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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국전쟁의 기원 1

category 리뷰/책 2023. 6. 11. 19:18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한 해석을 비롯하여 한국현대사와 관련한 저작들을 내놓은 학자다. 한국전쟁의 기원은 내부적 문제로 인한 갈등 폭발, 미소 등 외부적 세력에 의한 영향, 내부적/외부적 결과의 혼합 등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을 1차적으로는 해방 후 5년 간 일어난 사건들에서, 2차적으로는 남한에 일제강점기 식민 지배구조가 뿌리내린 것이 영향을 주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민위원회의 역할과 그 한계에 중요성을 부여한다.

식민지에서 뿌리 내린 체제에서 비롯된 계급 갈등의 문제(지주와 농민 간, 기업가와 노동자 간)는 내부의 갈등이 뿌리 깊었음을 인지하게 하며 통일 후 지향할 사회의 문제(이념)는 신탁 통치를 기점으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간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일본은 조선을 권위적이고 강제적으로 통치하면서 군림했다. 조선총독부는 한국의 비주류 지배층과 갑자기 부유해진 양반과 지주, 관료들을 포섭하여 민중의 저항을 철저히 통제하였으며 자원을 동원하고 수탈하는 정책을 펼쳤다. 식민지 시기 철도망이 발달하면서 농업이 상업화되고 일본은 제국을 통합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다. 기존의 조선 지주들은 토지 자본을 상업과 산업에 투자하며 배를 불렸고 일부 평민, 천민들은 사업을 통해 기업가로 변신한다. 산업의 중심은 농업에서 공업으로 이동하였고(제조업, 산업, 광업, 상업 중심의 공장이 많았던 북부 지방의 고용이 증가하여 남부의 농민들이 대거 북부로 이동), 노동 계급이 형성되었다. 식민지의 노동 정책은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갈등을 강화하는 기제로 작동하였고 1930년대 이후 일제의 강제 동원이 시작되면서 만주나 일본 등 해외로 노동하러 가는 인구가 늘었다. 해방 이후 북에서 남으로, 만주나 일본에서 귀환한 노동자(농민)들은 자신의 기반인 토지를 잃었다.

1930년 후반까지 일본은 지식인이 통치에 노골적으로 도전하지 않는 한 상당한 자유를 허락했다. 그로 인해 야기된 한국인 내부의 대립은 해방 뒤까지 이어졌다. 1940년대 후반에 나타난 좌우 갈등의 기원은 20년 전에 형성된 것이었다. - P79

식민지를 겪으면서 한국의 수많은 농민은 고향을 떠났다. 그들은 대부분 젊고 가난하고 불만으로 가득했다. 그들은 세계대전이 끝나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도 여전히 젊고 가난하고 불만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완전히 소작농도 노동자도 아닌 그 중간 어디쯤에 있는 존재였다. 그들은 노동자 · 광부·군인으로 일했지만 좀 더 중요한 사실은 고향이 아닌 곳에서 세계에 노출됐다는 것이다. 그들은 사회가 자신이 알던 것과는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이주하기 전까지는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1945년이 됐을 때 그들의 시야는 그렇게 좁지 않았다. 전쟁의 종식은 농민-노동자에게 새로운 출발이었다. 급진적 조직 운동가에게 그것은 새로운 원료를 풍부하게 가져다주었다. - P118~119

식민지 시대와 관련해 기억해야 할 기초적 사실은 일본이 가져온 커다란 변화의 정도가 아니다. 핵심적 측면은 변화가 자연스러운 경로를 따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농민은 토지에서 유리되고 계급으로서 붕괴되었다고 해서 산업에 종사하게 되지는 않았다(이를테면 영국에서 인클로저 운동과 함께 공업 생산이 등장한 것과는 달리). 그 대신 그들은 공장에서 잠시 일한 다음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지주는 상업·산업적 기업가로 변모하지 않고 기업가 정신과 전통 사이의 어떤 지점에서 여러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한국인 관료는 근대적 또는 합리적 관료 제도에서 근무하지 않았고, 이민족이 지배한 체제 안에서 일본인 상관은 물론 같은 민족인 한국인에게도 적대시되면서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 P119

