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전자도서관에 들어가서 목록을 넘겨보다 발견한 책이다. 이 책은 저자의 대표작으로 휴고상을 수상하기도 하였으며 중국 SF 문학의 대표 작품으로 손꼽히는 책이다. 그래서 나도 궁금은 했으나 선뜻 발을 담그지는 못했는데 난해할까봐였다. 하지만 마침 올해 3부작 중 1부에 해당되는 내용이 드라마화 되었길래(넷플릭스에도 예정작에 올라 있음) 이번에야말로 원작을 읽어볼 기회라 여겼던 것이다. 드라마를 먼저 보고 책을 볼까 책을 먼저 보고 드라마를 나중에 볼까 고민했으나 역시 원작을 먼저 읽는 것이 낫겠다 싶어 주저 없이 대출 버튼을 눌렀다.
읽으면서 과학과 공학은 다르다는 것을 절감했다. 과학 지식은 형편없는데 책에 등장하는 굉원자, 초끈 이론, 우주배경복사 등의 용어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하다. 그러려니 하며 읽었고 이런 부분은 드라마를 볼 때도 이해되지는 않겠지만 시각적으로 보게 되면 향후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왕먀오는 나노 연구 프로젝트 수석 과학자인데 풍경 사진을 찍는 것을 좋아한다. 여느 날처럼 풍경 사진을 찍으러 갔다가 유령 같은 카운트다운 숫자(시간, 분, 초)가 찍히는 것을 보고 패닉에 빠진다. 필름과 카메라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사진만 찍으면 그런 카운트다운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 원인을 찾아가는 과정이 이 책의 결과물이다.
내용에 대한 배경 설정은 우주와 미래에 대한 기본 설정 아래 현대 중국이 진행했던 우주, 과학 프로젝트에서 소재를 따왔다. 그가 만들어낸 세계에서는 경계가 끝이 없다고 여겨지는데 등장인물만 해도 그렇다. 주나라의 문왕이 나오고 문화 대혁명이 나왔다가 묵자가 나왔다가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아리스토텔레스, 다빈치, 뉴턴, 폰 노이만, 진시황까지... '이걸 조합한다고?' 중얼거려보는데 희한하게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또 우주와 자연의 풍경을 묘사한 구절들이 퍽 인상적이었다.
새 떼가 안테나가 향한 곳으로 날아들더니 어두운 빛을 뿜는 구름을 배경으로 후드득 추락하기 시작했다. 안테나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만 여전했다. 밤하늘의 새들도 숲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다시 안테나를 쳐다보았다. 그것은 마치 하늘을 향해 활짝 벌린 거대한 손바닥 같았고, 이 세계를 초월한 힘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저자가 컴퓨터 엔지니어 출신이여서 컴퓨터 용어나 공학 프로그램을 설명할 때는 흥미롭게 읽었다.
대학 때 들어가자마자 배운 것이 '논리 회로 게이트' 실험이다. 그 실험은 대부분의 이론 강의들과는 달리 실습이라서 기억에 남았는데 회로판을 조작하여 NOT, AND, OR, NAND, NOR, XOR, XNOR 게이트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컴퓨터의 수는 결국 0과 1을 이용한 16진수로 구성되는 원리인데 이를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다르게 나온다.
인간 컴퓨터 시스템 버스를 관통하는 경기병이 빠르게 움직이자 버스가 즉시 센 물살의 강물처럼 변했다. 강물은 길을 따라 다시 무수한 작은 지류로 나뉘어 각 모듈 진열로 들어갔다. 빠르게, 흑백기의 잔잔한 물결이 세찬 파도로 변해 메인 보드 전체에 출렁였다. 중앙의 CPU 구역이 가장 격동적으로 움직여 마치 불타는 화약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화약이 다 탄 것처럼 CPU 구역의 움직임이 점점 잦아들더니 결국 완전히 정지되었다. 그것을 중심으로 각 방향이 빠르게 중지되었다. 빠르게 얼어붙는 바다 표면 같았다. 마지막에는 메인 보드 대부분이 정지되었다. 그 중간에 산발적인 죽음이 불변의 리듬으로 생기 없이 반짝이면서 대열 속에 붉은색이 나타났다.
“시스템 잠금!”
고장 원인은 금새 밝혀졌다. CPU 상태 레지스터 중 게이트 회로에서 오류가 발생한 것이었다.
… 메인 보드에 물결이 잔잔하게 퍼지면서 대열 각각의 색 표지가 반짝거렸다. 인간 컴퓨터가 길고 긴 계산을 시작했다.”
