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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남양과 식민주의

category 리뷰/책 2022. 12. 19. 10:27

여러 갈래의 이질적인 역사와 문화, 또는 상상된 지리 공간에 대해 붙는 동양이라는 개념은 홀로 스스로를 표상할 수 없다. 그 내용이 무엇이든 기본적으로는 서양에 대응하는 개념으로서 자기를 구성한다. 한국에서 동양 담론은 혼종적이며, 전통적으로 형성된 중국과 일본의 시선,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구성된 서구의 시선에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동양이나 동남아시아에 대한 관행적 인식을 성찰적으로 돌아보고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일본 식민주의 역사인식의 한 축을 이루는 제국주의적 동양 개념을 역사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또한 실제로 등장했던 역사적 사례로서 '대동아공영권' 구상을 검토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것은 아직까지도 아시아 각지를 떠돌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일본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역사학의 망령과 대면하는 일이다(P21~22).

남양이라는 단어는 일본에서 주로 통용되던 명칭으로, 중국 대륙 남부를 가리키는 중국의 남양과는 다른 것이다. 그 범위는 아시아 대륙 남쪽 태평양 일대의 남양군도와 도서부 동남아시아를 아우르는 범위다. 1919년 일본이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으로 남양군도(마리아나 제도, 캐롤라인 제도, 마셜 제도)를 위임통치하게 된다. 조선과 남만주를 이미 차지하고 있던 일본은 동양은 이미 자신의 세력권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남양이 일본의 통치 아래 놓이게 되면서 이 지역 역시 일본이 관할하는 곳이라는 인식이 생겨났다. 양자가 모두 세력 범위에 들어오게 되면서 일본은 남진의 정당성과 필연성을 고려하기 시작한다.

남양군도는 서태평양의 적도 부근에 넓게 퍼져 있는 미크로네시아의 섬들 가운데 오늘날의 북마리아제도 · 필라우 · 마셜제도 · 미크로네시아연방을 가리킨다. 미크로네시아의 섬들은 18세기 초부터 스페인의 지배 아래 있다가 이어서 독일의 지배를 받았다. 1914년 일본은 영국의 조력으로 독일이 지배하고 있던 미크로네시아를 점령하게 된다. 이후 1921년부터 1933년까지 국제연맹의 위임에 따라 일본은 이 지역을 신탁통치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지배했다. 일본이 국제연맹을 탈퇴한 이후 위임통치의 법적 유효성이 소멸되었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1945년까지 위임통치를 지속하다가, 패전 후에 미국에 넘겼다(P56).



메이지 시기에 일본 대외관계에서 긴급한 현안은 북방에 인접해 있는 조선과 중국이었다. (...) 조선 및 중국의 문제는 일본의 존립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국가의 생존과 발전을 위해서는 해당 지역을 지리적으로 영유해야 한다는 인식까지 나타났다. 그에 반해 서구 열강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는 남양 지역은 긴급한 관심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남양은 낭만적인 지사나 이탈자들이 흘러 들어가는 지역으로 인식되었기에 지리적 영유 개념 같은 것은 아직 형성되지 못했다(P52).
다이쇼 시기의 남진론은 북진론과 더불어, 더 나아가 북진론을 보완하는 대외 팽창의 이데올로기로 재구성되었다. 북진론과 남진론 사이의 긴장이 소실되면서 남북을 가리지 않는 남북병진론에 가까워졌다. 심지어 남쪽으로의 발전만이 아니라 필요하다면 동서남북 어느 방향으로든지 발전해야한다는 주장으로 연결되었다(P61~62).
남진론은 1930년대 중반 '국책'의 형태로 등장했다. 일본 정부는 「국책의 기준」에서 외교와 국방을 통해 동아시아 대륙에서 일본의 지분을 확보하는 동시에 남방 해양으로 진출하는 것이 '근본국책'임을 명시했다. 군사적 자원과 외교적 수단을 함께 사용하되 북방 소련의 위협을 없애기 위해서는 만주와 조선에 주둔하는 병력을 보강하는 등 국방 군비를 충실히 하고, 일만지(日滿支) 삼국의 제휴를 긴밀히 하여 경제발전을 도모하며, 외교적 수단을 통해 영국 및 미국과의 관계를 관리하는 것을 기본방침으로 삼았다(P81).

