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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하버드 C.H.베크 세계사: 1945 이후

category 리뷰/책 2023. 1. 2. 10:05
1945년 이후의 세계는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인류의 결속과 분열 사이에 있는 그 간극을 메울 정도로 일련의 상호 연동 관계로 빠져들었다. 1945년 이전에는 변화의 동력이 주로 서구에서 발전한 근대 기술과 이데올로기였다면, 1945년 이후에는 문자 그대로 수백만 명이 개인으로든 집단으로든 그 과정에 참여해 앞서 존재했던 수많은 분리의 장벽들을 없앴다. 비서구 지역의 국가와 사람들은 서구가 만들어 놓은 세계에 적응하기보다는 스스로 적극적으로 역사를 만들어 나갔다. 그 결과 심지어 사람들이 서로 간의 차이를 점점 더 많이 인식했을 때조차 인류의 결속에 관한 의식은 계속 성장했다. 그런 상황에서 인간이 (자연생활환경과 함께 공유하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지의 문제는 21세기에 닥친 핵심 질문이 되었다. (P15)
 
현대 세계는 보통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시작된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전 베크 세계사에서는 이와 다르게 20세기 전후부터 1970년 무렵까지 넓은 범위를 다루었다. 이는 전후 많은 국가들이 탈식민 전쟁에 뛰어들어야 했고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간의 이념 갈등이 시작되면서 냉전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베크 세계사 마지막 권에서는 1945년 이후 전후 복구 과정과 이념 갈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세계가 연결되는 초국주의를 다룬다. 이로써 1945년 전후의 세계는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 들여다본다.
 
제2차 세계대전은 경제와 기술의 발전에서 유럽 침식 경향을 가속화했다. 게다가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과 소련을 실질적이고 지속적으로 유럽에 개입하도록 만들었다. 독일이 유럽 대륙을 패권적으로 장악하는 것은 결국 양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독일의 패권은 외부의 개입을 통해서만 제거될 수 있었다. 독일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유럽 국가들은 더는 유럽에서 자력으로는 경쟁과 균형의 옛 체제를 회복할 수 없었다. (P23)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유럽의 세기는 기울고 미국과 소련이 부상하였다. 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치고 유럽의 대도시들이 파괴되었다. 참전국들에 전쟁으로 쏟은 비용이 막대했으나 전후 비용은 더 막대했다. 승전국도 패전국도 차등이 없었다.
미국은 1947년 초 서독을 포함한 서유럽 안정화를 위해 '마셜 플랜' 정책을 발표했다. 스탈린은 서유럽 정부들이 자신의 편에 서기를 기대했으나 거부되자 마셜 플랜에 참여하기를 포기했다. 동유럽 국가 정부들은 마셜 플랜 정책에 참여하기를 원했으나 소련 지도부의 압박으로 대신 소비에트 블록이 만들어졌다.
트루먼 행정부는 마셜 플랜을 통해 서유럽을 재건하며 자유주의적 체제를 강화했다. 스탈린은 서독의 국가 건설을 어떻게든 막아보려 했으나 서독도 서유럽 블록 체제에 합류하였다. 1949년 말에 유럽의 세력균형 체제가 붕괴한 자리에 대립하는 두 개의 권력 블록이 만들어졌다. 그 블록은 제2차 세계대전의 두 승전 주역에 의해 지배를 받았고, 유럽은 동반구와 서반구로 나뉘었다. (P51)
 
중국은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내전 끝에 공산당 정부가 들어섰다. 트루먼은 베이징 정권을 인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장제스를 구하는 군사작전을 고려하지는 않았다. 1950년 1월 12일에 딘 에치슨 국무부 장관은 아시아의 미국 '방위선'은 일본에서 필리핀 군도까지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그것에 따르면 타이완의 국민당도 아시아 대륙의 여타 다른 정권들도 미국의 군사 지원을 기대할 수 없었다. (P55~56)
한반도는 미소 갈등의 최전선이었다. 내전은 국제전으로 비화되었고 일본은 공산화를 막는다는 미국의 결정에 따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미일안보조약을 연이어 체결하였고 자위대를 창설하는 법안도 통과시켰다.
 
