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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국전쟁의 기원 2-1

category 리뷰/책 2023. 6. 27. 14:06
외부 세계는 추상적이기도 하고 국내의 위기를 불러오는 사건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실제로 그 사건들은 권력을 둘러싸고 국내에서 벌어지는 투쟁에 이용된다. 외부의 위기는 이해하기 어려운 지구 전체의 적과 전면적 대결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한 패권국이 중요하지 않은 여러 주변부에 이처럼 관심을 쏟고 집착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세계는 대체로 국내에는 존재하지 않는 거친 현실과 갈등의 원천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위기를 유발하지는 않지만, 국내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재료를 폭발시킨다. 그리고 폭발이 일어난 뒤 "외교정책의 전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국내에서 전개된 갈등의 결과이며,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은 기본적으로 추상적 형태로 남아 있다. 또한 외국에서 위기가 발생하면 한 나라 안의 권력 균형은 행정부 쪽으로 기울며, 행정부는 그 위기를 이용해 적을 제압할 수 있는 잠재적 힘을 갖게 된다. - P52
 
한국전쟁 발발 73주년이 되었다. 세월이 이리 많이 흘렀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 체제에 종속되어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미국과의 종속도 그렇고 일본은 한국 전쟁으로 큰 이익을 얻었으며 중국과 타이완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하여 여러 설들이 존재했다. 어떤 가설도 완전한 진실은 없다고 생각하며 추측성이 존재한다 여긴다. 다만 더 가능성이 높은 설이 무엇이냐를 두고 셈할 뿐이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이 내전이자 혁명전쟁이었다고 해석한다.
 
나는 '반공 세대'는 아니었고 그 끝 무렵, 그리고 이제 더는 통일이라는 것이 요원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할 무렵에 걸쳐 있는 세대인 듯하다. 교련 수업을 고등학교 때 받으면서도 이걸 왜 받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통일이 막연해도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가졌던 것 같다. 이제 한반도의 평화를 바랄 뿐 한 체제, 한 국가로의 통일은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외국을 나가듯 북한을 안전하게 여행갈 수 있다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질 뿐이다. 죽기 전에 가능이나 할런지...
 
한국전쟁의 기원 2권은 총 2권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2권의 내용은 앞선 1권과는 성격이 다르다. 1권은 한반도 내부에 포커싱을 맞추어 전쟁의 기원을 살펴보았다면 2권은 마치 조감도로 외부에서 한반도를 전체적으로 조망한다는 성격이 엿보인다. 첫 번째 권은 총 2부로 1부는 미국에 초점을 맞추어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 이후 미국을 둘러싼 세계와 미국의 외교적 변화를 살펴본다. 2부는 한국 내부의 상황을 살펴보되 외국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되어 있다. 그래서 1권과 2권의 내용을 모두 살펴보아야 비로소 의미가 있을 것이다.
 
1947년은 어떤 해였는가. 이 시기 트루먼 독트린이 실시되면서 한반도 뿐 아니라 일본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이는 1950년 초반까지 그 흐름이 이어진다.
모스크바 3상회의 후 한반도의 신탁 통치 논의를 두고 여러 차례 열린 미소공동위원회는 결렬되었고 이 무렵에는 남한과 북한의 체제가 이미 독자적인 체제를 갖추었다. 하지만 미군정의 영향이 여전하던 남한에서 미국의 힘은 막강했을 것이므로 미국의 정치 지형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할 것이다(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미 외교정책은 1947년 전후부터 1951년 사이에 크게 변화한다. 미 외교가에는 크게 세 집단이 존재했는데 첫 번째는 '국제협력주의(제국주의)'다. 이는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을 세계에 적용한 것으로 세계시장 체제를 규제 관리하고, 문호 개방 정책 또는 "광대한 지역" 정책에 규제를 가미한 것이며, 자유무역과 경제 성장에 반드시 필요한 개방성을 추진하고 장벽을 제거하며, 경제 침체와 다루기 힘든 나라들을 길들이는 데 필요한 규제를 두는 것이다. 두 번째는 '봉쇄'다. 국제협력주의와 민족주의가 타협한 것으로, 자본주의 지역에서 자유무역과 개방된 체제, 세계경제의 동력으로 일본과 서독의 부흥을 꾀하고, 방어벽을 세워 지상군과 관료기구를 통해 통제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반격 '으로  국제협력주의에 반대하고 봉쇄에도 불만을 가진 세력으로 반공 기치를 내세우고 군사 부문을 강화하는 것이다.
1943년부터 1947년 이전까지는 한반도에 다국적 신탁통치를 기치로 한 '국제협력주의' 외교가 시행되었다. 하지만 신탁통치는 한국인에게 인기가 없었다. 1947년 이후 1949년 주한 미군이 철수할 때까지 봉쇄 정책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1949년 중국의 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하고 타이완의 안보에 위기가 드리운데다 한국전쟁 발발 후 가을 무렵이 되면 미 외교는 반격 정책으로 돌아선다.
 
