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당신 첫 번째 부고와 두 번째 부고의 책을 읽지는 못하고 어쩌다 보니 세 번째 부고를 바로 읽게 됐다. 최윤필 기자라는 이름은 종이신문을 구독하면서 알게 되었고 그의 글을 몇 번 읽다보니 좋아서 어느새 <가만한 당신> 칼럼이 언제 실리나 기다리는 독자가 되었다.
세 번째 부고에는 남들보다 앞서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 사람들, 비정상적인 현실에 의문을 가지고 폭로하거나 기록한 사람들의 사연이 실려 있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들의 부고를 보는 일인데 마음에 동요가 일었다. 이는 그들이 현장에서 부딪히며 감내했을 상황이 자연스레 떠오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국 사회는 특히나 소수자에 대해서 인색하다. 과거를 돌아보면 나는 학교 다닐 때도, 사회 생활을 하면서도 늘 튀지 않으려고 했다. 다수의 의견에 묻어가는 것이 편하니까 남들과 다른 소수가 되는 순간 질문을 받거나 공격을 당하거나 하는 상황을 너무 많이 보았다. 우리는 왜 다양성을 존중하지 못하는가 생각했던 적이 많다. 남들과 다르다고 결정받는 순간 그 사회에서 그는 매장당하고 쫓겨나게 된다.
서른 명의 주인공들은 스스로 소수자가 되었거나 소수자의 권리를 위해 나서서 투쟁한 이들이다. 이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어떻게 이런 결심을 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이런 결행을 할 수 있었을까.' 그 결정들이 비록 전부 옳은 것이 아닐 수는 있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정의를 위해 몸소 싸우기 위해 나서는 것만으로 이들은 인정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케이트 밀렛은 페미니즘 이론의 고전이자 2세대 페미니즘의 정전인 『성 정치학』을 쓴 주인공이다. 그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페미니즘 2세대의 슬로건에 해당하는 이론적 철학적 뼈대를 만들었다. 하지만 1970년 무렵 그가 양성애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레즈비언 진영으로부터는 당당하지 못했다고 비판받고 온건 진영으로부터도 너무 나갔다며 비판받는다. 이후 그의 삶은 너무나 비극적이다. 가족들에 의해 정신병원에 강제 수감되고 13년 간 리튬을 복용했으며 만성적으로 조울증을 앓았다고 한다. 함께 운동을 했던 2세대 페미니스트들이 학자나 교수로, 저널리스트로 지속적인 활동을 하는 동안 밀렛은 제대로 된 직장을 가지지도 못하고 대중에게도 오랫동안 그렇게 잊혔다. 이후에 자신이 썼다고 하는 칼럼의 내용이 너무 마음이 아팠다. 대중을 한 때나마 흔들었던 그가 이제는 하루를, 앞 날을, 미래를 걱정하는 지경에 이르다니 말이다. 부도 명예도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가난하고 힘이 없고 곁에 지켜주는 이가 없다면 누구든 마지막은 쓸쓸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이 가슴을 갑갑하게 만들었다.
1998년 밀렛은 <가디언>에 「잊힌 페미니스트의 시간The Feminist Time Forgot」이란 제목의 칼럼을 기고했다. "나는 내가 이룬 것들을 잘 팔아먹을 재주도 없고, 취업할 능력도 없다. 나는 미래가 두렵다. 모아둔 돈을 다 쓰고 난 뒤 닥쳐올 가난이, 감당해야 할 굴욕이, 어쩌면 노숙자의 삶이 겁이 난다." 그 무렵의 그는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베티 프리던과 글로리아 스타이넘 등을 언급하며 "그들은 모두 뛰어난 정치인들이지만, 나는 아니다. '여성해방의 케이트 밀렛'도 아니다"라며 냉소하던 때의 그와 달랐다. (P43~44)
이문자의 이름을 처음 듣고 본다. 한국 여성운동계에서 이렇게 중요한 분을 이제야 알았다니 참으로 죄송한 마음이다. 1983년 6월 '여성의 전화'는 가정 폭력을 추방하고 남녀 평등 관계를 수립해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를 이룰 목적으로 창립되었다. 이문자는 1988년 자원봉사자로 '여성의전화'에 참여한 이후 상담부장과 부설 쉼터 관장, 여성인권상담소장 등을 역임하는 동안 수많은 여성 전문 상담가들을 양성하고 성폭력 관련 법 제정 등의 여러 정책을 관철시키기 위한 투쟁에 앞장섰다. 주변의 활동가들이 정치인이나 공직계로 나서서 이름을 날리는 동안 그는 피해자 여성들의 곁을 떠나지 않으면서 정년 퇴직 후에도 '여성의전화' 활동을 계속 거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대외적으로는 그의 이름이 알려지지 못했으나 '여성의전화' 활동가들에게는 '대모'나 '큰언니'로 불리며 존경을 받았다.
오랜 세월 가정 폭력은 외부에서 간섭하면 안 되는, 가정 내에서 해결해야 할 것으로 잘못 인식되었다. 여성은 폭력의 피해자로 소리 없이 죽어가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이럴 때 '여성의전화'가 피난처이자 해방구가 되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타협이 정치력의 주요한 일부라면, 이문자는 정치력 있는 활동가가 아니었다. 입에 발린 소리를 혐오했고 스스로도 자신을 직설적이라고, "때로는 거칠고 다혈질적인" 사람이라고 했다. (P85)
왕슈핑은 1991년 저우커우시의 한 혈장 센터 부책임자로 발령받는다. 1985년 9월 미국에서 수입한 혈우병 혈액제제에서 HIV 바이러스가 발견된 이후 혈장 경제를 통해 중국인의 피로 직접 약을 생산하여 감염을 막기로 한다.
에이즈 확산을 막기 위한 방법으로 이런 말도 안되는 방법을 쓰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왕슈핑은 혈액 샘플 조사를 하며 C형 항체 양성반응이 나오는 것을 보고 C형 간염이 바이러스 감염 증식의 의심 요소임을 시 보건국에 보고하였다. 조사방식에 C형 간염을 포함시키고 채혈 방식을 개선해야 한다고 건의했으나 당국은 묵살했다. 1996년 전국의 혈장 센터가 폐쇄되기까지 최소 300만 명이 혈장을 팔았다고 한다. 왕슈핑은 옳은 말을 했다가 내부고발자로 찍혀 결국 미국으로 이주하게 된다.
1인당 월2회 매혈 횟수 규제는 무의미했다. 한 남성은 이삼일마다 피를 1리터씩 팔았다고 말했다. 채혈 센터에는 하루 평균 적게는 200명, 많게는 500~600명씩 몰려들었다. 그들은 한 번에 500밀리미터씩 두 차례 1리터의 피를 봅은 뒤, 혈장을 분리하고 남은 혈액을 식염수와 섞어 다시 수혈받았다. (...) 1990년대 혈장 경제의 매혈 주체는 주로 여성이었다. 남자의 피는 가문과 혈통의 정수인 반면, 여자의 피는 어차피 생리혈로 흘려버릴 피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P203~204)
비록 때늦은 부고 인사지만 독자에게도 이들을 기억하고 새롭게 각성하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세상에 맞서 싸우며 살다간 이들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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