해방 후 조선에 남아 있던 일본인들은 한국인의 보복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조선총독부는 영향력 있는 한국인 인사와 접촉을 하였는데 첫 주자인 송진우는 거절하였고 여운형이 수락하면서 과도적 행정기구 책임자로 국내 치안 임무를 맡게 된다.
여운형은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연합군에 외국의 개입 없이 한국은 즉각 독립할 것과, 친일 세력은 배제해야 함을 전달하였다. 8월 16일 감옥에 있던 정치, 경제범이 석방되자 건국준비위원회는 공산주의자들로 채워지게 된다. 그리고 대중들도 일본과의 협력는 거부했기 때문에 조선총독부의 요구는 설 길을 잃는다. 건국준위위원회(건준)은 전국적으로 지부가 만들어지며 산하 단체까지 조직되고 8월 20일 무렵이 되면 일본은 건준 반대 입장으로 돌아선다. 미국이 9월 초까지 국내에 들어오지 못하는 동안 일본은 남은 물품을 폐기하고 화폐를 마구 찍어냈으며 친일 성향의 한국인에게 은사금을 마구 뿌려대는 등 남한 경제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

8월 28일 건국준비위원회는 치안 유지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부를 수립할 것임을 선언하고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이 수립된다. 그 배경에는 조선의 자주성과 미국의 입김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인공 지도부는 좌우익을 연합한 명단으로 구성되었다.
9월 16일 인공에 반대하며 한국민주당(한민당)이 결성된다. 이들은 주로 대지주, 식민지 시기 각종 혜택을 받은 계층과 지도자급 인물들, 서구에서 유학한 엘리트 계층이 많았다. 한민당의 최대 목표는 식민지 시기 지주/농민 구조와 토지 지배 관계를 존속시키는 것이었다.

루스벨트는 공산주의, 자본주의, 민족주의로 분화된 세력을 포용하고 포괄하고자 노력했다. 1943~1946년에는 미국의 영향력을 유지하며 다국적 신탁통치를 시도했다. 루스벨트는 여러 나라가 참여하는 신탁 통치는 식민지를 겪은 나라가 이전의 식민 지배를 대체하고 미국의 이익에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으면서 식민지는 점진적으로 독립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련이 만주와 한국으로 빠르게 남하하면서 미군의 상륙 날짜는 거듭 앞당겨졌고 소련에게 한국이 넘어갈 것을 우려한 미국에서 국제협력주의가 설 자리는 없게 되었다.

루스벨트의 국제협력주의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의 문제였다. 그의 목표는 전후 세계에서 미국이 주도권을 잡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단은 차이를 만들었고 루스벨트가 사망하면서 힘의 균형은 무력의 사용과 점령, 소련과의 정면대결 그리고 국경선의 명확한 확정과 같은 고전적 일국독점주의 방식을 선호한 인물들에게 기울었다. 신탁통치를 비롯한 그 밖의 국제협력주의적 방법은 점차 고립된 일군의 대외 정책 입안자들이 선호한 방법으로 남았다.
한국의 경우 다국적 방법으로 소련과 반식민적 민족주의를 억제하려던 이런 정책은 포츠담 회담 이후 분주한 시간 동안 폐기되었고 사실상 소련에게 양보했던 한반도로 군대를 급파하는 일방적 정책으로 전환됐다. 그 결과는 한 나라의 분단과 전후 최초의 봉쇄 정책이었다. - P195

맥아더 사령부는 일본과 한국까지 점령하라는 작전 지시 아래 미국 제10군 24군단에 하지를 임명하여 조선으로 보낸다. 한국은 카이로 선언에서 일본 침략의 희생자로 인정되었음에도 하지는 한국이 미국의 적이며 패전국의 규정이 적용될 대상이라 생각하고 행동했다. 한반도에 들어온 하지는 기존 질서를 유지하고 통치 기구를 존속시키라 지시한다. 미군의 목표는 소련의 영향을 받은 외부적 혁명 세력과 국내의 자생적 혁명 새력을 차단할 방어책을 세우는 것이었다. 점령군은 한국의 일부를 물리적으로 점령해 다른 세력이 독점적으로 장악할 수 없도록 만들기를 원했다.

