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땅이 넓기 때문에 각지에 정권이 동시에 병립하여 각각의 건국신화를 갖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러한 지역 정권들은 끊임없이 흥망을 거듭했기 때문에, 그럴 때마다 신화는 함몰되어 버린다. 어떤 이유에선지 함몰을 면한 일부가 세상에 남겨지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신화는 역사를 반영한 부분도 가지고 있지만, 결코 전체를 반영하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단편적인 반영이다. 어떤 의도에 따라 허구로 조작될 수도 있기 때문에 신화에서 역사를 추구한다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고고학상의 발견은 극히 구체적인 역사 그 자체의 흔적이다. 그러나 흔적은 흔적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역사 전체를 재구성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허구로 조작한다고 말했지만, 그 필요성이 제기됐다는 사실 그 자체가 역사를 푸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예를 들어서, 일본의 신화가 기록된 것은 국가의 통일이 어느 정도 이뤄져서, 그것을 더욱 강화할 필요를 느낀 시대였음을 알 수 있다. 이미 8세기에 접어든 뒤였기 때문에 허구에 의한 조작의 조직성이 높았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 P13
이야기중국사 1권은 중국의 신화, 전설의 시기부터 춘추 시대까지를 다룬다. 작가 진순신은 당대 최고의 중국역사문학가였다고 하는데 출생지는 일본 고베이고 본적은 타이완의 타이베이다. 1924 년생으로 중국인으로 태어났으나 1990년 일본 국적을 취득했고 이후에는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활동했다고 한다. 때문에 작가가 일본 역사에도 해박한 지식을 지녔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특히 앞 부분의 신화 부분은 중국 고대 신화와 일본 신화의 신들을 서로 비교하며 나열해 놓아 읽는 재미를 더한다. 신화는 역사 시대에 와서 필요에 의하여 선택적으로 취했다고 여겨진다. 일본의 신화가 역사 시대에 구미에 맞게 역사서에 기록된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각지에 흩어진 신화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았을 것인가. 그 중 그 때까지 구전되어 남은 것은 100%는 아니더라도 사람들에게 회자될 만한 이유가 있어서 남은 것이라 생각한다. 역사의 기록이 승자에 의해서 채택된 것이듯 신화도 정권을 유지하고 홍보하는 수단이 되지 않았을까.
요가 제위(位)에 있고, 순이 섭정을 할 때
공공을 유릉(幽陵)으로 유배 보내 북적으로 바꾸고,
환두를 숭산(崇山)으로 추방해 남만으로 바꾸고,
삼묘를 삼위(三危)로 옮겨 서융으로 바꾸고,
곤을 우산(羽山)에 극(極, 유패)하여 동이로 바꾸고,
라는 처분을 했다.
북적, 남만, 서융, 동이라는 중국의 ‘사이관(四夷觀)‘이 여기에 나타나있다.
만들어진 이야기라 할지라도 이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적, 만, 융, 이 등 중원에서 보면 변경에 있는 각 부족은 처음부터 변경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중원에서 추방되어 사방의 변경으로 가게 된 것이라 되어 있다.
이것은 요와 순의 실재, 비실재 문제와는 상관없이 유력한 각 부족이 중원 주변에서 멀리 떨어진 땅으로 옮겼다는 역사적 사실을 솔직하게 반영하고 있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가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시대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상식이었다고 여겨진다. - P65
공자로 인해 요순 임금은 우리에게도 이름이 익숙하다. 한반도는 중국의 동쪽에 위치하므로 동이로 불렸는데 북적, 남만, 서융, 동이라는 용어가 요순 시대에서부터 유래한 것이라니 놀랍다. 물론 이름이야 붙이기 나름인 것이지만 당시 중원은 지금보다 훨씬 영역이 좁았던 만큼 그 나머지는 모두 변경 지대였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이 무렵 중원의 부족들이 변경으로 이동하였고 여기서부터 사이관이 출현하였다.
