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책] 역사저널 그날 고려편 3

category 리뷰/책 2023. 10. 11. 17:41

개인적으로 ’민‘의 힘을 믿는 편이다. 우리 역사상으로도 ’민‘은 많은 역할을 해왔고 때로는 주도적인 힘으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왔다.
3권은 특히나 민의 힘이 돋보이는 주제들이 많아서인지 지금 나라 꼴이 엉망이어서이기도 하지만 힘이 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주제 파악 좀 하시지.‘라는 말을 우리는 많이 듣고 산다. 그런데 주제 파악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계급이나 신분을 뛰어넘는다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것임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어쩌면 모든 것을 잃어버릴지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박차고 일어난 ’민‘들을 생각하면 전율이 인다. 그 세세한 이름들을 알 수 없어 더욱 그렇다.

3권은 민란을 일으킨 주인공들을 다루며 시작한다. 먼저 만적은 최충헌의 노비임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이 잘 알려져 있다. 왜일까? 고려사에서 ‘만적의 난‘ 사건은 최초의 신분해방운동의 성격을 가진다. 그는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나.˝를 주장하며 신분해방을 꿈꿨다. 하물며 주인인 최충헌이 무신시기 집권자인 상태에서 말이다. 물론 그 전에 이의민이 소금장수 출신의 천민으로 무신 집권자가 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입장에서는 본보기가 있다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삼국 시대에도 신분 차별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며 봉기가 일어난 경우가 있지만 만적은 신분 해방을 꿈꿨다는 측면에서 그 경우가 달랐다.
공주에서는 망이, 망소이의 난이 일어났다. 당시 공주는 ‘부곡‘에 속하던 곳이었는데 이곳은 ‘향‘과 마찬가지로 농산물을 생산했다(‘소‘는 수공업품이나 광물, 수산물을 생산). 고려 시대 지방 체계는 주현-군현-향소부곡 구조로 주현만 지방관이 직접 파견되는 형태였다. 처음 교과서에서 향소부곡을 배울 때 잘못 배웠는지(그 이후에 바뀐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곳에 사는 이들이 천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오해였다. 고려 시대에 천민은 국역을 지지 않으면 천민이고 나머지는 다 양인이다. 향소부곡도 국역을 지기 때문에 당연히 양인이다. 다만 주현이나 군현의 주민들보다 조금 천한 일을 하는 것 뿐이다. 이번 기회에 향소부곡민이 양인이라는 것을 재확인하고 넘어간다.

최충헌 집권 시기는 길었던 만큼 자기 손으로 두 명의 국왕을 폐위시키고 두 명의 국왕을 옹립시켜서 결과적으로 여러 임금을 모셨다. 앞서 2권 후기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최충헌은 개인에 대한 권력욕과 탐욕이 많았던 인물이었던 만큼 왜 스스로가 왕이 될 생각은 하지 않았을까 궁금했을 수 있다. 그래도 하극상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여겨서일 수도 있겠지만 민심의 눈치를 살폈던 이유가 아무래도 더 클 것 같다(생각은 했지만 감행을 안 한 것일지 모르나 이것은 기록에도 없고 추측일 뿐이다).
최충헌의 권력이 끝모르게 비대해지자 희종은 그의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암살을 시도한다(최충헌은 이를 비롯하여 여러 차례 암살 시도를 받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암살은 실패했고 희종은 유배길에 오른다. 그런데 이후에도 희종은 최충헌에 대한 견제를 멈추지 않았고 최충헌은 결국 희종을 폐위시키고 강화도에서 명종의 맏아들인 왕숙을 데려와 강종으로 옹립시키게 된다. 앞선 의종은 망나니였다고 쳐도 희종의 암살 시도가 성공했다면 어땠을까. 아들인 최우가 있었다지만 아버지가 살해당한 만큼 최씨 집권이 더 이어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어쩌면 무신 정권 자체가 종료되었을수도 있지 않을까.

몽골은 앞선 거란과 여진의 침입과 다르게 고려에 큰 피해와 영향을 주었다. 그렇지만 몽골이 침입한 국가엔 흔적 하나 남지 않았다는 역사를 보면 고려는 왕조를 지켜냈고 얻을 것은 얻어내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후손으로서 감사하면서도 뿌듯함을 느끼게 한다.

몽골군은 고려 땅에 언제 들어오게 되었을까. 1218년 12월 거란이 침입했을 때 거란군을 따라 몽골군이 떠밀려 내려온 것이 그 시작이었다. 몽골군도 처음에는 형제 관계를 요구하였으나 앞선 거란과 여진과 달리 지나친 공물과 보상을 요구하면서 고려에 부담을 주게 되었다. 어느 날 몽골 사신인 제구예가 들어왔다 피살되자 양국 교류는 단절된다. 범인은 고려일 수도 있고 몽골(의 자작극)일 수도 있고 동북쪽에 있던 동진이라는 나라일 수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추정 세력일 뿐이고 정확하지는 않다. 어쨌든 몽골군의 1차 침입의 명분은 이 사건(이라고 주장) 때문에 발생한다. 1차 침입(1231.9) 때는 귀주성에서 큰 전투가 있었다. 여기서 정주 지방의 장군을 맡고 있던 김경손이 불과 12명의 군사를 데리고 성문을 나와 몽골군을 기습 공격하면서 긴장시킨 덕분에 무려 4개월 동안 성을 지키며 전투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고종은 더는 전투를 이어가는 것은 피해를 키우는 일이라 보았기 때문에 지휘관인 박서에게 항복을 종용하면서 몽골과 화친(1232.1)을 맺게 된다.