함선들의 도착은 1853년 페리 제독의 "흑선"이 일본에 도착한 것에 견줘질 만큼 한국에 참으로 중요한 상징성을 띠는 사건이었다. 한·미 관계는 일찍이 63년 전 미국을 한국의 후원자로 만든 조미수호조약朝美修好條約이 체결되면서 시작됐다. 이제 그 후원자가 도착했다. 이것은 미국이 인천에 상륙한 두 사건 가운데 첫 번째였으며, (그날부터 거의) 5년 뒤에 일어난 두 번째 상륙에서 또 다른 개선 장군은 승리를 코앞에 둔 북한을 패배로 몰아 넣었다.
오후 1시 상륙을 시작했을 때 미군은 대검을 꽂고 검은 제복을 입은 일본 경찰이 인천 거리에 줄지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날 좀 더 이른 시간에 미군 상륙을 환영하는 시위에서 한국인 두 명이 사살되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분위기는 긴장됐다. 기이하고 "적대적인 상륙은 하지 장군의 몰지각한 발언으로 더욱 악화됐다. 하지는 일본인이 치안 유지에 협력한 데 감사하면서 한 미국인 기자에게 말했다.
부두에서 우리를 환영하려던 한 무리의 한국인에게 일부 일본인이 발포한 것을 포함해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몇 가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나는 상륙작전에 방해가 될까봐 민간인은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또한 한국인과 일본인을 "같은 굴에 사는 고양이"라고 표현한 그의 발언은 널리 인용됐다." 하지는 뜻이 잘못 전달됐다고 주장했고 다른 사람들은 그가 일본인에게 협력한 한국인만 가리킨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그의 발언은 한국인을 분노에 빠뜨렸고 그가 한국인의 열망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 P203~204

처음 하지가 고위 일본인 관료를 유임시킨 것과 관련한 공식 기록은 거의 설명이 없다. 그러나 그런 행동의 원인은 두 가지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1) 맥아더가 일본에서 기존 기구를 이용해 통치하려고 결정하면서 한국의 제24군단 장교들도 비슷한 방향으로 선회했다는 것이다. (2) 미군 진주 이틀 전 선포된 인공이 일본의 철수 이후 권력을 인수할 가능성이었다.
하지가 혼란스러운 상황이라고 말하면서 일본인과 긴밀히 협력하게 된 것은 이런 혁명적 상황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어쨌든 한국인들이 미국의 해방자에게 느낀 깊은 호의는 조금씩 침식되기 시작했다. - P206

1945년 미군정은 임정 관련 인물들이 미국의 정책에 도움이 되는 대중적 지지와 정통성을 지녔다 생각했다(미 국무부는 임정을 비롯한 한국인 단체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했다). 미군정은 정치 단체 협의회를 군정 내 한국 정부를 구성하고 정무 위원회를 조직할 것을 기획하였다. 정무 위원회는 과도 정부로 기능하고 미군 사령관은 거부권, 미국인 감독 및 고문의 지명권을 갖는다는 생각이었다. 1945년 10월 16일 이승만이 귀국하고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조직하여 좌우익 결집을 시도한다. 그는 소련과 소련의 북한 정책을 비난하였고 인공 참여 요청을 거부하였다. 이에 여운형과 박헌영 같은 좌익 계열은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탈퇴한다. 여운형은 11월 11일 인민당을 결성하고 이전의 인공보다 좀 더 온건한 세력을 흡수하여 조직을 구성하였다. 중국에서 임정 세력이 귀국하자 자체 정부를 세울 것이라는 소문에 인공 대표자들은 위협을 느꼈고 이에 인공대표자들은 군정 지지를 표명하였다. 하지만 하지는 인공을 비판하고 심지어 그들의 활동을 불법적으로 규정한다. 이 때부터 하지는 인공, 전평 등 좌익 세력을 적극적으로 탄압했다.

미군정은 기존 토지 관계가 유지되길 바라는 한국인과 결탁하여 미곡 경제 법령을 발표하고 미곡을 자유롭게 사고 팔 수 있는 시장을 설치하는 정책을 펼치지만 이것은 미곡 유통 구조를 미군정이 장악하려는 시도로 대중의 반발만 불러오며 처참한 실패로 끝이 난다.