트루먼 정부에 대표 중요 인물 중 딘 에치슨은 누구인가. 그는 트루먼독트린과 마셜 플랜의 핵심 인물이었고 1947년부터 1950년까지 한국 정책을 전반적으로 설계하였다. 그는 군부와 의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하도록 만들었다. 미 점령군의 봉쇄는 애치슨의 구상에 영향을 주었고 1947년 이후 남한이 트루먼독트린에 사실상 포함되게 만들었다.
에치슨에 대한 뛰어난 묘사에서 I. F. 스톤은 1952년 "미국에서는 공직자가 역사와 인류에 품위 있는 동정적인 시각을 가진 것은 아닐까라고 추측하는 것보다 위험한 것은 없다"라고 썼는데, 애치슨은 바로 그런 시각을 갖고 있었다. 
냉전의 열기로 뒤틀린 미국의 시각에서 볼 때만 애치슨은 실제의 그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보일 수 있었다. 거칠고 거만한 표현을 쓰자면 그는 "개명한 보수주의자"로 보였다. 전전戰前 애치슨이 재무부 관료로 워싱턴에 처음 나타나자 뉴딜 정책 지지자들이 그를 "모건사에서 파견된 사람", 월가에서 보낸 트로이의 목마, 거대 은행들이 침투시킨 첩자라고 비난했다는 사실을 매카시즘이 휩쓸 때 누가 기억할 수 있겠는가?
봉쇄 정책은 미국 영국 서유럽 일본은 지키되 산업적으로 낙후되고 공격에 취약한 지역, 특히 미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부패한 아시아의 국지전이나 혁명에는 신경 쓰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에치슨을 비롯한 미 관료들은 아시아 대륙의 여러 지역을 일본의 부흥과 연결시키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일본은 경제적으로도 중요했지만 주변국에 전쟁이나 비상 사태가 발생했을 때 일본의 군사력을 제한적으로 증강하는 것이 고려되었다.
 
1949년 후반 트루먼과 맥아더는 충돌한다. 미 국내에는 매카시즘의 광풍이 불었고 개인과 사회는 서로 대립했으며, 정치, 경제와 세계에서 미국이 세계에서 가져가야할 역할이 무엇인가 갈등은 폭발하였다. 고립주의자이자 반격 세력은 아시아가 유럽보다 덜 중요하고 통제하기 어렵지만 개방되어 있어 이익을 낼 수 있는 곳으로 보았다. 팽창주의자는 아시아 중 중국에 주목했다. 이 중 반격 정책을 지지한 맥아더는 누구인가.
맥아더는 아시아를 새로운 국경으로 봤다. 그는 한국전쟁 이전에는 극동에서 반격 구상을 추진하는 데 상당히 소극적이었으나 그의 지지자는 대부분 우파 고립주의자들이었다. 그는 태평양 전쟁에서 1951년 한국 전쟁의 책임을 지고 사령부를 떠날 때까지 한국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장제스는 미국의 원조를 간절히 바랐다. 중국의 거대 재벌과 국민당 인사들은 깊은 교류 관계가 있었고 중국 로비를 위해 상당한 액수가 미국에 들어갔다.
하지만 조지 매카시는 다음과 같은 사람들을 이용하여 매카시즘 광풍을 만들어냈다. 그는 성(동성애), 공산주의를 증오의 뿌리로 매도했으나 사실은 미국의 뿌리에 존재하는 미국의 정치였다. 적색공포가 외면으로 표출되었을 뿐 잠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두메산골과 빈민가, 서부의 소박한 개신교적 정신(좌익은 대중 영합주의적 진보적이며 우익은 무지함)과 동부의 남보스턴 정신을 민족주의와 결합했다. 비유하자면 후자는 아직 발굴되지 않은 지하 묘지로, 동부 상류상회의 두 영역(자유주의자와 월가)에 있는 경박하고 건망증 심한 유력자들에게 오랫동안 불만을 품어왔다. - P178
중국의 공산화, 미국 내 팽창주의자에 반하여 미국 내 공산 세력은 좌불안석할 수밖에 없었으며 공화당을 지지하는 주요 언론 기업주도 매카시에 협조했다.
매카시는 1950년 3월 13일 오언 래티모어를 공격한 뒤 3월 21일 "소련의 간첩 두목"을 적발했다고 말하며 그를 지목했다. 표면적으로는 래티모어를 말했으나 궁극적 목표는 애치슨이었다. 트루먼을 제외하면 그 무렵 장개석은 공산 세력의 침략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기댈 자가 미국 내에 없었다. 5월 매카시는 한국 정책과 관련하여 "애치슨-래티모어 추축"을 공격하면서 애치슨을 쫓아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당시 남한 체제의 권력 핵심층은 부를 가진 우익 세력이었고 이들은 경찰은 물론 군정 사령부, 일선 현장 대부분에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남한 자체로 안정을 바랐으나 일반 대중들은 통일에 관심을 두었고 분단 정책을 결코 지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1947년 이후 수많은 청년 단체를 비롯하여 광신적 우익 대중 기반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이승만과 이범석은 파시즘화한 한국 정치를 이끌었다.
우익 단체는 조선민족청년단, 서북청년회, 대동청년단, 광복청년회, 이승만의 대한독촉청년총연맹 등이 있었고 조선민족청년단이 미군정이 자금줄을 댄 공식 기관이었다. 청년 단체를 조종한 것은 이승만, 이범석, 조병옥, 장택상 같은 우익 인사들이었고 경찰은 우익 청년들을 후원하며 그들의 도움을 받았으며 좌익의 탄압과 색출에 적극 활용했다.
이승만은 미국인이나 미국에서 여러 해를 보낸 측근 인사들을 이용했다. 그리고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친일파들을 기용하고 그들에게 로비 자금을 받으면서 면죄부를 주었다.
 