남방으로의 진출을 모색하는 가운데 1940년 7월 22일 제2차 고노에 내각이 출범했다. 곧이어 7월 26일 각의에서 「기본국책요강」이 결정되었다. 여기서 일본 · 만주 · 중국을 중심으로 하되 남양 · 남방까지 포함하여 자급적 블록경제를 확립한다는 '대동아 신경제질서',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근본방침으로 설정했다. 그에 따라 참모본부는 중일전쟁을 서둘러 해결하고 이어서 남방 문제를 해결한다는 방침을 「시국처리요강」에 담았다. 독일 및 이탈리아와 결속을 강화하고 소련과는 협상을 통해 타협책을 모색하되, 전시 군비를 강화하여 전쟁 태세를 정비한다는 것이 기본구상이었다(P88~89).

일본군은 '자존과 자위를 위한 정당방위'라고 주장하면서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진군했다. 나치 독일에 협력적이었던 비시 정권의 관할 아래 있던 인도차이나 주둔 프랑스군과 무력 충돌은 없었다(P95). 
일본은 프랑스의 친일 비시 정권의 비호 아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진군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와 구미 경제 사이의 경제적 의존관계를 청산하게 만들고, 일본이 주도하는 대동아경제권으로 끌어들여 현지에서 풍부한 자원을 공급받는 것은 일본이 미국과 영국에 대한 자원 종속에서 벗어나는 길이었다. 이 시기에 진행된 교섭에서 일본은 강경한 태도를 취하면서도 경제협상이 결렬되는 것만은 피하고자 했다. 그러나 네덜란드 측의 경계심이 고조되면서 1941년 6월 17일 제2차 '일란회상'은 일부 지역의 석유 채권을 일본에 제공하고 재교섭 의사를 서로 확인하는 수준에서 사실상 결렬 상태로 종료되었다. 그런데 그다음 달에 일본군이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진주하자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측에서는 일본과의 경제협력을 파기했다. 미국과 영국도 즉각적인 보복에 나섰다. 1941년 7월 25일에 미국은 재미 일본 자산을 동결했고, 그 이튿날에는 영국이 영국령 말라야 반도와 영국령 인도의 일본 자산을, 그 이튿날에는 네덜란드가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의 일본 자산을 동결했다. 8월 1일에 미국은 대일 석유 수출 금지조치까지 내렸다(P101).

일본은 중일전쟁이 길어지며 난항을 겪는 상태에서 경제적 이익이 걸려 있는 네덜란드와의 통상협상이 결렬되고 미국이 석유 금수 조처까지 당하며 벼랑 끝까지 내몰렸다. 이것은 결국 일본이 태평양 전쟁까지 결행하게 되는 계기를 만든다. 결국은 경제적 이득이 중요했다는 생각이다. 일본은 동남아시아에 눈독을 들이기 이전부터 풍부한 천연자원이 있는 이 땅에 매력을 느꼈고 나아가 경제적 이득을 노렸다. 중일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전쟁에 필요한 군수 물자는 부족해졌고 경제적 핵심 이권까지 뺏기자 돌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개시하게 되고 일본군은 동남아시아 각지로 침공해 들어갔다. 

1942년 2월 '싱가포르 요새 방어전'이 시작되었다. 싱가포르는 영국의 아시아 지배를 상징하는 거점으로 상징성이 있는 곳이었다.  싱가포르는 완강히 버텼으나 2월 15일 결국 점령되고 만다. 
식민지 조선의 시인 노천명은 싱가포르 함락 소식을 듣고 감격에 겨워 2월 16일 밤에 「씽가폴 함락」이라는 축시를 발표했다(P106). 

(...)
쌓이고 쌓인 양키들의 굴욕과 압박 아래
그 큰 눈에는 의혹이 가득히 깃들여졌고
눈물이 핑 돌면 차라리 병적으로
선웃음을 쳐버리는 남양의 슬픈 형제들이여

대동아의 공영권이 건설되는 이날
남양의 구석구석에서 앵글로색슨을 내모는 이 아침
(...)
(P109)

일본군 동남아시아 지역 총사령부인 남방군은 1942년 5월 동남아시아 공략 작전 완료를 선언했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독립국이던 타이를 제외하고 일본군의 점령으로 동남아시아 지역에 기존 통치자인 서구 제국이 밀려난 것이다. 
일본군은 이 지역을 세 가지 유형 방식으로 통치했다. 첫째, 동남아시아 유일의 독립국이었던 타이와는 동맹 형태를 유지했다. 둘째, 프랑스와 포르투갈에 대해서는 종주국으로서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이중 지배의 형태를 취했다. 셋째, 영국령 버마, 말라야, 싱가포르, 미국령 필리핀, 그리고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에 대해서는 직접 군정을 실시했다(P120). 