자유 시장 정책의 실패를 회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옛 미곡 공출제도를 다시 시행해 "사실상 일제의 제도를 재건하는 것"이었다. 군정은 먼저 총독부 산하의 조직과 여러 반관적 기구를 부활시켰다" 거기에는 조선식량영단朝鮮營團·동양척식회사(동척) ·조선수입품통제회사와 그 밖의 운송·유류·석탄 관련 독점 기업이 포함돼 있었다. 이 회사의 이름은 조선생활필수품영단·신한공사·조선물자회사 등으로 바뀌었지만일본인에게 고용됐던 한국인은 모두 그대로 근무했다. - P280

1945년 12월 16일부터 모스크바 삼상 회의가 열렸다. 4대 강국이 한국에 5년 이내의 신탁 통치를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핵심은 신탁 통치 이전에 과도 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내에는 우익의 반대, 이후 좌익이 찬성하며 극심한 대결 끝에 혼란을 불러온다. 송진우는 저격으로 암살되었고 김구는 파업과 시위를 이끌며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이후 국내에서 핵심 입지를 잃음)하면서 반탁운동의 중심은 이승만과 한민당으로 넘어간다. 또한 임정과 인공의 연합 노력은 좌익이 모스크바 협상 지지 입장으로 변화하자 중단되었다.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과는 전시에 구상한 미국 계획의 순서를 뒤바꾼 타협이었다. 한국 정부는 신탁통치 이후가 아니라 이전에 수립될 것이었다.
실제로는 그것은 자치를 위한 신탁통치 협정이거나 한국인들에게는 후견이 필수적임을 확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협정은 오직 미국과 소련의 협력만이 한국의 통일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인정했다. 모든 것은 협정이 어떻게 시행되고 그것이 한국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지에 달려 있었다. 미국과 소련이 신중하게 협력하고 협정을 엄격하게 실천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 P296~297

미군정은 1946년 1월 남북한 모두 인민위원회를 해체하고 대표민주위원을 한국 과도정부의 모체로 내세운다. 과도 정부 수립을 위해 다양한 한국 정치 단체들에게 주요 민주 개혁을 포함해 신정부가 추진할 정책을 합의하도록 촉구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미군정은 우익을 우선적으로 확보하는 것에 목표를 두었다. 실제로 28명의 정무위원 중 4명만 좌익이고 나머지는 모두 우익이 차지했다. 이 무렵 조선공산당과 임정의 좌익 계열을 아우른 민주주의민족전선이결성된다. 민주주의민족전선은 인공의 직접적 계승자임을 자처했다.

미국은 정부 형태와 관계 없이 한국의 조속한 독립과 자치를 추진하고 소련과 협력해 미소양군 점령을 종결시키겠다 공표한다. 미소공동위원회 협상이 그렇게 시작되었으나 과도 정부 수립을 한국의 어떤 단체와 논의할 지 합의하지 못하여 무기한 중단된다. 미국은 대표민주의원을 남한의 유일한 자문기구로 사용 제안했으나 소련은 모스크바 협정에 반대하는 정당이나 단체와는 협의할 수 없다며 반대하였다. 공위의 핵심 쟁점은 소련이 지지하는 형태의 정부(인민위원회와 관련된 조직)가 남북한 모두에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미군정은 1946년 2월 정당등록법을 공포하여 좌익 색출 단체를 해체하려 했고, 1946년 3월에는 군정을 공격하는 행위에 대한 처벌을 규정하였으며, 1946년 5월이 되면 전국의 경찰을 이용하여 좌익을 전면적으로 공격하는 전권을 부여한다.

하지는 레너드 버치 중위에게 온건파를 포함하되 극좌, 극우 세력을 배제하는 중도파 합작 형성을 목표로 좌우합작을 추진한다. 하지만 여운형과 박헌영이 좌익 주도권을 놓고 갈등하였고 과도입법의원이 대표기구로 수립되었으나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하지를 비롯한 미국인들은 마침내 같은 시각을 갖게 됐다. 1947년 하지는 웨더마이어 장군에게 합작 정부는 곧 "공산주의 정부로 갈 것"이라는 견해를 말했다. 하지는 "소련과 국지적 협상을 끝내고 공산주의자를 여기(남한)서 몰아낼 것"을 제안했다. 11월 미소위 미국 대표단은 합작위원회의 온건 좌파는 "사령관이 정치 문제를 협상할 수 있는 믿을 만한 좌익 정치 세력"을 대표한다면서 하지와 약간 다른 견해를 보였다. 하지의 견해가 우세한 이상 온건 좌파를 포섭하려는 정치적 노력은 모두 덧없었다. 버치는 지혜롭고 열정적으로 합작을 추구했지만 상관의 도움이 부족했다. 게다가 중도파에 힘을 실어주면 좌익과 우익을 이끌 수 있을 거라고 한국 정치 지형을 판단했던 그의 견해는 틀렸다. 중도파는 기반이 없었지만 좌익은 강력한 조직과 대중적 지지를 받았고 우익은 부유층과 관료 기구에 의지했다. - P342~343

