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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category 리뷰/책 2023. 4. 25. 13:54
그때 우연은, 그 안에서 우리 삶을 구성하기 위한 조직과 노력의 효시 같은 걸 우리가 식별할 수 있기에 아름답게만 보인다. 우연은 마치 우리가 몇몇 이미지들을 소유하도록 예정되었다는 듯이, 이런 이미지들의 소유를 쉽게 하고, 불가피하게 만들고, 또 때로는 기억하는 걸 멈출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그런 정지의 순간 후에 잔인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런 우연이 없었다면 처음부터 우리는 다른 수많은 것들과 마찬가지로 그 이미지들을 쉽게 망각했을 것이다. - P306~307
 
3권 이야기의 중심 인물이 베르고트와 질베르트였다면, 4권의 중심 인물은 엘스티르와 알베르틴이다. 두 사람 다 발베크에서 만났으며 엘스티르는 화가, 알베르틴은 화자의 마음을 훔친 사람이다.
 
엘스티르는 화가이므로 창조가이다.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라는 것, 그게 화자에게도 매력적으로 다가갔을 것 같다. 그림도 글도 작업하기까지 분투하는 과정이 있고 결과물이 나오면 끝이다. 끝이라는 것은 생각했던 대로 나오지 않았다고 해도 내 손을 떠났다는 의미다. 내가 살구를 그림으로 표현했는데 살구 비슷한 다른 과일이 된 것처럼, 아니면 꿈틀거리는 파도를 그렸는데 그 느낌이 덜 살게 나왔다거나.
알베르틴은 어떤 사람인지 사실 정확하게 모르겠다. 화자에게 관심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나도 좀 당황한 결말이었다(소설이라 결과는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 직접 읽어보시길). 어쨌든 화자는 그를 자유로운 사람으로 생각했음이 분명한 것 같은데 이게 끝이 아닐 거라 생각한다. 프루스트의 작품은 후에도 계속 인물이 등장하고 연쇄 반응처럼 작용하기도 하니까.
 
엘스티르의 아틀리에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일종의 실험실 같아 보였고, 그곳에서 그는 모든 방향으로 놓인 다양한 직사각형 캔버스 위에 우리가 보는 것은 모두 혼돈으로부터 꺼내어, 이쪽에는 모래사장 위에 라일락 빛 물거품을 터뜨리는 노기 띤 파도를, 저쪽에는 갑판 위에 팔꿈치를 괸 흰색 리넨 양복을 입은 젊은 남자를 그려 넣었다. 젊은이의 윗도리와 부서지는 파도는, 이제는 아무도 입지 못하며 더 이상 아무것도 적시지 못한다는, 다시 말해 그것이 가졌다고 여겨지는 속성으로부터 벗어났지만 계속 존재한다는 사실로 인해 새로운 품격을 획득했다. - P322
 
3권에 이어 화자의 꿈과 이상을 인물과 사건을 통해 은유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소년기와 청년기의 화자의 모습을 따라가며 독자도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게 하는 마법을 느낄 수가 있다.
3권에서는 문학과 연극에 주목한다면 4권은 이미지, 그러니까 미술과 사진에 집중한다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림과 친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방문지를 가건 예술과 관련된 곳을 찾는다. 그 지역의 문화가 집약되어 있는 곳은 역시 박물관, 미술관만한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이는 내가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비록 많은 곳을 가보지는 못했지만 직접 가본 곳은 잔상에 오래 남아서인지 후에 이미지 검색을 할 때 익숙하면 그 때의 기억이 스치면서 흐뭇해지곤 한다.
 
4권을 읽으며 핵심적으로 떠오른 이미지 두 가지는 모네의 <해돋이>와 터너의 <카르케튀트> 항구였다. 두 사람의 그림 기법은 정말 다르다. 모네가 인상파의 대표 화가로 점묘법 등의 기법으로 몽환적인 느낌을 준다면 터너의 그림은 세밀하고 사실적이다.
 