동남아시아 지역은 대서양 지역과 같은 정치 결속을 갖지 못했다. 일본과 일본의 옛 지배 지역 사이에 반목이 지속되었고, 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도 수많은 문제가 생겼다. 그로 인해 1954년 초에 미국이 '공산주의 침략자들'에게 맞서자며 제안한 군사동맹에는 영연방국가들인 영국과 오스트리아, 뉴질랜드를 빼고는 단지 필리핀과 태국, 파키스탄만이 참여했다. (P65)
인도는 상이한 지역에 따른 행정 권리를 넘길 대상이 불분명했다. 네루는 하나의 인도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무함마드 알리 진나가 이끄는 무슬림 연맹은 이슬람 주민을 위한 독자적인 국가 건설을 주장했다. 이로써 인도 통합은 실패하였으며 1947년 8월 15일에 인도와 파키스탄은 각각 독립국가로 선포되었다.
 
아랍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자들에게 종속되는 것에 대항했을 뿐만 아니라, 유럽인들이 그 지역을 장악할 때 협력했던 전근대 지배 엘리트들에게도 각을 세웠다. 아랍 민족주의는 팔레스타인의 갈등으로 가속화되었다. 그것은 1917년 11월에 영국이 그 지역에서 '유대 민족을 위한 국가 거주지 건설'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것으로 말미암아 촉발되었다.
시온주의자들은 나치의 인종 학살 이후에도 아직 유럽에 남아 있는 유대인 난민들에게 시급히 새 고향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적극적으로 로비를 한 끝에 1947년 11월 29일에 유엔 총회는 3분의 2의 지지로 두 개의 국가를 건설해 서로 결속시키는 분단 계획을 통과시켰다.  (...) 1954년 5월 14일에 영국군은 팔레스타인을 떠났고, 유대인 군은 이미 강자의 지위를 차지했고, 유대인 국가 평의회 의장은 곧장 독립 '이스라엘 국가'를 선포했다. (P69~70)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한 영국으로 인해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갈등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물론 이들간의 기본적인 종교, 민족주의적 갈등은 이전부터 있었지만 말이다.
 
서구 열강과 동유럽 블록 국가 모두 재정적인 이유로 재래식 군비 계획을 1950년대 초에 계획했던 규모대로 이행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미국과 소련의 지도부는 모두 점차 핵 억지력에 의존했다. 핵폭탄 투입을 경고하면서 재래식 군비의 결함을 보충하거나 고비용이 드는 재래식 무기고의 감축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었다. 물론 핵 억지 체제로 넘어가니 핵무기로 인한 절멸 공포가 생겨났다. 그래서 핵무기를 보유한 양대 열강 지도부는 대화를 지속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 때문에 생긴 인지 오류와 핵무기 대치 상태에 대한 경험 부족으로 인해 대화가 지속되기는 극히 어려웠고, 그 결과 동서 준비 관계에서 새로운 긴장이 계속 발생했다. (P106~107)
 
카터는 전략 군비를 제한하는 정도가 아니라 과감하게 감축하고 싶어 했다. 그 결과 미 국방부는 새 협상안을 마련했지만, 그것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어렵게 달성된 양보안을 다시 미국의 헤게모니 지위에 유리하게 만들었고, 그로 인해 소련 군부가 그것에 맞서는 요구를 제출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동시에 카터는 소련 내의 체제 비판가들에 대한 지지를 과시하듯이 공개적으로 표명했다. 그것은 오히려 체제 비판가들을 더 심하게 탄압하도록 만들었을 뿐이다. 게다가 그런 행동으로 인해 브레즈네프는 카터와 직통선을 만들 수가 없었다.
아프리카에서 소련의 팽창 전략이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카터는 안보 보좌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zbigniew Brzezinski의 자문을 받아 들여 ‘중국 카드‘를 더 적극적으로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1978년 5월에 카터는 브레진스키를 베이징으로 보내 전략 협력과 기술 지원의 가능성을 타진하게 했다. 10월 중순에 미국과 중국은 공동성명을 통해 외교 관계 채택을 알림으로써 세계 여론을 놀라게 했다. (P133~P134)
고르바초프는 ‘56’ 세대였다. 그것은 흐루쇼프가 스탈린주의를 공격할 때 사회화되었으며 기본적으로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세계관을 가졌지만 사회주의의 ‘개선‘을 희망했던 당의 관료들을 말한다. 그를 서기장으로 끌어올린 ‘옛 동지‘ 대표자들과 고르바초프의 근본적인 차이는 고르바초프는 이데올로기의 확신에 사로잡혀 소련제국의 불편한 현실을 보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P167)
이념에 갇혀 있지 않고 현실을 냉정하게 들여다 본 리더의 모습들을 통해 생각할 점이 많다.
 
