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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역사저널 그날 고려편 1

category 리뷰/책 2023. 10. 5. 09:39

교양서를 읽는 일은 역시 지식을 적당하게 채우면서도 머리를 가볍게 해주어 즐겁다. 고려의 역사를 실로 오랜만에 읽게 되었다. 계기는 우연찮게도 11월에 방영될 대하 사극이 고려와 관련되어 있어서다. 물론 그것 때문만은 아니고 중국의 역사를 원나라까지 한 번 훓은 김에 고려의 역사를 병행하여 읽는 것도 재밌겠다 싶었다. 시작은 가볍게 읽는 것이 좋은데 그런 면에서 이 책이 적당하다 여겼다. 책은 TV 프로그램으로 봤다는 이유로 사두기만 하고 정작 읽어보지 못한 채 보관용으로만 갖고 있다 이제서야 펼치게 되었다. 어쨌든 갖고만 있으면 읽게 되는구나.

 

고려의 역사는 475년 동안 거란, 여진, 몽골(원), 홍건적과 왜구 등 세기 별로 전쟁이 이어지다보니 대부분 ‘전쟁’의 사건과 관련 인물들을 위주로 기억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역사 공부를 좀 한 사람이라면 기억할 만한 업적을 가진 초기의 ‘광종’과 후기의 ‘공민왕’ 정도나 알까. 

고려는 조선보다 훨씬 더 알려져 있고, 더 오래 전의 신라보다도 오히려 덜 알려진, 미지의 나라로 여겨진다. 하지만 고려는 우리 역사상 두 번째 통일의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다양성과 개방성이 살아 있어 오늘날 우리가 배울 점이 있는 나라였다. 지방 사람들이 세운 나라였고, 화려한 귀족 문화가 발전한 나라였으며, 불교와 유교가 공존한 나라였고, 넓은 세상과 교류한 나라였다. 이런 고려를 미지의 상태로 남겨 둔다면 우리의 한국사 지식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 P5

 

고려판 왕좌의 게임의 주인공 왕건 vs 견훤의 승자는 최종적으로 왕건이었다. 둘의 대결을 마치 오늘날의 선거판으로 재해석하여 내놓아 재미를 더한다. 

견훤은 후백제의 왕으로 활동 범위는 주로 오늘날의 전라도 지역이었는데 출생지는 경상도 상주 가은현 출신 호족 아자개의 아들이었다. 대부분의 건국 조상에 해당되는 이에 신화가 부여되듯 그에게도 어릴 적 호랑이가 젖을 물렸다는 설화와 지렁이의 아들이라는 설화가 존재한다. 지렁이가 한자로 ‘지룡’으로 표현되는데다가 지렁이의 한자가 ‘진훤’으로 표현되는 것을 보면 지렁이의 설화가 좀 더 설득력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둘의 싸움에서 견훤이 공산성 전투에서는 이겼으나 고창 전투(930)에서 지면서 승기는 넘어갔고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가 왕건에게 넘어가면서 힘이 더욱 실리게 되었다. 나중에 신라 경순왕의 귀부, 아들인 신검까지 왕건에게 귀부하면서 둘의 싸움은 종지부가 찍힌다.  물론 둘의 승부를 가른 결정적인 일은 지방 호족 세력들을 끌어들이고 민심을 얻는 데 왕건이 승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왕건은 결혼을 통한 동맹을 이용해 지방 호족의 지지를 얻었다. 총 29번의 결혼을 통해 25명의 아들과 9명의 딸을 두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를 제외하고 세 번째 결혼부터는 정략 결혼이 행해졌지만 이로 인해서 다음 왕위가 순탄치 않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개인적으로 제1왕후인 신혜왕후 유씨의 성격은 탄복할 만하였다. 궁예가 학정을 펼치니까 그 밑에 있던 사람들이 왕건에 가 함께 거사를 도모하려 했다(왕건은 주저하던 상황). 거사를 도모하는 회의 전 왕건이 아내에게 오이를 따오라고 내보냈는데(회의 내용을 듣지 못하게 하려고 고의로 내보냄) 밖으로 나가는 척하다가 휘장 속에 숨었다 그것을 걷고 나와 “의거를 일으켜 포악한 군주를 교체하는 일은 옛날부터 있었습니다. 지금 장수들의 의견을 들어보니 저도 의분이 솟구치는데 하물며 대장부야 어떠하겠습니까?” 하며 왕건의 군대 파병을 종용했다고 한다. 

우리 역사에서 성을 쓰고 본관이 정착된 것이 고려 초 지방 호족들에게 성을 하사하면서부터라고 한다. 알아두어야 할 키포인트다.