한국은 산업화되면서 근대성과 후진성의 중간지점에 위치하게 됐고, 국내 시설은 자국이 필요로 하는 것을 상당히 넘어서는 수준까지 발전했지만 자국보다는 일본의 이익에 봉사했다. 정치적으로 불안한 시대에 나타나는 급진적 활동에서 그런 시설은 두 방향으로 사용된다. 반란 세력이 장악한다면 그것은 신속한 소통을 가능케 하지만, 질서를 유지하려는 세력이 장악하면 반란 세력을 저지하는 강력한 수단이 된다. 이처럼 해방된 남한에서 인민위원회는 가장 발달한 지역과 가장 낙후한 지역 모두에서 강력한 위상을 확보하는 역설이 나타났다. 그러나 경찰을 비롯한 치안 기관은 이런 시설을 장악해 유용하게 썼다. 이것은 그들이 한국을 안정화하는 데 성공한 결정적 요인이었으며, 1945~1950년 남한의 비교적 고립된 지역에서만 강력한 반란이 펼쳐진 핵심적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 P369

인민위원회는 자생적이었고, 다양한 계급 구성원(지방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자, 학생과 제대한 군인, 지방의 명망가와 지주, 일제강점기 관료)이었기 때문에 지역 마다 정치 참여 수준과 토지 상황, 지리적 위치, 인구 이동, 근대화 정도에 따라 양상이 달랐다. 거기에 일본에서 미국의 통치로 넘어가는 기간도 그 결과를 다르게 하는 조건이 되었다. 조직 구조가 알려진 지방 인민위원회는 대부분 중앙의 건준과 인공과 비슷한 부서로 이루어졌고 조직부, 선전부, 치안부, 식량부, 재정부가 있었다.

한국에서 미국인은 도 단위에서 잘 기능하고 있는 기존 정치 조직을 체계적으로 무너뜨린 뒤 그것을 대체할 지방 정치 조직이 발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한국의 보수 세력이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을 미국인이 대신 해줄 수는 없었다. 따라서 문제는 미국이 자립할 수 있는 조직을 발전시키거나 촉진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런 임무를 감당할 수 없는 정치집단을 지원하기로 한 편협한 결정이었다. - P389

1946년 가을 인민위원회가 장악한 전국에 농민 봉기가 발생한다. 봉기는 경상도에 집중되었으며 인민위원회가 강력하거나 지배한 전라남도, 충청남도, 강원도 군에서도 발생했다. 봉기가 경상도에 집중된 것은 해방 뒤 이 곳에 인민위원회가 존재했으며 토지를 잃고 불만에 찬 농민들이 모여들면서 일어났다.
1946년 9월 23일 부산 철도 노동자 파업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남한 전체의 철도 수송이 멈춘다. 나중에는 인쇄공, 전기 노동자, 전보국, 우체국 직원 등으로 확산되면서 전국적인 총파업이 벌어진다. 여기에 학생들도 참여하여 파급력이 커졌다. 이들은 쌀 배급량을 늘리고 임금을 올리며 실직자와 피난민들에게 집과 쌀을 배급할 것, 공장 노동자들에게 작업 환경을 개선할 것, 조직 결성의 자유를 요구하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민위원회에 권력을 이양하라는 요구였다. 군정청은 북한 공산주의자가 혼란을 부추긴다며 비판하였고 현재 한국인은 자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미군정은 시위자 검거를 실시하고 파업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요구를 거부하면 즉시 해고하고 쌀 배급을 중단하겠다 엄포를 놓는다.
9월 말 대구에서 많은 공장과 기업에서 파업이 발생하고 3천 명의 노동자가 참여하면서 전국으로 파업이 확산되며 격렬해진다. 이 과정에서 진압자는 발포를 하고 시위자는 지방의 공무원과 경찰을 살해, 관공서 건물을 불태우는 등 과격해진다. 군정은 농민 봉기 진압에 경찰을 활용하였고 무자비한 탄압으로 대응했다. 파업과 봉기는 미군정의 곡가 정책으로 1946년 하반기 곡물가의 폭등, 통화 팽창, 실업이 불러온 결과였다.