미국 금융계와 의회의 보수주의자들은 소련의 이탈에 개의치 않았지만, 실제로 미국의 힘과 이익을 구현할 금융거래에 노력을 집중했다. 그들은 브레턴우즈 체제로 미국이 잠재적으로 소모적인 대규모 해외 원조 정책을 그만두어도 되리라고 기대하며 달러의 지위를 그 통화 체제의 ‘기축통화‘로 끌어 올렸다. 실제로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비록 각국은 자국 통화를 금에 ‘연동‘(국제 통화 기금 체제 안에서 합의된 환율 패리티 범위로 통화 가치를 고정하는 것)해야 했지만, 달러가 사실상 환율을 결정했다는 사실이다. 본질적으로 달러는 새로운 금본위가 되었다. 국제 거래는 달러로 이루어졌고, 모든 국가는 자국 통화 가치를 달러에 대한 비율로 규정했다.(35달러가 금 1트로이온스로 교환되었다.) 이 체제는 1950년대초 전후 재건 국면이 끝났을 때에야 비로소 제대로 작동되지만, 세계 전역에서 상품과 용역의 값은 달러로 지불되었다. 따라서 다자간 협정 체제의 토대는 달러였다. (P220)
 
2차 대전 후 미국은 달러를 기축통화로 만들고 문호 개방을 하며 자유로운 기업 활동과 세계화의 체제를 선도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미국의 주도에 의한 무역과 금융의 민주화는 다원주의와 권력의 공유를 가져왔다. 유럽과 아시아의 신 세력이 부상하며 미국의 지도력은 도전을 받게 된다. 세계화는 세계적 협력을 요구했던 것이다.
 
사실 이 책의 독특한 지점은 3~5부에 있다고 생각한다. 1, 2부가 세계를 이끈 정치적, 경제적 변화에 주목했다면 3부에서 4부는 미국이 지구상에서 더 이상 동력을 가지지 못하게 된 이유와 맞닿아 있다.
 
3부는 전후 인류의 무분별한 개발 등으로 인해 지구의 역사에서 새로운 단계, 인류가 지구 생태 환경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존재로 출현한 단계가 출현했다는 것이다. 이를 네덜란드의 대기과학자 파울 크뤼천이 '인류세'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다.
인류는 그 수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다른 종의 영향력을 크게 압도하면서 환경과 지구 생태에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얼마나 오래 그렇게 할지는 분명하지 않다. 먼 훗날 인류세는 하나의 지질 연대로 보기에는 너무 짧은 것으로 드러날지도 모른다. 국제 지질학회는 지금 인류세를 그 학문적 개요에서 정식으로 인정하는 문제를 두고 씨름하고 있다. 시간이 말해 줄 것이다. 우리 편에서 보면 다행이기도 하고 속박이기도 한데, 인류세는 앞선 지질시대들만큼이나 오래 지속될 수도 있다. (P385)
 
저렴한 에너지를 사용함으로써 인류는 기후 변화를 목도하게 되었으며 경제와 의학 발전으로 인해 맞은 압도적인 인구 증가는 역설적으로 지구 자원의 부족을 느끼게 했다.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자연은 파괴되었으며 생물다양성은 줄어들었다.
저렴한 에너지는 인간에게 새로운 지렛대를 제공했다. 그것을 수단으로 인간은 일을 성취했고 더 빠르고 멀리 이동했으며 돈을 벌었고, 때로는 의식하지 못한 채 무심코 환경을 변화시켰다. 저렴한 에너지를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누구나 그렇게 했다. (P421)
우리는 소수의 선호하는 식물 종과 동물 종을 선택하여 단순한 경관 안에서 관리했으며 이러한 경관에 잘 적응하는 다른 소수의 종들(쥐, 사슴, 다람쥐, 비둘기 따위)을 무의식적으로 선택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러한 경관에 살았던 다른 식물과 조류, 포유류, 곤충, 양서류의 수를 크게 줄이거나 이들을 제거했다. 이 점에서 윤리적질문은 언제나 거의 동일하다. 우리는 인간과 소, 닭, 돼지는 수십억 개체에 달하지만 호랑이와 코뿔소, 북극곰은 겨우 몇천 마리에 지나지 않거나 전혀 없는 세상에 만족하는가? (P474)
놀란 세계는 부랴부랴 환경보호주의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이후의 대중적 환경보호 운동은 인간 활동의 규모와 범위를 더 완전하게 인식하는 길을 닦았다. (P567)
 
