 등을 짓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씁쓸해진다. 반면 서양은 두 사람이 방문했던 여러 장소들이 여전히 지금도 운영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빠르게 바뀌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지금의 세대들이 가고 나서 앞서 올 세대들에게 물려줄 것들이 남아 있지 않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여행기의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은 마음으로만 그리던 것을 실제로 만나는 일이다. 이상과 현실은 같지 않더라도 직접 마주한 느낌은 상상만 할 때와는 분명 다르다. 길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처음 만나는 일에는 문화적 충격을 겪기도 하는데 그런 일들이 여행에서 얻는 값진 경험이라 믿는다.

 

한국인들이 여행 말미가 되면 김치나 라면을 찾는다는데 나혜석도 미국의 조선 예배당에서 먹은 시래기국으로 고향 생각이 났을까 싶었다. 여행을 하고 돌아 오면 가기 전의 나와 달라진 게 무엇인지 가장 먼저 그 생각부터 드는데 그녀도 다르지 않다는 것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독일에 갔을 때 공원에서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잔디밭에 누워 일광욕을 하던 기억이 있다. 그 자유가 부럽기도 하다가 '쯔쯔가무시병' 걸리는 거 아냐 하는 생각부터 드는 것을 보니 '나도 참...' 했었다. 여행에 날씨가 좌우하는 힘이 제법 크다는 사실에 공감했고 어학을 좀 더 잘 했으면 하는 생각은 외국인이면 공통적으로 하는구나 싶어졌다.

 

하야시 후미코는 대도시보다는 소도시나 시골 등의 자연에서 편안함을 느꼈던 것 같다. 돈이 궁해서이기도 하겠지만 그녀는 왠만하면 교통 수단을 이용하지 않고 도보로 걸어다녔던 것 같다. 나도 걷기 예찬론자라 외국에 나가면 어디든 걷는 편이라 내적 친밀감이 생겼다. 

 

바르비종이여! 바르비종의 시골길이여! 너무 감미롭긴 해도 이 달콤함을 후회 없도록 다 써 없애고 싶다. 시골 공기를 잔뜩 들이마셨더니 핼쑥한 뺨에 붉은빛이 돌고 마음마저 차분하다. 런던에서 자살까지 생각했던 나도 이 신선한 풍경 앞에서는 그런 생각 따윈 "개나 줘버려"다.

 

나혜석은 여행에 가서 여러 사람들을 만난다. 1927년 6월부터 열린 제네바 군축회의로 인터라켄에서는 영친왕과 사이토 총독을 비롯한 각국의 대사, 공사 및 칙임관들을 만나 식사 자리를 가졌다. 관등으로는 감히 참석하지 못할 자리라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외국에서 만난 것이기는 해도 그녀의 위치가 고위직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영친왕이 나혜석에게 그림을 그려달라 부탁하기도 했다는데 화가로서의 위치를 짐작하게 했다. 제네바 해군 군축회의는 1차 대전 이후 군비 축소 문제의 일환으로 1922년 열렸던 워싱턴 해군 군축 회담에서 전함과 항공모함에 대해서 합의를 본 이후 보조함에 대해서도 적용하기 위해 열린 회의다. 

 

미국에 가서는 장덕수와 윤홍섭, 김마리아 여사를 만나기도 했다. 장덕수와 윤홍섭은 후일 한민당의 주요 의원으로 활약하는 인물들이고 김마리아 여사는 독립 운동가, 교육가로서 많은 업적을 쌓은 분이다. 서재필을 병원에서 만났다는 것을 보니 장소가 그가 1929년 병리학 전문의를 따고 나서 개업한 병원이었던 것 같다. 그곳에서 조선 문제에 대해 의논했다는 것을 보면 여전히 고국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앞서 얘기했던 1922년 워싱턴 군축 회의에 서재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단의 한 명으로 이승만과 함께 참석하기도 했다. 귀국하는 길 일본에서 영친왕을 다시 만나고 그녀는 고국으로 돌아갔다.

 

헤이그에 가서는 이준의 무덤을 찾다가 결국 못 찾아서 이준의 지인들에게 그림엽서를 보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기도 했던 것을 보면 그녀도 조선인이구나 하는 생각을 가젝 한다.

 

나혜석은 조선인이자 식민지 백성 중 하나였지만 내부 계급적으로는 높은 위치에 있었다. 때문에 그 당시만 해도 그녀 주변에는 상류층의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많았을 것이며 대중들과는 교류가 많이 없었을 것이기에 어떤 한계가 엿보였다.

 

출발과 동시에 갑판 위에서 관현악곡이 울린다. 태양빛이 흐르는 호수 위에 둥실둥실 떠서 음악 소리에 몸이 싸였을 때, 아! 행복스러운 운명에 감사를 아니 드릴 수 없었고 살에 허덕이는 고국 동포가 불쌍했다.