한국의 좌익 지도자들은 1946년 가을 분출된 인간의 놀라운 힘을 지휘하고 일정한 방향으로 인도하려 했다. 격렬한 농민 봉기를 유발한 그들의 역할에는 여러 의견이 있겠지만, 농민의 거친 힘을 조직화된 정치로 이끌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남한에는 그들이 후퇴할 수 있는 안전 지역이 거의 없었다. 거기에는 베트남처럼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중부 고지대가 없었다. 거기에는 중국 옌안처럼 전국을 지배한 정권과 경쟁할 수 있는 근거지도 없었다. 그리고 농민을 조직으로 편입시켜 그들에게 이익과 지위, 적을 방어하는 핵심 요소를 제공하는 과정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시간도 부족했다. 한편으로 남한의 좌익과 공산주의자는 대중을 조직하는 데 경험이 부족한 지도자들의 실패를 계속 보여줬다. 그 결과 그들은 그저 자신들만 조직했을 뿐이다. 즉 그들은 한 파벌에서 다른 파벌로 분화했으며 서울에 지나치게 힘을 집중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우세한 통신・교통을 비롯한 그 밖의 물리적 수단을 갖고 농민을 철저하게 탄압하는 훈련을 받은 관료 기구와 마주쳤다. 이런 기구는 1946년 가을 동안 수많은 사건에서 미군의 지원을 받았는데, 공산주의자와 좌익 조직자의 실패만큼이나 진압을 성공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봉기 이후 한국 농민의 가장 큰 손실은 그들의 이익을 보호해준 지방 조직이 사실상 소멸됐다는 사실이다. 남한 전역에서 대부분의 인민위원회와농민조합이 사라졌다. 전국과 지방의 중요한 좌익 조직의 지도자들은 죽거나 투옥되거나 체포되거나 은신했다. 그들의 지지자 수천 명은 정치적으로온건해지거나 매우 급진화됐다. 모든 좌익이 연합해야 한다는 민전의 정확한 주장은 산산이 부서졌으며, 대중적 기반의 큰 상실과 좀 더 과격하고 수용의 폭이 좁은 조직인 남조선노동당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적어도 농민에게 합리적 선택은 평온한 농촌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 P485~486

소련은 1945년 9월 북한 내부를 어느 정도 파악한 후 기존에 이미 설치되어 있던 지방 인민위원회를 이용해 식민지 유산을 재편하기 시작했다. 북한은 고위층인 친일 인사들이 대부분 남쪽으로 피신하는 등 지주, 식민지 시대 관료, 경찰의 활동이 힘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피를 흘리지 않은 채 혁명이 신속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북한 지도부는 중앙과 지방의 요구를 결합, 중앙집권적 통제 방식과 대중 노선을 혼합한 방식을 추구하려 했다. 김일성은 지도자, 조직, 대중 노선을 내세우며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세움으로써 중앙적 조직의 기반을 마련한다.

많은 한국인이 보기에 소련은 점령 초기 미국이 추구한 것과 완전히 상반된 정책을 따랐다(또는 한국인에게 그러도록 허용했다)고 말하는 것이 공정하다. 의도된 것이든 그저 인민위원회가 편리했건 간에 소련은 한국인에게재량권을 주고 뒤로 물러났다. 조지 매큔은 "불길하지만 확고한 권위를 가진" 지위라고 적절히 표현했다. 앞으로 보듯 소련이 평양의 최고사령부에관심을 두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 그들은 실질적 통치권을 한국인에게 주었다. 미국 정보기관은 1945년 12월 그런 정책이 "제한적 점령"을 나타낸다고 지적하면서 "중앙정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고 보고했다. 이처럼 해방 뒤 몇 달 동안 북한에서는, 미국 공식 자료가 마지못해 인정한 대로, "대부분 노동자와 농민 출신으로 구성된 완전히 새로운 지배층이 식민지 시대의 심연에서 등장했다. 식민지 시대의 계급 구조는 완전히 역전됐다. 미국의 일상적인 속어로 표현하면 "개자식들이 쫓겨난the bastardswere thrown out" 것이다. 물론 남한의 미국이 보기에는 새로운 개자식이 들어왔다. - P504