21세기로 접어드는 세계 주요 대도시에는 공통점이 많았다. 뉴욕이나 파리, 도쿄, 두바이, 뭄바이, 나이로비 같은 도시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어느 도시에서나 같은 의류 상표를 볼 수 있고 같은 음식을 먹을 수 있으며 같은 호텔 체인에 묵고 같은 음료를 마실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이렇게 각기 다른 장소에서 같은 것들과 마주치기도 하지만, 한곳에서 더 다양한 것들을 접하기도 했다. 도시 주민, 식습관 그리고 음악, 영화, 연극, 문학 같은 문화 상품은 다민족적이고 다문화적인 성격을 띠어 갔다. 이러한 곳에서는 동질화와 이질화가 나란히 진행되면서 혼성적인 세계 문화가 나타났다.
4부는 인류가 교류하며 만들어진 다양한 문화에 대한 이야기다. 세계 각 지역의 문화는 지식을 생산하고 다른 문화와의 접촉을 통해 지속적으로 발전했다. 사실 세계화라는 용어는 1970년대에 경제학자들이 전 세계적으로 벤처기업의 통합이 늘어나면서 나타난 효과를 설명하려고 처음 사용했다. 세계화 지지자들은 우월한 경제적 문화적 관행을 광범위하게 수용하고, 아울러 창조적으로 적용함으로써 참여자 모두를 위해 더 많은 부와 권력을 창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회의론자들은 기업의 탐욕과 경제적 착취가 각 지역의 자결권을 침해한다고 경고했다. 세계화는 또한 세계시장을 지배하는 이들에게 더 많은 부와 권력을 창출해 주었지만, 주변부 주민들에게는 종속을, 나아가 모두에게 더 큰 불평등을 초래한 것으로 비쳤다. (P572)
 
사실 나는 세계화의 긍정적인 면보다는 회의적인 면에 아무래도 더 기운다. 부익부 빈익빈의 경제적 불평등은 문화적 흐름에서도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과연 세계의 각 시민들은 보고만 있지 않았다. 1970년대 들어 서구 청년들은 자신들의 삶과 더 직접 연관된 정치 운동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전환은 정치 체제를 바꾸지 못하는 무력함을받아들여서라기보다 전지구적 문제에 대한 지역적·개별적 해결책을 찾으려는 노력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 사이에 등장한 운동들(예를 들어 환경 운동, 여성 운동, 게이 운동과 레즈비언 운동 등)은 국적이나 젠더, 인종에 상관없이 개인의 행복에 더 큰 관심을 표명했다. 이 운동들은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지역적인 동시에 세계적이었다. 미국과 유럽의 젊은이들은 동반자 관계, 가족, 공동체를 조직하는 대안적 방법을 실험했다. 성인을 위한 대안 노동환경과 어린이를 위한 대안 학습 환경을조성한 이들도 있었다. 이러한 파편화tragmentation는 1960년대 운동의 힘을 분산시켰고, 동시에 서유럽과 미국의 사회적·문화적 풍경을 점차 변화시켜 나갔다. - P643
서구에서 시작된 이런 운동들은 전 세계로 뻗어나가며 영향을 끼쳤다. 세계가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면 이런 흐름은 지속적으로 이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종교가 냉전과 맞물리며 세계 각지를 분열시키고 냉전 종식 후에도 정치와 결합하며 종교 민족주의로 이어지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1979년 이란 혁명, 아랍과 이스라엘의 갈등, 중동의 종교적 갈등을 통해서 그 예를 살펴볼 수 있다. 다원주의가 종교에는 적용될 수 없는 것일까? 정치에 종교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쉽지 않겠지만 부디 마사 누스바움의 관용주의에서 희망을 찾아본다.
누스바움의 대안은 19세기에 오귀스트 콩트가 처음 제안하고, 존 스튜어트 밀이 가다듬은 "인류교"에 바탕을 두었다. 이 종교는 "공적 제도나 공교육을 통해 길러질 수 있는 도덕 감정인 연민"을 신봉한다. 누스바움에 따르면, 이 애국심은 타인을 향한 관용과 연민을 담고 있기에 보편적 인간성에 대한 자긍심을 길러 준다. "자유로운 사회는 다원주의에 대한 존중을 훼손하지 않고, 이러한 종류의 도덕적 이상[연민]을 확립하며, 그것을 뒷받침할 도덕 교육을 장려할 수 있다. 이 이상은 평등과 존중의 공적 규범과 결부되어 공적 정치 문화의 토대가 되어 줄 것이다." 따라서 관용적 국가는 공적 활동에서 종교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하게 하기보다 종교적 다원주의와 관용을 국민 정체성의 일부로 적극적으로 수용할 것이다. (P689)
 