1947년 제주 4.3이 발생하고 1948년 여순 사건이 발생하면서 남한 정부는 빨갱이 색출에 혈안이 되어 경찰과 청년 단체들을 동원해 이들을 색출하였다. 이후 이승만은 북한을 "괴뢰"라 명칭하라 지시하고 국회에서는 "국가보안법"이 통과되었으며 공식적인 좌익 활동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제주 4.3과 여순 사건은 유격대 활동에 영향을 끼쳤고 제주와 전라도 중심이던 지역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유격대는 "인민위원회"를 재건하는 것이 목표였고 `촌락을 공격하고 주요 시설을 파괴하는 활동을 벌였다.
유격대 관련 사건은 1949년 4월부터 10월까지 증가하다가 11월부터 점차 감소하였다. 미국은 다른 어느 곳보다 전라남도가 남한에서 가장 좌익적인 도라고 판단했는데 이는 빨치산 활동이 지리산에 집중되었던 이유도 있을 것 같다. 전라남도 유격대는 1950년 초 대규모 토벌 작전이 이루어지면서 지하로 숨거나 더 이상 활동하기 어렵게 되었다.
1950년에는 유격대 주요 활동지는 경상북도였다. 우거진 지형 덕분에 은신이 쉬워서 경찰들도 많은 애를 먹었던 모양이다. 전라도와 경상도 이외에서 유격대는 강원도와 충청도 영동군 정도에서 활동이 있었다.
 
북한은 인민위원회를 기반한 정부를 구성하고 인구의 12~14퍼센트(성인 인구의 1/4 이상)를 포괄하는 대중 정당인 로동당을 만들면서 김일성에 대한 충성 지지층을 확보한다. 북한은 빈농을 포용하여 프롤레타리아로 개조시켰는데 이들이 군 단위의 공무원이나 장교도 꿈꿀 수 있게 함으로써 김일성의 정치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대중적 기반을 만들었다. 당의 지도부는 항일 유격 투쟁에 활약을 했던 이들로 채워졌다.
1947~1948년 소련과 북한의 전략적 이익은 일치했다. 이 시기의 시작부터 중국 국민정부군은 만주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장제스와 이승만은 거슬리는 뾰루지를 짜듯 북한을 압박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1948~1949년 중공군과 북한군이 국민정부군을 동북 지역에서 몰아내면서 이제 짜낼 뾰루지처럼 보인 것은 남한이었다. 스탈린은 그것을 대단히 복잡한 심정으로 바라봤을 것인데, 현지 정권을 간접적으로 통제하는 것 외에는 어떤 시도도 할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 P476
1949년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한 것은 북한 외교 정책에도 변화가 있었다. 그 전까지는 소련에 의존해야 했다면 이제는 중국의 전쟁에 한 몫을 거들어 승리를 거둔 것으로 사회주의 동맹을 얻은 셈이었다. 1948년 봄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불가리아 루마니아는 외부의 공격이 있을 때 서로 방어해준다는 내용의 협정을 소련과 체결했고 1950년 중소 간에도 이런 협정이 맺어졌다. 반면 1949년 3월 김일성은 경제, 문화, 군사 협정을 맺고 돌아왔으나 소련에 유리한 조건의 거래가 이루어졌다.
북한은 만주에서 일본 및 중국 국민당에 맞서 함께 싸웠기 때문에 중국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중국은 한국이 중국의 경세론과 문화를 모방하고 중국의 적에게 영토 점령을 허용하지 않는 한 한국의 문화적 정치적 자율성을 인정하는 "선의의 무시"를 해왔다.
 
2-2권은 1950년 이후 전쟁의 서막과 종막을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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