북한 지도부는 중국과 소련 혁명을 모두 경험했으며 해방된 한국에서 자발적 농민 봉기가 시작돼 자신들의 눈앞에서 터져 나올 것 같은 상황과 마주쳤다. 그 결과 이런 지도부와 그 정책은 중앙과 주변의 요구를 결합하고 스탈린의 상명하달 방식과 마오쩌둥의 대중노선을 혼합한 이념을 구현해야 했다. "간부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스탈린주의의 핵심 구호는 "대중에서 대중으로"라는 마오쩌둥주의의 핵심 구호와 나란히 놓였다. - P505

북한은 빈농과 노동자들 중심의 농촌위원회를 조직하면서 중앙에서 마을 밑바닥까지 하나의 유기적 명령 체제를 완성하였고 무엇보다 토지 개혁을 추진함으로써 이전의 지주는 소규모 토지를 받고 다른 지방으로 이주하게 함으로써 지주 제도를 뿌리 뽑고 하층 농민들은 자신의 토지를 갖게 함으로써 정권에 호응도를 높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8시간 노동제, 사회 보험 제도 실시, 노동 조건 개선, 성별에 상관 없이 같은 노동에는 같은 임금을 지급, 남녀 평등법을 제정, 일본인 소유의 공장과 기업은 국유화, 중소기업은 도군 인민위원회 관할 아래 투자와 생산활동을 하도록 장려하면서 사회 전반적인 개혁을 이루어낸다.
1946년 8월 29일 북로당이 결성되면서 북한의 내부 당파를 통합하게 됨으로써 북한은 남한과 명확히 다른 노선의 체제가 만들어지게 된다.

해방 뒤 첫해 한국의 북반부에서는 대부분의 한국인과 여러 서구 관찰자가 일제 지배가 끝난 뒤 필연적으로 나타날 결과라고 생각한 것을 달성했다. 해방 뒤 9개월 만에 지주 제도가 사라지고 토지는 다시 분배됐으며 주요 산업이 국유화되고 완전히 왜곡되었던 식민지식 공장 시스템을 뿌리 뽑았으며 남녀평등을 확립하는 급진적 개혁이 이뤄졌다. 해방 뒤 1년 만에 수십만 명의 한국인을 아우른 강력한 대중정당과 초보적인 군대가 조직돼 오랫동안 한국 정치에 없었던 통일성을 부여했다. 1946년 말 북한에서도 남한과 마찬가지로 분단 국가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해 1948년 9월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북한 공산주의와 연결된 대부분의 특징도 이 시기에 나타났다. 민족주의의 강조, 지도자의 절대적 역할 중시, 포괄적 통일전선 그리고 민족적 색채가 짙은 한국 공산주의의 특유한 수단이 된 사회주의와 주체사상의 이념적 혼합이었다. 모두 가차 없이 이뤄진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최소한의 유혈만으로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이뤄졌다. 달리 말하면 북한은 일제의 식민 지배가 남겨놓은 영향에서 예상할 수 있는 "일반적" 경로를 따랐다. - P489

일제강점기 지배층과 통치 구조를 남한이 이식되지 않았다면, 하지가 버치 중위를 끌어들여 주도한 좌우합작이 성공했다면 한국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곱씹어볼수록 해방 이전의 식민지 지배층이 통치권력으로 이양되었던 것이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물론 미군정의 헛다리와 판단 미스도 많은 영향을 끼쳤음을 부인할 수 없다. 자생적인 조직이었던 인민위원회를 인정하고 잘 활용했다면 어땠을까. 1945년 8월부터 12월의 5개월이 역시 뼈아픈 듯 싶다. 이 때 이식된 결정들이 향후 바꾸어보려고 여러 시도를 하지만 잘 이루어지지 못했고 안착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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