요의 주요한 사적은 백성에게 시간을 준 것, 천문의 관측이었다. 순은 부모에게는 효, 동생에게는 애, 아내는 그에게 정절을 지켰다. 주군인 요를 섬길 때는 현명한 사람들을 모아 적재적소에 등용하고 실패한 사람을 처분했다. 순의 주요한 사적은 인사(人事)와 관련이 있었다. 우는 말할 것도 없이 치수가 가장 큰 업적이었다. 준(準, 수평을 재는 도구), 승(縄, 직선을 재는 도구)을 왼손에, 규(規, 각도를 재는 자)를 오른손에 들고 분투를 거듭하다 결국 반신불수가 됐을 정도였다. 구주를 개척하고 천하를 둘러보고, 구산(九山)을 다스리고, 구천(九川)을 끌어들인 것과 같이 그는 어디까지나 '지(地)'의 일에 일관했다. - P91~92
하라는 국호는 우가 처음으로 봉해진 나라의 이름에서 땄다고 한다. 그 후 전국적(全國的)인 정권은 시조가 처음으로 봉해진 땅의 국명을 국호로 사용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상(商, 은), 주, 진(秦), 한, 위, 진(晋), 수, 당, 송 모두이 관례에 따른 것이다. 몽골 정권은 특별히 어디에도 봉해진 적이 없었기 때문에 지명이 아니라 추상적인 가명(名)을 골라서 원(元)‘이라고 명명했다. 원에 의해서 하 이후의 전통이 무너진 셈이다. - P102
국호가 땅의 국명을 사용하는 것이 관례가 된 것이 하나라 때부터이다. 이전까지는 씨족 공동체 사회였으나 이 때부터 사유 재산이 발생하고 계급의 격차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의 우(禹) 임금은 왕조의 시조이기도 했으나 치수(治水)에 공을 들여 만민의 고통을 없앴기에 백성으로부터 칭송을 받았을 뿐 아니라 후대에까지 성왕으로 이름을 알린 것이다. 또한 나라의 근본 제도를 안착시킨 왕이기도 하다.
전승에 의하면 하와 은은 조상이 같지만, 계열이 다른 부족이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서로의 생활양식에 커다란 차이가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하가 멸망하고 은의 천하가 되었지만 사람들의 생활이 송두리째 뒤바뀌는 일은 없었다.
틀림없이 하는 권력의 자리에 안주하여 수장이나 그 주변의 간부들이 타락했을 것이다. 사람들도 퇴폐했었을지도 모른다. 같은 기반의 생활권 속에서 보다 청신한 기풍을 가진 은이 힘으로 권력을 대신했다. 단절이나 혁신보다 계속이라는 느낌이 더 강했을 것이다.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은에서 주로의 교체는 흔히 ‘은주혁명(殷周革命)‘이라 일컬어지듯 커다란 변혁이었다. 그것은 계속이라기보다는 단절이라는 느낌이 더욱 강했다. 그에 비해서 하와 은의 교체는 일종의 사회 발전 선상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 P118
하나라는 정확히 밝혀진 것이 없고 고고학계에서는 대체로 그 실존을 부정하는 반면 은나라는 은허의 발굴로 실존하는 역사로 인정받게 되었다. 은나라 사람들은 자신들을 '상(商)'이라고 불렀는데 그 시조가 하남성의 상이라는 나라에 봉해졌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중국에서도 '상'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하나라와 은나라는 대체로 비슷한 생활양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눈에 띈다. 왕조가 바뀌는 과정은 어느 역사 시대와 마찬가지로 하 왕조 내부의 부패와 혼란 등이 원인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은나라 사람들의 행동은 전부 점복(占卜)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점복이 전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실권이 점복을 관장하는 사람의 손에 쥐어질 우려가 있다. 왕이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우선 점쟁이들을 지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왕 스스로가 점복을 행해야만 한다.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갑골을 구워 나타난 점괘를 판단하는 것은 왕의 몫이었다.
은나라의 왕은 일종의 법왕(法王, 사제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신과 조상신을 받들어 제사를 지내고 점복을 관장했으니 성직자임에 틀림없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의 수장으로서 현실의 정치도 맡았다.