태조는 그 많은 아들 중 둘째 왕후의 아들인 ‘무’에게 일찌감치 정윤(조선으로 치면 ‘태자’)으로 책봉했는데(첫째 왕후는 아들이 없었음) 비록 처가 집안은 한미하였으나 장자 계승 원칙을 가능하면 지킴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꾀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고려 초기는 유독 조선 초기와 특히 비슷한데 왕자의 난까지 닮은꼴로 일어난다. 태조를 이어 혜종이 왕위에 올랐지만 병석에 눕자 태조의 아들이었던 왕요와 왕소가 대립했고 혜종의 장인인 왕규가 난을 일으켜 자신의 외손자이자 태조의 아들인 광주원군을 왕위에 올리려다가 실패하여 왕요가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상한 것은 왕규가 혜종의 장인인데 왜 굳이 난을 일으켜서 자기 발등을 찍었느냐 하는 것인데 사료가 충분하지 않다보니 결과만 놓고 추측할 수 밖에 없어 아쉬움이 인다. 혜종이 얼마 안 가 죽고 왕요가 정종으로 즉위한다. 정종은 서경 천도를 통해서 자신의 힘을 키우고자 했으나 민심이 곱지만은 않았고 서경 이외의 호족 세력도 반발했기 때문에 광종이 즉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광종은 조선판 태종과 나란히 둘 수 있을 정도로 개혁의 피바람을 몰고 온 왕이다. 집권 초기 7년은 조용히 숨죽여 지내다 ‘노비안검법’과 ‘과거제’ 시행으로 호족들을 충격에 빠뜨린다. 특히 ‘노비안검법’은 호족들에게 큰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었다. 일종의 노비 해방인데 자신의 권력 기반이었던 노비를 양민으로 전환시킴으로써 국가는 노동력을 확보하고 세금을 더 걷을 수 있겠지만 호족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노동력이 빠져 나가는 일이었다. 아무튼 광종 같은 사람이 정말 무서운 사람이 아닐까. 광종 집권 15년차가 되면 주변의 문제될 만한 인물들(혜종과 정종의 아들 등)을 모두 숙청하기 시작한다. 근데 또 숙청을 하는 동안에 사람의 넋을 위로하는 법회를 열고 절을 창건하고 구제안민책을 실시했다는 것을 보면 죄를 씻고 싶은 욕망도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조선의 정종도, 고려의 광종도 개국한 왕들에 이어 왕권을 유지하며 강화하고자 짐을 지은 공통점이 존재하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천추태후의 이야기는 언제 봐도 흥미롭고 재미있다. 드라마 <천추태후>가 방영되기 전에는 나도 잘 모르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목종을 섭정하고 김치양과 사랑에 빠졌으며 김치양과 사이에 낳은 아들을 후계자로 삼으려 헌정왕후와 숙부 왕욱 사이 태어난 대량원군을 제거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고려 사람으로 유교적 이념으로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고려는 남녀를 불문 재산 균분 상속이었으며 부모 봉양 의무도 동일했던 만큼 딸과 아들의 차이가 없는 사회였고 이혼과 재혼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단지 고려 왕실은 족내혼이 기본이었기 때문에 김치양의 신분이 문제가 되는 것일 뿐이었다. 게다가 김치양은 천추태후 근거지인 황주 부근의 동주여서 자기 세력을 키우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 

이 무렵 국경을 수비하던 강조가 정변을 일으켰고 이 때문에 천추태후는 김치양과 두 아들을 모두 잃었으며 권력도 잃고 본거지로 쫓겨난다. 강조의 변에 대한 기록은 처음에 목종이 김치양을 제거하려고 강조를 끌어들였는데 강조가 김치양을 제거하면서 목종까지 폐위하고 대량원군을 현종으로 옹립했다고 되어 있다. 이처럼 천추태후는 강조가 수도로 오는 것을 막으려 했고 목종은 강조가 수도로 들어오길 원했다. 그런데 강조는 목종의 부름을 받고 정변을 일으키면서 김치양을 제거하는 것은 그렇다치고 왜 목종을 폐위하는 것으로 변모했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이 사건도 사료가 불충분해서 정확한 것은 알 수가 없다는 게 안타깝다. 강조의 변은 거란이 고려를 쳐들어오는 데 빌미가 되기도 했고 향후 고려 사회가 호족 시대에서 귀족 시대로 넘어가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었다.

 

거란의 침입은 1차와 2차로 나뉘어진다. 1차 침입 당시 고려는 성종이라는 왕을 중심으로 왕권이 안정되어 있어 서희 같은 명장을 배출할 수 있는 토양이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에 성공하였다(강동 6주 획득). 그런데 제2차 침입 때는 강조가 목종을 시해하고 현종을 왕위에 올리면서 정치 체제가 불안정한 상태였기 때문에 강동 6주가 무너지고 개경이 함락되면서 현종이 몽진까지 하는 상황 속에 패배하고 만다. 

 

이처럼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의 1권은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과 전투에서 승리한 935년부터 거란의 침략으로 위기를 겪게 된 993년의 시기를 담고 있다. 책에는 우리가 역사서에서 배우는 내용도 있지만 잘 모르는 사실들, 오해하고 있는 내용들을 담고 있으며 이를 보충한 역사적 사료와 역사 패널들의 대화를 통해서 공부하는 효과까지 누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