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종에 이어 즉위한 충렬왕은 쿠틀륵케미시(제국대장 공주)와 혼인(제국대왕 공주와 충렬왕의 관계는 딱히 좋지는 않았음)하면서 부마 지위를 활용해 외교적 이익을 추구했다. 1278년 몽골에 가서 쿠빌라이 칸을 만나 몽골의 다루가치 배치와 호구조사 요구를 철회하게 하는데 성공했다. 몽골이 고려에 항복을 받아들이게 하면서 요구한 ‘6사‘의 내용 중 고려가 결코 들어줄 수 없는 두 가지 사항들이었는데 이때야 비로소 받아들여진 것이다. 또 이 때 고려에 주둔한 몽골군이 철수하면서 몽골 관리나 군대가 상주하지 않게 되었다. 이로서 고려 국왕의 지위는 부정되지 않았으며 고려 독립국의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매사냥을 하는 응방의 인물을 측근들에게 맡기는 등 자기가 신임하는 사람들 위주로 정치를 행하면서 왕권을 강화하려고 함으로써 한계를 보인다.
충선왕은 충렬왕이 죽지 않은 상태에서 왕위를 양위받는다. 그는 쿠빌라이의 외손자이기도 했고 계국대장 공주와 혼인하여 몽골의 부마가 되면서 왕위 경쟁에서 유리했다. 충렬왕은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하였으나 그녀는 쿠빌라이 칸의 정비 소생이 아니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힘이 약했다. 쿠빌라이 칸이 죽고 후계를 정할 때 충렬왕이 원 성종을 지지하지 않으면서 왕위에서 물러나게 된다. 아버지의 측근 정치를 보고 못마땅했던 충렬왕의 측근세력을 제거하려다 오히려 원의 의심을 샀고 계국대장공주와 불화가 생기자 8개월만에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원나라 성종이 죽고 인종과 무종 간에 대결이 펼쳐졌는데 줄을 잘 선 충선왕은 원의 실력자로 등극한다. 이후 그는 고려 인사 행정 관제를 바로잡고 공이 있는 자를 포상하고 백성 착취를 금지하는 등 개혁 정책을 펼쳐 나갔다. 하지만 그는 즉위 후 3개월만에 원에 가서 고려에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 같은 측근정치를 하지 않기를 원했지만 결국 이전의 측근정치를 반복하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고려 내에서 직접 개혁을 했다면 나았겠지).
기황후는 몽골에 끌려간 공녀가 뛰어난 정치력으로 황후에 자리까지 오르면서 큰 권력을 가졌던 인물이다. 이 무렵 원나라와 고려 내 왜구 출몰이 잦아지자 원 조정은 공민왕을 세워 해결하려 한다. 공민왕은 핵심 부원 세력이었던 기황후 세력을 몰아내고 신돈을 기용해 개혁 정치를 펼쳐 나가는데 원나라의 힘이 약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정동행송 이문소를 폐지하고 쌍성총관부를 수복하였으며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권문세력이 불법소지한 토지와 노비를 토해내게 하여 국가 재정을 확충하고 권문 세력을 몰아냈다. 또 과거 제도를 개혁함으로써 기존의 유학자들의 계파 정치의 연결고리를 끊음으로써 새로운 인물을 발탁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신돈이 사적 권력을 지나치게 휘두르자 공민왕도 그를 경계하며 내치게 된다. 중국은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교체되었고 공민왕은 명나라에 책봉됨으로써 친정 정치를 행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인임은 대표 권문세족으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사람이다. 그는 개혁 세력인 신진사대부들을 내치고 개혁 이전으로 흐름을 돌리기 위해 최영과 결탁하였다. 명 사신이 피살되는 일이 발생하자 이인임은 원과 끊어져 있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북원에 사신 영접을 추진한다. 그로서는 명, 원과 둘 다 관계를 가짐으로써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인임의 고단수 정치력은 여기서 발휘되는데 대표적인 신진사대부였던 정도전을 북원 사신으로 보내려고 한다. 정도전이 이를 받아들일리가 없었고 이 일로 정도전은 나주로 유배를 가게 된다(나주 현장에서 백성들의 참상을 보면서 그는 개혁 의지를 일으키게 되었다). 이인임은 정도전 뿐 아니라 이 때 신진사대부들을 모조리 싹쓸이함으로써 개혁 동력을 끊고자 했다. 그러나 이인임의 계속되는 국정 농단 때문에 최영과의 연립 의지는 끊어진다. 이인임이 이 때 개혁 세력들을 잘 보듬고 건강하게 끌어갔다면 고려는 더 이어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권력욕과 탐욕은 그들에게 내어줄 의지가 없었다.
14세기 말 왜구가 침공하자 고려는 전국에 계엄령을 내린다. 이 때 일본은 남과 북으로 나뉘어 전쟁을 벌이고 있었던 만큼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고 중국은 원-명 교체였기 때문에 정세가 불안정했다. 왜구의 출몰이 심각했던 배경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최영이 홍산에서 왜구를 막아내고 이성계는 황산에서 왜구를 막아냈다. 1389년에는 조선과 왜구 사이에 다리 역할을 하던 쓰시마를 정벌한다. 일본이 남북조를 통일하자 내부가 안정되었고 원-명이 교체되고 명이 해금 정책을 펼치면서 왜구는 자연스레 줄어들게 되었다.
최영은 이성계와 손을 잡고 이인임을 비롯한 권문 세족(구 귀족 세력)을 제거한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최영과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사건으로 갈린다. 명이 고려에 철령 이북 땅을 요구하자 최영은 요동 정벌을 주장했고 이성계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이성계가 돌아온 뒤 최영은 체포되고 명이 철령 이북 땅을 포기함으로써 최영은 고려의 마지막 무신으로 남았고 이성계는 고려의 무신이자 조선의 개국 왕으로 변모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물론 이 때 당시에는 새 왕조를 열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최영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마지막 이야기는 조선과 이어져서 대중들도 잘 아는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고려 말의 역사는 조선의 건국 역사와 맞물려 있기 때문에 더 자주 다루어져서 잘 알게 된 측면도 있는 것 같다.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은 패널에 신병주 선생님이 참여함으로 인해 고려의 역사를 조선의 역사와 비교하여 설명해주면서 더 쏙쏙 이해되는 측면이 있었다. 책을 읽기 전 역사저널 그날 고려편을 보아도 좋고 후에 복습 겸으로 해서 보아도 도움이 될 것 같다. 책을 다 읽고 나니 고려 편을 복습해보고 싶은 생각이 절로 일었다.
아쉬운 점은 역사저널 시리즈로 조선은 총 8권의 분량이었는데 고려는 4권의 분량이어서 상대적으로 짧았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방송 분량 자체가 조선보다 훨씬 짧았기 때문일 것이다. 11월에 드라마 방영도 있는 만큼 고려의 역사를 더 다루는 기획 시리즈가 있으면 좋겠다. 고려의 역사는 여전히 부분적으로 가려져 있어 메워야 할 역사가 많다. 앞으로 더욱 많은 자료가 발굴되고 이를 바탕으로 역사들이 보충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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