이와 같은 제정일치 체제에서 왕은 신성하여 범할 수 없는 자, 신 그 자체가 되어 버린다. 은나라의 왕은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난 신이었다. - P152~153
하는 역사가 아닌 신화 시대에 가깝고 은은 실존하는 문명이므로 분명 존재하는 왕조였으나 신화와 역사 시대의 중간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만큼 은은 여전히 신을 중요하게 여겼다. 제정일치 사회의 모습이 엿보이는데 마치 고조선의 단군처럼 제사장이 군장의 노릇을 하는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은은 기력이 쇠해서 망한 것이 아니라 여력이 충분히 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 힘의 분산을 꾀하지 않으면 안 됐다. 일단 주의 아들인 녹보를 제후로 봉하기는 했지만, 무왕은 감시를 위해 자신의 동생인 숙선(鮮)과 숙도(叔度)를 녹보에게 붙여 은의 옛 영토를 다스리게 했다.
늑대의 재보를 나누고, 거교의 식량 창고를 열어 빈민을 구제하고, 일곱 개의 구멍을 보기 위해 주가 해부했다고 하는 비간의 무덤에 정중하게 흙을 쌓아 올리고, 주 때문에 감금되어 있던 기자를 석방했다. 이 일련의 일들은 주 무왕의 이른바 ‘인정(仁政)‘이었다.
그런 다음 무왕은 서쪽으로 개선했는데 도중에 이곳저곳을 들렀다. 신정권의 성립을 알리고 선무공작(宣撫作)을 펼쳤다. - P234
은은 상제의 뜻에 따라 점을 친 내용을 갑골문자로 일일이 기록으로 남길 만큼 뛰어난 기술 문명을 가진 나라였다.
주 무왕이 은에 선전포고를 하며 "지금 은왕 주는 그 부인의 말을 듣고 스스로 하늘에서 떠나고, 그 삼정(천, 지, 인)을 훼괴하고, 그 왕부모제(王父母弟)을 멀리하고, 그 조상들의 악을 끊어 버리고, 음성(淫聲)을 만들어서 정성(正聲)을 변란(變亂)하여, 부인을 이열(怡悅, 기쁘게 함)했다. 이에 지금 나 발(무왕의 이름)은 이를 삼가 천벌을 행한다."(P228) 출정했다. 은의 주력부대는 노예 병사들이기 때문에 싸울 마음이 없어(노예에서 비로소 해방된다는 생각에) 무기를 거꾸로 들고 싸우며 주나라 군대의 위해 길을 열어 주었다. 이 때 은의 주왕은 자존심이 상해 스스로 불 속으로 몸을 던졌다고 한다.
왕국유는 『은주제도론(殷周制度論)』에서 주의 제도 가운데 은의 제도와 가장 커다란 차이를 보인 것은 ‘입자입적제(立嫡制)’와 ‘묘수제(廟數制)’와 ‘동성불혼제(同姓不婚制)‘였다고 말했다. 이것이 그 후 중국 윤리의 근본이 되었기 때문에 주에서 중국문화가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은의 그림자가 중국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특히 주는 봉건제를 도입함으로써 각지에 여러 가지 문화가 병립하는을 허용했다. 주 시대에 여러 가지 요소가 움트고, 서로 섞이게 되었다.
신성왕조 시대는 귀신에 반하는 문화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채로움을 기대할 수 없었다. 주가 성역을 해방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의 문화도 해방된 지역으로 흘러들었을 것이다. - P271
은과 주의 결정적인 차이는 결국 봉건제일 것이다. 주 시대에 들어오면서 각 지방 정권은 각자의 문화를 가진 국가로 존재하면서 자신들의 국력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서로에게 도움을 받기도 하고 또 힘이 약하면 위기에 봉착하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각 문화가 이 때 자연스레 섞이게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일들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천하가 넓어졌다.