동남아시아 각국에서는 1920~1930년대에 민족주의운동과 단체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각국 사정에 따라 서구 제국에 대한 인식과 대응에 차이가 있었는데, 일본군이 '아시아 해방'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동남아시아 각지로 침공해 들어옴으로써 문제가 더욱 복잡해졌다. 일단 유럽 열강의 패배와 항복은 동남아시아 각지에서 민족주의적 각성과 자신감을 고양했다. 오래 기간 서양 제국의 식민지배를 받아온 이 지역 전역에서 그와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일본군의 힘을 빌려 서구 제국을 몰아내는 것은 그들에게 매력적인 선택지였다(P112)

일본은 아시아로 영향력을 뻗치며 서구 제국주의로부터 아시아를 해방시키겠다는 논리를 펼쳤다. 이에 아시아는 열광한 측면이 분명 있었다. 지긋지긋한 서구 제국주의에서 벗어나 비슷한 얼굴색의 아시아 문화권이나 이미 근대화로 앞서나가는 아시아의 맹주로서의 일본에 부러움을 보내는 시선이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일본군에 대한 현지 주민의 기대는 높았다고 한다. 일본이 미드웨이 해전으로 전쟁의 승기를 잃고 2차 대전 막바지까지도 남양군도를 사수하기 위해 조선, 오키나와를 비롯한 군인을 동원하여 보내고 위안부를 강제동원하여 이곳으로 보냈다는 명백한 사실을 통해 동남아시아인들과의 바람은 허망한 것이었음을 느끼게 한다.

일본의 정책은 기본적으로 전쟁 수행과 긴밀하게 연결된 국익 실현에 초점이 맞추어졌을 뿐, 막상 동남아시아에 대한 이해는 부족했다. '남방권은 지리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복잡하다. 문화와 역사도 복잡하여 올바른 질서가 형성되지 못했다. 이런 남방권에 대한 영국, 미국, 네덜란드의 지배는 자신들만을 위한 것이었고 남방권을 위한 100년 계획이 없었다. 그들을 제거하고 새로운 질서를 가져오려는 것이 대동아전쟁의 목적이다. 이 전쟁을 통해 남방권 주민은 황국의 새로운 지도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이 동남아시아를 대하는 인식의 전제였다(P137).
일본의 군부와 정부는 전황에 따라 시책을 결정했으며, 예상이나 기대에 어긋나는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애초의 구상을 변화시켰다. 궁극적으로 미국에 대한 대응을 의미하는 '남방 작전'도 중일전쟁의 전개 및 유럽의 전황에 연동되면서 구체화되었다(P140).

동남아시아 국가 중에서 유일하게 식민지 상태에 있지 않았던 타이는 일본에 대해 협조적이었다. (...) 타이는 1938년부터 영국 프랑스와 거리를 두면서 일본으로 기울기 시작했으며, 1940년에 결정적으로 가까워졌다. 타이으 피분(Phibun) 정권은 1940년 10월 일본군의 북부 베트남 진주를 인정했으며, 일본이 싱가포르를 공략할 때 타이 영토를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기로 밀약을 맺었다. 그 대신 일본은 타이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사이의 국경분쟁을 타이에 유리한 형태로 중재하기로 약속했다(P114). 1941년 12월 21일 일본과 타이는 공수동맹조약을 체결했다. 이어 1942년 1월 25일에 타이는 일본 측에 서서 영국과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다(P115).

이 책을 읽으며 충격을 받은 부분 중 하나가 타이 피분 정권의 친일 행보였다. 게다가 일본이 영국과 미국에 선전 포고를 할 때 그 편에 섰다니 놀라웠다. 타이 국민은 과연 이 역사를 알고 있을까, 아마도 이 시기 유일한 독립국이였는데 자랑스럽게 그리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 시기 타이의 역사를 확인해봐야겠다라는 욕심이 생겼다.





'대동아공영권'을 지정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그 침략적 성격을 합리화하는 효과를 낳는다. 일본은 섬나라이기 때문에 대륙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논리는 영토 확장을 위한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을 불가피한 것으로 정당화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여기에 민족의 번영과 쇠퇴에 따라 영토가 확장되거나 축소된다는 민족 국경론이 결합되면 우수한 민족이 열등한 민족을 침략하여 지배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며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런 일본지정학에는 아시아의 지리적 근접성과 동문동종, 황도사상이 내포되어 있다(P149).

5, 6장에서는 일본의 아시아 지역에 대한 학문 연구와 아시아학의 해외 교류에 대한 내용을 다룬다. 일본이 남진정책을 펴며 여러 문화단체를 세우고 식민지인 타이완, 남양 연구를 철저히 연구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프랑스는 오래도록 동남아시아에서 영향력을 발휘했고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기에 앞선 정보들이 많았다. 일본은 이를 흡수하며 프랑스와 일본 관민단체는 긴밀히 교류하였다.이런 것들이 일본의 남진 정책에 도움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보론으로 이 지역으로 간 조선인들에 대한 역사를 다루고 있다. 