 

파초가 널브러진 가운데 여신 동상이 곳곳에 있고 기염 차게 물을 토하는 분숫가에는 웃통 벗은 노동자, 유아들이 한참 무르녹은 멜론을 벗겨 들고 앉아 맛있게 먹는다. 아직도 원시적 기분이 많고, 도로에 흙먼지가 많아 유럽에서는 보지 못한 동양적 색채가 있다. 마차가 많고 노동자가 많으며 걸인이 많다.

 

그에 반해 하야시 후미코는 일본인이자 피식민지민이면서 주로 프롤레타리아와 노동자 계급에 주목하는 모습이 엿보인다. 일본인으로서 일본을 걱정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다른 나라의 영토와 백성을 짓밟으며 나아가고 있는 것에서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 눈에 띈다. 대부분의 일본인이 이와 비슷한 감정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언제나 진실한 것은 파묻혀 지나가고 다소 연극적인 것이, 으스대는 것이, 상스럽게 비하하는 자들이 어이없게도 어느 나라든 특권을 갖는구나. 프롤레타리아라는 하이칼라 언어를 쓰지 않아도 기나긴 삼등 열차 여행에서 굉장히 착하지만 가난한 사람을 수없이 봤다.

 

세계대전 이후 대체 어디에 평화가 왔나? 각국의 인민은 녹초가 됐다. 유럽을 걸어보면 지금도 베르됭의 피비린내가 난다. 발 없는 남자, 한 손 없는 남자, 한쪽 눈 없는 남자, 이런 베르됭의 유물이 무얼 하고 있냐면 대개 샌드위치맨이거나 걸인 또는 비올라 켜는 광대다. 과거 인기가 높던 어느 인간의 말로, 그 모습의 사람들이 유럽 각국에서 우글거리며 배출구를 찾고 있다. 파리 직업소개소도 그랬지만, 런던 직업 소개소도 시루에 콩나물 박히듯 어느 곳이나 매일 아침 실업자가 행렬을 짓고 차례를 기다린다. 전 세계가 굶주리고 있는 느낌이다. 옛날에는 일본에서도 평화박람회가 열렸는데, 대관절 누굴 위해 배를 주리고 저 긴 줄을 이루는 걸까?

 

런던의 일부 평화주의자는 대장 나라 일본이라고 낙인찍고 있건만, 청일전쟁부터 이노우에 장관 암살까지가 일본을 점점 대장 나라로 만드는 듯하다. 싫증 나는 이야기다. 억지 이론이 통하지 않으니 정치가도 인민도 검술을 배우나 보다.

 

나혜석도 분명 동양인이자 여성으로서 인종 차별을 겪었을 수도 있었을텐데 여행기에서는 그런 기록이 보이지는 않았다. 하야시 후미코는 그런 일화를 거침없이 적어 놓았다.

 

파리 카페에서 내게 말을 건 어떤 신사가 "마드무아젤, 당신은 인도차이나에서 왔나요? 요즘 식민지는 어떤가요?" 실크해트에 턱시도 차림의 남자는 절대 금물. 더군다나 단안경을 걸치고 내려다보는 모습이라니, 아무리 봐도 눈에 거슬렸다. "논, 논! 무슈. 나는 자포네제랍니다."

 

아침에는 근처 카페에 서서 커피를 마시는데 "일본이란 나라는 손톱을 30센티미터나 기른다면서?"라는 것밖에 일본 관련 지식이 없는 노인이 있었다. 그는 내 소매를 흔들며 하늘을 달리는 거야?" 하며 웃었다.

 

나혜석도 조선의 발전 방향에 대하여 고민을 많이 했던 것으로 보인다. 스위스가 자연을 가지고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것처럼 조선도 강원도, 금강산 등지를 잘 꾸미면 경쟁력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금강산은 이제 가볼 수도 없게 되어 버린 슬픈 땅이 됐지만.  

 

나혜석은 화가로서 연구를 위해 파리에 더 체류하고 싶어했으나 결국 귀국했다. 그녀가 그곳에 남아 그림을 계속 공부했다면 이후 삶이 달라졌을까. 한국 현대화가인 이성자 선생님도 파리에서 공부를 하셨는데 그녀가 먼저 그 땅을 밟아 개인전도 하고 작품 활동을 계속 해줬으면 어땠을까. 그녀는 고야와 고야의 그림에서 특히 많은 인상을 받아 유독 감정 이입을 한 글을 남겨 놓았는데 보고서 독자인 나도 슬픔에 잠겼다. 그녀도 그런 화가가 되고 싶었구나 생각했다.

 

그는 죽었다. 그러나 살았다. 그는 없다. 그러나 그의 걸작은 무수히 있다. 나는 이 묘를 보고 그 위에 걸작을 볼 때 이상이 커졌다. 부러웠고 나도 가능성이 있을 듯했다. 처음이요, 또 최후로 보는 내 발길은 좀처럼 돌아서지를 않았다. 내가 이같이 감응해보기는 전후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