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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춘추좌전 1

category 리뷰/책 2023. 1. 17. 11:21
중국사 책 읽기를 시작하면서 하나라, 은나라 시기를 지나면 춘추 시대를 만나게 된다.  전국 시대는 죽고 죽이는 혼란의 시기였으나 7웅을 중심으로 정권이 구성되므로 헷갈림이 덜하다. 그러나 춘추 시대는 다르다. 어찌나 많은 지방 정권들이 존재하는지 보고 있으면 머리가 혼란하다. 예를 들면, 진은 3개가 있는데 한자를 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고 당연히 지도상 위치도 다르고 민족의 특성도 다르다. 한글 번역만 보고 접근했다가는 오인하기 쉽다. 그러므로 춘추 시대를 공부하는 것은 특히나 원전을 같이 보면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춘추좌전을 읽어야 겠다고 결심한 것은 <춘추>가 춘추 시대를 담고 있는 경전이 아닌 역사서이기 때문이다. 춘추 시대를 산 다양한 사상가들의 경전과 고전이 있지만 그런 책은 시대상은 알 수 있어도 당시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알기는 어렵다.
<춘추>는 공자가 편수한 것으로 알려진 노나라 역사서이다.  기원전 722년(노은공 원년)부터 기원전 468년(노애공 27년)에 이르는 총 255년 간의 역사가 담겨 있다. <좌전>은 전한 제국 초기에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있으며 <춘추>에 대한 다양한 '전(傳)' 중 지금까지 살아 남은 3 종류(춘추좌전, 춘추공양전, 춘추곡량전) 중 하나인데 가장 유명하다. 그렇다면 세 가지는 어떻게 다른가? <좌전>은 역사기술식으로 경문을 풀어내고 있는 반면 <공양전>과 <곡량전>은 질문과 답으로 경문의 뜻을 해석하고 있어 의리론에 입각하여 서술되어 있다. 이는 시대적 배경에 입각한 것이기도 하다. <좌전>은 진시황의 분서갱유 이전의 원전을 토대로 만들어졌지만 <공양전>과 <곡량전>은 분서갱유 이후 경전을 암송하던 사람들에 의해 편집되었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실만을 확인할 때는 <좌전>만한 것이 없다. 다만 <좌전>의 기록 자체는 소략하여 그것만 읽어서는 이해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런 번역 해설서들의 도움이 있어야 원문의 배경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노나라 역사를 읽는다고 춘추 시대를 알 수 있는가? 알 수 있다. 노나라는 지방 정권 중 어찌 보면 약소국에 속한다. 그렇기에 진(秦)이나 진(晋), 초(楚)나라처럼 강대국을 비롯한 각 지역의 열국과 관계를 맺으며 정권을 유지해야만 했다. 그렇기에 이 책을 읽으면 당시 어떤 사건들이 있었고 그 와중에 나타난 영웅과 못난 인물들도 만나게 된다.
 
좌전을 읽어보면 '인의예지'에 입각한 논리에 의한 해석이 두드러짐을 알 수 있다. 공자가 편수했다고 알려진 책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진나라의 난서가 군사를 이끌고 가 정나라를 쳤다. 이에 정나라가 행인(외교사절) 백견을 보내 강화하도록 했으나 진나라 군사가 오히려 그를 죽였다. 이는 예의가 아니다. 군사가 서로 싸우더라도 사자가 얼마든지 그 사이를 오갈 수 있는 일이다. 이에 초나라 자중이 진(陳)나라를 쳐 정나라를 구했다. (...)"
 
춘추좌전 1권은 BC 552년 양공 21년까지를 다루고 있다. 이 200 여년의 시간 동안 기억에 남는 사건은 역시 제환공과 진문공이 패자가 되는 순간, 초장왕이 패자를 자처하고 나선 것이 아닐까. 제환공과 진문공은 부인할 수 없는 춘추오패였고 초장왕은 논란은 있지만 빼놓지 않고 거론되는 인물 중 하나이다. 
다만 그들이 패자가 되는 데 있어서 참모들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제환공에게 관중이 있었듯 진문공에게는 선진이 있었고 초장왕에게는 손숙오가 있었다. 리더의 단독 행동만으로 패업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생각한다. 물론 그 패업에는 백성들에 대한 사랑이 기본이 되어야겠지만.
 
이들이 패자가 된 순간을 좌전의 기술로 확인해보자.
 
장공 15년 : 기원전 679
15년 봄, 제후 · 송공 · 진후 · 위후 · 정백이 견에서 만났다. 여름, 부인 강씨가 제나라로 갔다. 가을, 송인 · 제인 · 주인이 예를 쳤다. 정나라 사람이 송나라를 침공했다. 겨울 10월.
- 노장공 15년 봄, 제환공과 송환공, 진선공, 위혜공, 정여공이 다시 견 땅에서 만났다. 이로써 제나라가 비로소 패자가 되었다. 가을, 제후들이 송나라를 위해 예나라를 쳤다. 이 틈을 타 정나라가 송나라를 침공했다.
-> 확인할 수 있듯 제후들이 견에서 만났다는 것만으로 제환공이 패자가 되었음을 알기는 어렵다. 그곳에서 만남으로써 서로 간에 약속을 한 것이겠구나 짐작할 수 있음이다.
 