화자는 할머니와 함께 발베크에 가기로 한다. 이동 수단은 기차다. 당시의 기차는 역시 혁명적인 운송 수단이였다. 증기를 내뿜고 힘찬 소리를 내뿜으며 빠르게 앞을 향해 달려가는 기차는 도시 이곳 저곳을 빠르게 이어주었고 마차나 배로 몇 날 며칠을 가야 하던 시절에 비교하면 빠르게 변화하는 미래를 느끼게 했을 것 같다. 물론 이는 거의 정확한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시계가 등장했다는 것과도 연관이 된다.
 

 

 
둘은 기차를 타고 가면서 해돋이를 본다. 해돋이를 보면서 빛과 시간에 따라 순간적으로 변화하는 사물들을 그림 같이 묘사한다. 마치 모네가 그린 해돋이처럼 선연히 번지는 붉은 태양이 그려졌다.
 

 

나는 창문에 눈을 붙이면서, 마치 빛깔 자체가 자연의 심오한 삶과 관계된다는 듯 더 잘 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선로가 방향을 바꾸면서 기차도 방향을 틀었고, 그러자 아침 경치는 창틀 안에서 달빛 비치는 푸른빛 지붕이 있는 밤의 마을로, 온갖 별이 뿌려진하늘 아래 어둠의 유백색 진주 빛 때가 낀 빨래터 있는 밤의 마을로 바뀌었다. 내가 분홍빛 하늘의 띠를 잃어버리고 슬퍼했을때, 그 띠는 다시 반대편 차창을 통해 그러나 이번에는 붉은빛이 되어 나타났고, 선로의 두 번째 모퉁이에서는 그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진홍빛을 발하는 변덕스럽고도 아름다운 아침의 그 불연속적이고도 대립되는 단편들을 한데 모아 새로운 화폭에 담기 위해, 이런 단편들에 대한 전체적인 시각과 연속적인 화폭을 가지기 위해, 이 창문에서 저 창문으로 계속 쫓아다니며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 P31
 
 
이제 카르케튀트 항구 그림을 비교해 보자.
 

 

같은 카르케튀트 항구를 그렸는데 앞의 두 그림들은 너무나 세밀하여 마치 사진 같이 사실적인 느낌이 든다면 마지막 그림은 마치 잔상처럼, 이어진 색채를 통해서 장소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인상파의 그림에서 사실성은 중요하지 않다. 관찰하는 사람의 눈에 비친 빛을 포착해서 그리는 것이다. 프루스트의 문장 기법이 인상파의 그림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데 정확하게 보여주지 않는, 흐릿한 이미지와 모호성 때문인 것 같다.
 
사진이 단순한 현실의 복제이기를 그치고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걸 우리에게 보여 줄 때, 사진은 나름대로 그것에 부족한 약간의 품위를 지니게 됩니다. - P210
 
엘스티르가 얼마 전에 끝냈으며, 내가 그날 오랫동안 바라보았던 카르케튀트 항구를 그린 그림에서 그가 도시를 그리기 위해서는 바다의 요소만을, 바다를 그리기 위해서는 도시의 요소만을 사용하면서 관람자의 정신에 예고한 것은 바로 이런 종류의 은유였다. - P324
 
터너의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마치 사진 같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실제로 사진이 등장한 19세기에 화가들은 자괴감에 빠졌다고 한다. '앞으로 우리는 뭘 먹고 살지? 저런 혁명적인 아이템이 등장했는데?' 이런 생각이 아니였을까. 마치 오늘날 AI가 등장하여 우리 미래의 삶을 위협하듯 당시의 화가들은 사진의 등장으로 자신의 앞날을 걱정해야 하던 때가 있었다. 이제는 디지털 카메라도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지 않나(아무리 레트로가 인기를 끈다 해도 그 수요가 많지는 않는 듯하다).
 
현실인 듯 이미지인 듯 구분되지 않는 모호함은 여전하지만 조금씩 이 묘사 기법에 익숙해지고 있다. 3, 4권의 부제는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였다. 화자에겐 발베크에서의 기억이 소녀들(!)의 모습으로, 그러니까 덩어리로 인식되고 있다. 이것이 알베르틴과의 결과에 영향을 준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 존재를 회상한다는 건 실은 그 존재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아직 우리 눈이 볼 수 있는 한, 망각했던 모습이 다시 나타나면, 우리는 그 모습을 알아보고 그 빗나간 선을 수정한다. - P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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