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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살아남은 여자들은 세계를 만든다

category 리뷰/책 2023. 4. 10. 10:13
남한사회는 북조선 사람들에 대해 무지하다. '북조선'이라는 국가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이들의 행위주체성의 다면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분단을 가로질러 이주하면서 탈분단적 정체성을 구축하기도 하고, 국경을 넘나들며 코즈모폴리턴적 주체로 재탄생하기도 한다. 남북이 공유하고 있는 가부장적 체제에서 '어머니' 역할에 골몰하는 이들도 있고 도다른 이들은 좀더 자유롭고 독립된 주체성을 체현하기도 한다. 국가나 민족이라는 구조를 무력화하는 일상적 실천에 나서는 이들도 상당하다. 수많은 얼굴로 존재하는 그들에게 좀더 다가가는 것은 남한사회와 사람들의 정체성에 깊게 내재해 있는 분단을 반추할 기회이기도 하다. - P10~11
 
북한은 어떤 나라인가? 우리는 북한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분단이 되고 한국 전쟁이 끝난지도 70여년이 지났다. 남북한의 경제적 격차는 커졌고 냉전 종식 이후에는 북한이 핵 개발에 들어가면서 안보적 이슈까지 더해져 통일이라는 단어는 이제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가 되어버렸다.
북한을 생각하면 우리는 이념을 우선으로 생각하여 국가론적으로 인식하기 쉽다. 그래서 북한에 사는 사람들에 대해 무지하거나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는 북한을 둘러싼 이분법적 사고 체계에 문제점을 먼저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연구자가 쓴 글은 대체로 학술적이어서 딱딱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작가는 북한대학원 교수로 사회과학적 글쓰기에 익숙하다고 고백한다.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런데 작가는 (더 많은 사람들이 읽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에) 산문 형식으로 글을 써 내는 실험을 감행했다. 쉽지는 않았을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명한 결정이었다고 보인다.
 
이 책의 중심에는 북한 여성이 있다. 작가는 여러 명의 북한 여성들을 인터뷰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재구성해냄으로써 북한의 현실과 여성 문제를 들여다볼 수 있도록 했다.
전체적으로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는 북한의 현대사에서 북한 여성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북한에서 선전을 목적으로 소개된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북한의 역사를 빠르게 훑어내려가면서 2000년대까지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사실과 작가의 상상력이 버무려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2부는 중국과 북한의 접경 지역의 북한 여성과 조선족, 자이니치와 북조선 여성들을 작가가 인터뷰 대상으로 만난 이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며 만남을 통해 느낀 작가의 소감이나 소회도 함께 실었다. 3부는 북한 연구자로 북한 여성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를 깨닫고 그것에 북한 여성들과의 만남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그리고 그 이후 자신의 역할을 어떻게 재인식하게 되었는지 정리하였다.
 
그동안 북한 역사서를 몇 권 읽어보았지만 대부분 학술적으로 정리해놓은 것들이었다. 최근 업데이트된 북한 역사서에는 1990년대 초 고난의 행군 시기 이후 각자도생을 위해 시장인 장마당이 허용되었고 그 중 장사 수완이 있는 이들은 돈주로 성장했고 김정은 정권까지의 역사가 짧게나마 소개되어 있다. 다만 교과서적인 텍스트이기 때문에 멀찍이 떨어진 느낌이다. 북한 사람들의 생활은 실제로 어떠한지 속속들이 알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우리가 평소 북한에 대해 보고 듣는 정보는 언론, 통일부 등을 통해서 접하는 제한적인 것들이다보니 사실인지 홍보인지 왜곡인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경우가 있다. 더군다나 여성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지금 북한 여성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우리는 딱히 접할 수 있는 경로가 없다. 이런 연구자들의 작업을 통해서 비로소 접하게 되는 것인데  이 책은 딱딱하게 쓰여지지 않아서 대중들이 읽기에도 무리가 없는데다가 북한 현대사도 덤으로 훓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보여진다.
 
북한 여성들은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누구보다 용감했고,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으며, 삶에 대한 열망과 의지가 넘쳤다. 여성들은 아무래도 '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삼시 세끼 누군가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 분투해야 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는 남한 여성이나 북한 여성이나 같았다.
 
목숨을 걸고 고향을 떠난 그녀들이 이주 과정을 회고할 때 자주 등장하는 음식 이야기는 때로는 너무 사소해서 이질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우리는 사선을 넘어온 북조선 여성들의 증언에서 김치, 국수, 고추장과 된장, 삶은 감자, 두부밥 이야기를 좀처럼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체제, 폭력, 굶주림, 죽음과 생존 등과 같이 북조선을 가리키는 어마어마한 이야기가 등장할 것으로 기대했다면 더더욱 그녀들의 '밥'에 대한 깊은 애착을 흘려들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녀들의 '밥'이야기를 조금 더 세심하게 들여다보면 그것이 그녀들의 전쟁과도 같은 삶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이라면 먹지 않고는 결코 살아갈 수 없으니 '밥'을 마련하기 위한 그녀들의 분투기는 인간이자 어머니로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눈물겨운 투쟁 기록에 다름 아니다.  - P242
 
그녀들의 위치가 그녀들을 제약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들의 눈물겨운 행위주체성은 전복성과 해방성을 시사하고 있다. 그동안 열등감에 휩싸여 중심만을 지향하며 살아온 내가 그들을 만남으로써 조금씩 변화했다. (...) 나는 그녀들의 고통을 통해 나의 삶을 되돌아봤으며, 그녀들의 기쁨과 행복이 나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신기한 일이다. 그녀들이 내 안으로 불쑥불쑥 들어온다. - P239
 
북한 연구자로서 북조선 여성들을 직접 만나면서 자신의 위치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수 있을 것 같다. '사람 vs 사람'이 아니라 분단 국가에서 사는 남한의 북한 연구자와 북한 여성들의 만남에는 개인적인 감정으로만 정리되기 어려운, 이념과 거리감이 어쩔 수 없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이렇듯 분단은 식민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가로막는 현실적인 제약과 장벽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를 깨부수지 않으면 이 체제는 공고히 이어질 수 밖에 없음을 동시에 인식하게 된다.
 
이 책은 분단된 나라에서 사는 우리가 북한을 국가론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사람들의 수준에서 만날 수 있어 좋았다.
 
지금까지 북한학의 기존 연구는 국가와 민족의 분단을 다루는 까닭에 국가 중심성이 상당했다. 하지만 페미니스트 입장이론과 탈식민주의 문화연구로부터 시작된 나의 문제의식은 다양한 집단의 다층적인 경험을 밝혀냄으로써 억압적 사회구조의 작동 메커니즘의 면면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확신이 뒷받침된 것이었다. - 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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