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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category 리뷰/책 2023. 3. 31. 16:14
좋은 에세이는 작가의 삶을 통해 독자 개인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일이라 생각한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그런 면에서 이 편지는 내게 좋은 에세이다.
 
"판단하려 하기 전에 유보하라!"라는 말을 오래 들었다. 고질적인 문제인데 나는 어떤 문제를 오래 끌어안고 살지 못하는 편이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그 끌어안고 있는 시간을 못견뎌한다. 그래서 어떤 질문이 생겼을 때 A플랜, B플랜, C플랜 정도를 생각해 놓고 브레인스토밍을 멈춘다. 그리고  그 세 가지 답 중 가장 나은 답을 찾는다. 나에게는 정답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가장 나은 선택이 중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이냐. 더 많은 플랜이 있을 수 있는데 생각을 끊어냄으로써 더 나은 플랜의 기회를 생각해내는 기회를 놓쳐버리는 것이다.
정말 내가 고치고 싶은 문제인데 늘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문제를 끌어안고 있으면 나는 그것으로 머릿속이 꽉 차서 다른 것은 들어올 틈을 찾지 못하는 것에 대해 괴로워하는 것 같다. 그리고 어떤 다른 새로운 경험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 눈과 귀를 열어두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호기심은 많은데 탐구심이 부족한 것일까. 그렇다고 해서 끈기가 부족하지는 않다.
 
"당장 해답을 구하려 들지 마십시오. 아무리 노력해도 당신은 그 해답을 구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아직 그 해답을 직접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직접 몸으로 살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제부터 당신의 궁금한 문제들을 직접 몸으로 살아보십시오. 그러면 먼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해답 속에 들어와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 P40
릴케는 시인 지망생이었던 카르푸스(카푸스)와 여러 통의 편지를 주고 받는다. 릴케는 인생 후배의 고민에 공감하면서 조심스럽게 조언을 해준다. 당시 20대의 릴케가 얼마나 많은 인생을 알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그는 시인이었기에 지망생이 보내는 편지를 쉽사리 지나쳐버리지 못했을거라 생각한다.
릴케의 핵심 메시지라면 '당장 해답을 구하려 들지 말고 몸으로 깨달을 때까지 그 고독을 견디라!'는 의미일 것 같다. 진정으로 내게도 필요한 메시지인데 나는 절감하면서도 지금까지 살면서도 잘 되지 않았는데 과연 이것이 앞으로도 나아질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나의 문제를 다시금 여기서도 깨달았다는 것이 중요하겠다.
 
'사랑을 위해서는 각자의 고유성이 중요하다'라는 메시지도 내게 적지 않은 울림이 있었다. 누군가 내게 가면을 쓰고 있는 것 같다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웃고 있는데 슬픔 같은 것이 느껴진다고 했다. 그 때는 실제로 삶이 힘들었고 팍팍했다. 그래서 매일 산다는 것이 절망이었고 그야말로 난간에서 억지로 버티고 있는 상황이었다. 웃을 수가 없는 상황에서 내가 그렇게나 웃었나보다. 아마도 '썩소' 아니었을까. 결코 자연스러운 웃음은 아니었을거라 생각한다. 내면의 슬픔이 가득한데 사람들이 가득한 장소에서 억지로 풀어보려 애썼던 나날들이 길었다.
 
슬픔의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하여 사람들이 슬픔을 시끌벅적한 곳으로 들고 갈 때, 오히려 그 슬픔은 위험스럽고 나쁜 것이 되는 것입니다. 표피적으로 그리고 아둔하게 치료한 질병처럼 그런 슬픔들은 물러나는 척하였다가는 짧은 잠복기가 지나고 나면 전보다 훨씬 무섭게 터져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슬픔들이 가슴속에 집적되어 인생이 되면, 그 인생은 제대로 살지 못한 삶, 거부된 삶, 실패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삶으로 인해 죽을 수도 있습니다. - P80~81
 
그런 의미에서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 비단 연인이 아니더라도 친구 등 모든 관계에서 바탕이 되는 것은 개인이다. 스스로가 홀로설 수 없다면 제대로 된 관계도 성립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는 더 확고해지고 있다.
내가 하나의 주체로서 꼿꼿이 서 있지 않으면 어디든 휘둘리기 쉽다. 쉽게 사람을 만나고 헤어질 수 있는 세상이 되었기에 이 메시지는 더욱 중요하다. 개인이 존립해 있지 않으면 누군가의 만남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사랑은 개인이 성숙하기 위한, 자기 안에서 무엇이 되기 위한, 하나의 세계가 되기 위한, 즉 상대방을 위해 자체로서 하나의 세계가 되기 위한 숭고한 동기입니다. 사랑은 개인에게 주어지는 위대하고도 가혹한 요구입니다. 즉 사랑은 한 개인을 지목하여 그에게 원대한 사명을 부여하는 그 무엇입니다. - P69
그들은 이 문제가 사람마다 각각 경우가 다른 사적인 문제로서 그때마다 새롭고 독특하고 극히 개인적인 답변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상대방에게 자신을 내맡기고 서로의 경계를 짓지도 않고 구별하지도 않게 된 그들이, 다시 말해서 자신들의 고유성을 더 이상 지니지 못하게 된 그들이 어떻게 자기 자신들로부터, 이미 막혀버린 고독의 깊은 곳으로부터 나가는 출구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 P71
 
이 책은 스스로에 대한 진지한 탐구, 성찰이 필요한 모두들에게 좋은 메시지를 줄 수 있다. 청년이 더 어린 청년에게 쓴 편지지만 비단 청년에게만 통하는 메시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른들에게도 위로와 성찰의 기회를 줄 수 있는 조용하지만 묵직한 메시지로 다가올 편지다.
 
당신의 회의는 탐구적이 되어야 하고 비판적이 되어야 합니다. 당신의 회의가 당신의 무언가를 파괴하려 들면, 그때마다 그 무언가가 도대체 왜 보기 싫은 건지 회의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리고 회의에게 그에 대한 증거를 요구하시고, 회의를 시험해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아마도 회의가 할 말을 잃고 당혹해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혹은 회의가 반항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 굴복하지 말고, 논쟁을 끝까지 이끌어가십시오. 그리고 그때마다 한시도 눈을 떼지 말고 철두철미하게 행동하세요. 그러면 회의가 파괴자에게 당신의 가장 훌륭한 일꾼 중의 하나가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아마도 회의는 당신의 삶을 만들어가는 모든 일꾼 중에서 가장 현명한 일꾼이 될 것입니다.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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