1232년 7월 최씨 정권이 강화도로 천도하면서 40여년 가까운 강화도 시대가 시작된다. 최씨 조정은 강화도에 있었으나 와중에도 산성이나 섬으로 대피하는 방식으로 몽골군과의 전투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산성에는 산성방호별감이라는 관리자를 파견하여 수령을 지휘하게 하고 백성을 위한 구휼 사업도 하였다. 문제는 강화도 최씨 정권의 탐욕이다. 병사들과 백성들은 전투로 다치거나 죽어가고 있는데 그들은 세금으로 연회를 열고 펑펑 놀았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왜 집권자들이 되면 이리 엉망이 되는지 모르겠다. 인간의 욕심이 결국 발현되는 것이겠지.
1232년 8월 몽골이 2차 침입을 단행하자 처인성(지금의 용인)에서 전투가 벌어진다. 승려인 김윤후가 주연급 활약을 하였는데 그는 백성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면서 전투를 승리로 만들었기 때문에 더 값지다고 생각한다(처인은 원래 부곡이었으나 주현으로 2단계나 승격되었다). 기억해야 할 인물이 있다면 홍복원인데 그는 몽골에 귀부해 관리가 되고 세력을 얻어 이후 몽골 침입 때마다 길잡이 노릇을 한다. 고려판 앞잡이로 보면 되겠다. 사람의 선택은 한 순간이지만 역사에 어떻게 이름을 남기는가는 그조차도 몰랐을 것이다.
몽골의 3차 침입은 1235년에 시작해서 무려 5년 간 이어졌고 경상, 전라 지역까지 몽골군이 밀고 내려오면서 문화재까지 소실되는 등 피해가 극심했다. 1241년 우구데이 칸이 사망하고 1246년 구육 칸이 즉위하면서 몽골 내정이 혼란했기 때문에 전쟁은 잠시 멈추어졌으나 다시 1247년 4차 침입이 이어지고 1248년 구육 칸이 사망하여 다시 휴지기를 갖다가 1253년에 5차 침입이 이어진다. 5차 침입 때는 몽골이 철저히 준비를 하고 나와 공성 무기와 발화 무기를 사용하여 방어에 주력하던 고려군이 힘에 부칠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충주성 전투에서는 2차 침입 때 처인성 전투에서 활약한 김윤후가 다시 백성들을 이끌어내며(노비 문서를 소각해주겠다라는 명분) 활약한다.

쿠빌라이와 원종의 만남은 고려 시기를 좌우할 정도로 영향력 있는 사건이었다. 태자였던 원종은 신의 판단력으로 당시 즉위 순위 1위인 아릭 부케를 만나러 가지 않고 쿠빌라이를 만났고 쿠빌라이가 칸에 즉위하면서 원종은 고려를 안정적으로 이끌 동력을 얻게 된다.
1254년 몽골이 6차 침입 후 고려 땅을 떠나지 않으면서 더는 몽골과 싸우는 것이 불가능해진 고려는 강화 후 쌍성총관부를 설치하고 몽골과 책봉-조공 관계를 맺게 된다. 몽골은 ‘6사‘를 요구했는데 고려의 대응이 놀라울 정도로 멋지다(지금도 왜 이렇게 외교를 못하는 건지...).
참고로 몽골이 요구한 ‘6사‘는 다음과 같다.
1.인질 보낼 것 2.군사 파견 요청 시 올 것 3.수량과 군량 수송 4.성역과 역참 개설 5.호구조사 보고 6.다루가치를 둘 것
특히 5, 6번 원칙은 고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고려의 원칙은 단 한 가지였는데 고려를 지킨다는 것이다.
무신정권이 원종을 폐위하자 그는 쿠빌라이 딸과 결혼하고 몽골군의 힘을 빌린다(이 지점이 두고 두고 아쉽다). 결국 1270년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정권이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고려 내 몽골의 영향력이 강화되는 결과를 낳는다.

개경 환도 세력에 맞서 배중손 지휘 하에 삼별초가 자신들의 조정을 세우고 강화도, 진도와 제주도로 옮겨 가며 몽골군과 항쟁한다. 삼별초는 본래 무신정권의 핵심군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몽골군과 대결하기로 하면서 백성들은 이에 힘을 실어준다(몽골군에 맞서길 원했고 또 호적 문서를 불태워준다는 약속이 있었음). 특히 진도에서 싸울 때는 전라도 남부를 석권할 정도로 그 세력이 컸다고 한다. 하지만 1273년 제주도에서 아쉽게도 삼별초 항쟁은 막을 내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별초의 대몽항쟁은 몽골을 괴롭혔고 고려의 자주성을 보여주는 기회도 되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