5부는 세계의 발전을 초국적 관점에서 살펴본다. 구체적으로는 초국적 역사, 초국적 접촉, 초국적 의식, 초국적 기억을 통해 전 세계가 공유하는 역사와 문화, 기억이 있음을 확인한다.
 
이렇게 한쪽으로 치우친 힘의 방정식이 냉전의 전부였다면 냉전은 그렇게 오래 이어지지 않았을 터였다. 우리는 소련 뿐 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을 포함한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이 세계 각지에서 사회주의 사회가 미래의 물결이라는 인상을 심으며 자본주의와 서구에 반대하는 여론의 관심을 끈 덕분에 세계에서 많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냉전의 군사적 토대 뿐 아니라 이념적 토대에 대한 도전이 세계의 지정학적 지도를 뒤흔들고 뒤바꾸어 놓는 데 이바지했다. 이러한 도전은 근본적으로 초국적이었고, 전 세계적인 인권 운동과 세계 평화를 위한 운동에서 소련과 서구 모두에 맞서는 이슬람 근본주의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했다. 냉전 종식에는 이런 모든 요소가 담겨 있었고, 지정학적 ‘현실realities‘만을 원인으로 지목한다면 기본적으로 동어 반복일 것이다. 즉 냉전이 그러한 ‘현실‘에 의해 규정되어 왔다고 본다면 ‘현실‘이 변해서 냉전이 끝났다는 주장은 뻔한 이야기일 따름이다. 지정학적 게임이 벌어지는 무대가 크게 변해서 점차 게임의 성격이 달라졌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될 것이다. 핵무장국도 여전히 존재하고 국제 관계와 국가 간 경쟁도 활발하게 이어지고 있지만, 초국적 세력이 꾸준히 그 자리를 침범해 가는 중이었다. - P825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간의 힘겨루기는 미소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이루어졌기에 냉전은 오래 이어졌다. 하지만 냉전 종식을 위해 많은 국제 기구들이 만들어지는 등 초국가적인 도전이 끊이지 않았기에 허물어질 수 있었다. 국가의 노력, 리더의 결단이 냉전을 종식시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냉전이 끝나고도 여전히 인류는 전쟁에 대한 공포와 불안에 끊임없이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과거를 통해 우리는 서로를 겨누는 것이 공멸의 길임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20세기 말의 세계는 이렇게 초국적인 존재들이 국경을 초월한 다양한 층위의 활동과 감정을 보여 주는 만화경 같았다. 초국적 존재는 대부분 국경이 낮아지고 국경을 초월한 정보 획득과 의사소통이 쉬워지면서 생긴 새로운 기회를 활용해 자신과 타인을 위해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하려고 했다. 하지만 세계를 폭력과 혼란의 도가니에 몰아넣을 활동을 벌인 부정적인 존재도 소수 있었다. 결코 초국적이 되지 못한 사람들은 어떠했을까? 물론 세계에는 초국적이지 못한 사람이 많았다. 그중에는 다른 나라나 사회와 물리적으로 단절된 사람도 있었고, 원칙과 취향, 성격 등을 이유로 스스로 고립을 선택한 이도 있었다. 많은 사람이 초국주의의 일부 측면에는 반대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 P859
 
인류는 끊임없이 교류와 단절을 이어가며 지금껏 발전해왔다. 최근 들어 각국에 우경화 정부가 들어서고 민족주의, 국가주의적 흐름이 나타나는 것을 본다. 커다란 전쟁을 겪은지 불과 100년도 채 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참 놀라운데 현재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 전쟁이 벌어져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는 것을 멀찍이서 바라보는 현실이 씁쓸하다. 과연 세계는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마지막 장에서 오바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의 정치적 이력에 대한 평가는 별개로 그는 적어도 초국주의에 들어맞는 인물이었다. 뒤이어 미국에 도널드 트럼프가 들어섰다는 것은 자국에도 건강하지 못한 일이었고 세계적으로도 악영향을 끼쳤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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