첫 번째는 예전까지는 변경이라 여겨졌던 지방으로 중원의 제후가 이봉(移封)된 경우다. 오(吳)나라의 조상이라 여겨지고 있는 의후(侯) 적(矢)이 그랬을 것이라 추측되고 있다.
두 번째는 토착세력이 중원의 문화적 영향을 받아서 중원화한 경우다. 삼묘의 후예인 듯한 초나라가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세 번째는 제후의 변경 개척이다. 객사현 출토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연의 동북 진출이 그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P387
춘추 오패라는 말이 있다. 춘추 시대에 다섯 명의 패자가 등장했었다는 말인데, 책에 따라서 다섯 명의 이름이 각각 다르다.
누가 뽑든 반드시 들어가는 사람은 제나라의 환공과 진나라의 문공, 두 사람이다. 진(晋)나라의 문공은 다름 아닌 환공 말년에 제나라로 망명했던 진나라의 왕자 중이다. '제환, 진문(齊桓晋文)'은 패자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유력한 인물은 초나라의 장왕이다. 대부분의 문헌이 그를 오패에 넣었지만 오직 『한서』의 「제후왕표서주(諸侯王表序注)」만은 초나라의 왕인 장왕을 오패에서 제외했다. 초나라를 매우 싫어하는 사람이 고른 것인 듯하다.
나머지 두 사람에 대해서는 진(秦)나라의 목공(穆公), 송나라의 양공(襄公), 월나라의 왕 구천(句踐), 오나라의 왕 합려(闔閭), 오나라의 왕 부차(夫差) 등의 이름을 여러 책에서 들었다. 이 사람들은 패자로 보기보다는 패자가 되겠다는 뜻을 품었지만 패업을 이루지 못한 '준패자(准覇者)'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 P434
역사에 인물의 비중을 놓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춘추 시대에 쟁쟁한 인물들이 비슷한 시기에 이렇게 나왔다는 것은 우연치곤 묘하다. 나는 특히 공자도 높이 평가한 관중과 안영, 춘추 오패의 이야기들이 정말 재밌었다. 그 중 제나라의 환공, 진나라의 문공은 춘추 오패에 반드시 들어가는 인물이지만 나는 오나라의 합려와 부차, 월나라의 구천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우리가 흔히 들어 알고 있는 토사구팽 등의 고사가 여럿 나온다. 여전히 이것들이 기록에 남아 구전되어 지금까지 인용되는 것을 보면 놀랍기만 하다.
송나라의 수도에서 열린 '미병지회'에 모인 것이 14개국의 대부로 이전까지의 회맹과는 달리 제후들이 아니었다는 점에는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송나라에서 행해진 회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창자는 송나라의 군주가 아니라 대부인 향술이었다. 또 교섭의 사전공작 단계에서도 초나라의 자목(子木)과 진(晋)나라의 조맹(趙孟) 등과 같은 대부급 인물들이 활약을 했다.
군주가 국정을 전담하던 시대는 끝나고 실권은 그 밑에 있는 귀족이나 중신들의 손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 P484
진(晋)나라의 분열은 틀림없이 커다란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방향에서부터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구국(舊國)의 분열보다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 여겨진다.
오나라와 월나라가 위치했던 지방이 천하 속으로 편입되었다는 점뿐만이 아니다. 오나라의 운하와 월나라의 해로가 중국을 한층 더 긴밀히 연결시켰다.
어느 사이엔가 나타났다가는 눈 깜빡 할 사이에 무대에서 사라져 버렸다. 오나라와 월나라의 흥망은 그야말로 일장춘몽과도 같다. 그런 만큼 그 짧았던 시대의 역사는 시인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 - P553
오나라 시기 만들어진 운하가 중국 내륙의 물길의 시작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고 월나라의 해로는 말할 것도 없이 중국에 중요한 이동 루트이다. 두 나라는 이제 저물고 전국 시대를 통과하게 되면서 이름이 사라지지만 운하와 해로는 중국에 이후에도 큰 밑거름이 되었다. 사람과 나라는 사라져도 작업은 남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운하를 만들기 위해 고생한 백성들의 노고를 잊어서는 안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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