역사적 사실인 문화 대혁명과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 출간 이후 지구 환경에 대해 이어진 경고는 지금도 독자에게 전해주는 메시지들이 분명하다고 여겨진다.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마오쩌둥이 감행한 문화 대혁명을 돌아보며 체제를 거스른다 여겨지는 자들을 반동자로 불렸던 이들은 복권되기도 했으나 역사 속에 묻히기도 했을 것이다. 살아남았다 해도 이제 더는 그들을 기억하지 않는다. 레이첼 카슨이 경고한 지구 환경은 어떠한가. 과거에는 DDT의 위험성을 경고했지만 이제는 산불이 수개월간 꺼지지 않거나 홍수로 몇 개월간 도시가 잠기는 등 지구의 환경은 악화 일로로 치달아 위기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게 되었다.
무수하게 병행하는 연산을 하는 CPU처럼, '문화 대혁명'은 하나의 공동체가 되었다. 광란은 무형의 홍수처럼 도시를 휩쓸어 미세한 틈과 부분까지 파고들었다. 온갖 파벌이 난무하던 시대에 복잡하게 얽힌 대립파들이 서로 격투를 벌였다. 교정에는 홍위병, 문혁공작조, 공선대와 군선대가 첨예하게 충돌하고 있었고 각 파벌 내부도 시시각각 새로운 대립 파로 분리되어 각자 다른 배경과 강령을 수호하며 더 참혹하게 힘겨루기를 했다. 그러나 반동 학계 권위자 비판은 어떤 파도 이견이 없는 투쟁 목표였고 반동 학계 권위자들은 각 파벌의 참혹한 공격을 모두 감수해야 했다.
"아인슈타인은 반동 학계 권위자다. 그는 기회주의자야! 미국 제국주의에 빌붙어 원자 폭탄을 만들었어! 혁명적인 과학을 건설하려면 상대성 이론으로 대표되는 자산계급 이론의 검은 깃발을 타도해야 한다!"
"중국에서는 아무리 자유로운 사상이라도 결국에는 모두 '탁' 하고 땅에 떨어져버리지. 현실의 인력이 너무 무거워"
"철학이 실험을 이끄는가, 실험이 철학을 이끄는가?" 예저타이가 물었다.
그들은 신념과 이상을 위해 싸웠다. 그들은 역사가 자신들에게 부여한 영광의 사명에 도취되었고 자신의 용감함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들은 불살랐던 세대였다. 그래서 그들은 불사르듯 전기톱으로 울창한 숲을 벌목해 황폐한 민둥산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들의 트랙터와 콤바인 아래 광활한 초원은 밭으로 변했고 나중에는 사막이 되었다.
큰 나무가 끌려갔다. 지면의 돌과 등걸에 걸려 나무껍질이 벗겨졌다. 마치 거대한 몸의 피부가 찢기고 살이 터지는 것 같았다. 나무가 원래 있던 곳에 두껍게 쌓여 있던 낙엽 부식층이 눌러 고랑을 만들었고 고랑에서 물이 흘러나왔다. 오랫동안 부식된 낙엽에서 나오는 물은 암홍색이었고 그것은 마치 피 같았다.
아마도 인간과 악의 관계는 대양과 그 위에 떠 있는 빙산의 관계로, 둘은 동일한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 빙산이 눈에 잘 띄는 이유는 그저 형태가 다르기 때문이고, 그것의 실체는 거대한 물중 아주 작은 일부분일 뿐이라는 것이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듯 인간 스스로 도덕적 자각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하려면 인간 이외의 힘을 빌려야만 한다. 이 생각이 예원제의 일생을 결정했다.
"이 책은 『침묵의 봄』, 1962년 미국에서 출판된, 자본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은 책이지. 현재 상급 기관은 이 책의 성격을 명확하게 규정했어. 이 책은 반동의 독초야. 이 책은 유심 사관에서 출발해 말세론을 선동하고 있어. 환경 문제라는 이름으로 자본주의 세계의 부패와 몰락의 핑계를 대지만 그 본질은 매우 반동적이야."
과학과 기술은 일순간 미래의 문을 여는 유일한 열쇠가 되었고 사람들은 초등학생처럼 열심히 과학에 접근했다. 그들의 노력은 천진했지만 착실하고 진지했다. 이것은 광기의 완결인가? 과학과 이성이 회복되었는가?
태양이 검은 구름에 가려졌고 대지에 드리운 그림자가 움직였다.
SF 소설을 많이 읽은 것은 아니지만 삼체는 그 중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 같다. 저자가 말하길 자신의 이야기는 진실과 가늘게라도 이어지길 원한다는데 그 말이 내 마음을 공명시켰다. 이 소설은 상상의 나래를 펼쳐야 하는 그런 잡히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는 아니다. 그래서 오히려 내게 잘 맞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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