희공 28년 : 기원전 632
28년 여름 4월 기사, 진후와 제 · 송 · 진(秦)나라 군사가 초나라 사람과 성복에서 싸웠다. 초나라 군사가 크게 패했다. 5월 계축, 공이 진후 · 제후 · 송후 · 채후 · 정백 · 위자 · 거자와 천토에서 결맹했다. (...)
- (...) 초나라 군사들이 공격권에 들어오자 진나라의 중군 주장 선진과 부장 극진이 중군의 정예부대인 공족(진문공의 친위부대)을 이끌고 초나라 군사의 옆을 치고 들어갔다. 그러자 호모와 호언도 말머리를 돌려 중군과 함께 자서의 군사를 협격했다. 이에 초나라의 좌군도 마침내 궤멸되고 말았다. 이로써 성복의 대회전은 초나라 군사의 대패로 귀결되었다. 단지 자옥이 휘하 군사들을 수습하여 움직이지 않은 까닭에 초나라의 중군만은 무사했다.
- 5월 11일, 진문공이 정문공과 형옹에서 결맹했다. 5월 12일, 진문공이 초나라의 포로 등을 주양왕에게 바쳤다. 5월 14일, 주양왕이 진문공을 예주로써 대접하면서 술과 음식을 권했다. 주양왕이 진문공을 후백수로 임명케 했다. (...) 5월 28일, 왕실의 경사인 왕자 호가 앞장서 왕궁의 뜰에서 제후들과 동맹을 맺으며 (...)
-> 성복전투의 승리로 진문공은 패자에 오른다. 진문공이 패자에 오르는 것은 드라마틱한 순간이다. 형제들의 기에 눌려 쫓기는 생활을 하기도 하면서 수많은 고난을 겪은 후 오른 자리이기 때문이다.
 
선공 12년 : 기원전 597
12년 봄, 초자가 정나라를 포위했다. 여름 6월 을묘, 진나라의 순림보가 군사를 이끌고 가 초자와 필에서 싸웠다. 진나라 군사가 크게 패했다. 가을 7월, 겨울 12월 무인, 초자가 소를 멸했다. 진인 · 송인 · 위인 · 조인이 청구에서 동맹했다.
- 6월 15일, 군수품을 실은 초나라의 치중이 필 땅에 도착했다. (...) 초장왕이 말했다. "무력을 과시해 제후들을 위협한 것은 '집병'을 하지 못한 것이오. '금폭'과 '집병'을 못했으니 어찌 '보대'할 수 있겠소. 또 강대한 진나라가 상존하고 있으니 어떻게 '정공'을 이룰 수 있겠소. 백성들의 기대와 어긋난 일이 아직 많으니 어찌 '안민'이 이뤄졌다고 할 수 있겠소. 다른 사람의 위기를 자신의 이익으로 삼고 그 혼란을 틈타 자신의 번영을 꾀했으니 어찌 '풍재'를 이뤘다고 하겠소. 무에는 이같이 7가지 덕이 있는데 나는 한 가지도 없으니 무엇으로써 후손에게 보일 것이오. 용무는 내가 추구하는 바가 아니오. (...) 지금 진나라는 죄를 지은 것이 없고 백성들은 충성을 다하여 죽음으로써 군명을 받들고 있소. "(...) 황하 강변에서 하신에게 제사를 지낸 뒤 선군의 사당을 지어 승전을 고하고는 이내 회군했다.
-> 사실 초장왕은 열국들이 모두 인정하는 패자에 올랐다고 하기에는 애매하다. 본인도 강대국인 진을 꺽지 못했음을 자인하고 있으니 말이다. 어쨌든 필 싸움에서의 승리로 스스로 패자에 올랐다고 하고 있다.
 
번역자인 신동준 선생님 책으로 나는 올재 클래식스 버전을 갖고 있어 사실 그것으로 읽었다. 기존에 선생님 번역으로 몇 권의 동양 고전을 읽어서 읽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간혹 원문이 실리지 않은 단어가 이해가 안 갈때는 사전을 찾아보면서 읽었다. 공부의 기본이라 생각한다.
 
좌전을 읽으면서 중국의 역사 문화의 시작을 이해할 수 있는 첫 걸음이라 생각했다. <사기>나 <자치통감> 등은 이후 시기를 다루기 때문에 춘추 시대 역사를 알기는 어렵다. 이 책을 읽으면서 <동주 열국지>까지 추가로 읽는다면 더 도움이 되겠다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