남양군도로의 조선인 이주는 1910년대 후반 사이판에서 제당업을 시작했던 니시무라척식의 조선인 인부 채용이 최초의 사례로 보인다. 당시 밀림으로 덮인 섬을 개간하여 사탕수수를 재배하고 제당공장을 설립하기 위해 조선인 인부 400여명을 데려갔다고 한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1920년에 설탕 가격이 폭락하여 회사가 해산되자 조선인 인부들은 그대로 섬에 방치되어 조선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P240). 1939년 이후 전시체제로 들어가면서 조직적 강제동원으로 조선인 이주 노동자의 수가 급증한다. 일본은 남양군도에 대한 척식사업에 힘쓰는 한편, 군사 목적의 대규모 토목 공사를 시작했다. 공사에 투입할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오키나와인에 이어 조선인과 타이완인에 대한 조직적인 모집과 동원이 개시되었다(P242). 조선총독부가 알선을 의뢰하면 도 당국에서는 군에 통첩을 보내어 모집을 의뢰했다. 농업 노동자는 가족 단위로 모집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노무자는 거의 대부분 "20세 이상 40세 미만의 신체 건강한 조선인 남자"가 모집 대상이었다. 그들은 품팔이 노동을 하더라도 조선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복지를 찾아 멀리 남양으로 품팔이를" 선택했다.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이주해서 활동하는 조선인들이 있긴 하였으나 정확한 수치는 알기 어렵다고 한다. 남아 있는 자료는 일본 정부의 조사 자료인데 이를 그대로 믿기 어렵고 수치도 제각각이라는 한계도 지닌다. 
동남아시아에서 이 시기에도 고려인삼에 대한 인기가 높았던 것 같다. 고려인삼은 조선 후기에도 이 지역으로 공급되었고, 20세기에도 각지에서 인삼 행상을 볼 수 있었다. 싱가포르의 한 조선인 인삼 상인이 1930년 말에 조선의 신문사로 보내온 편지에 따르면, 당시 남양일대 즉 필리핀, 인도, 중국, 타이, 말레이반도, 네덜란드령 군도 등에는 조선인 동포가 약 500~600명 있으며, 그들의 직업은 교원과 학생, 관공리, 잡화상과 약종상 등에 종사하는 10여 명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고려인삼 상인이었다(P246). 
일본 정부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동남아시아 지역에 일본인의 이주는 늘었으나 조선인 이주자는 크게 늘지 않았다. 다만 현지의 화교들은 중국과 지리적으로 접해 있어 반일운동에 재정적 지원을 제공했다. 특히 싱가포르는 중국과 가까워 중국 혁명파의 중요 거점이었다. 한국의 독립운동가들도 싱가포르에 거점을 마련하고자 여러 차례 시도했다(247). 1914년 10월 홍명희 등은 중국의 신해혁명에 자극을 받아 독립운동 자금 확보 기반을 마련하고자 싱가포르를 방문하였고 현지의 한인들과 중국의 혁명가들과 접촉하였다. 또 1920년 안창호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필리핀으로 이전하고 만주 지역의 조선인들을 이주시키고 독립운동기지로 개척하려는 방안을 구상하기도 했다. 1931년 1월 흥사단의 양우조를 시찰 특파원으로 임명하여 인도네시아 지역에 대한 독립운동 기지 개척을 고민하기도 했다. 같은 시기 양기탁과 김규식은 보르네오 섬에 독립운동기지를 개척하려는 의사를 갖고 있기도 했다. 거리상 가까운 중국인 화교들이 싱가포르에서 독립운동을 벌인 것은 그리 놀랍지 않으나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이 먼 곳까지 와서 당시를 독립운동의 방향을 모색하고 다양한 계획을 수립하고자 노력했다는 것에 놀랐다. 비록 실현되지는 못했으나 우리가 아시아에서 중국, 일본, 조선을 넘어서는 러시아 정도로 독립 운동 범위를 좁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1938년 4월 육군특별지원병제도가 실시되었고 1943년에는 학도병을 모집, 1944년부터는 징병제 실시에 따라 조선인을 대상으로 하는 징병검사 및 강제 징집이 시작되었다. 1944년과 1945년 2년에 징집된 조선인만 약 10만 명에 달했다. 조선인 장병은 조선군에 배속되었고 분산 배치되었다. 조선군은 원래 북방을 겨냥하였으나 1942년 이후 남동태평양 방면으로, 동부 뉴기니 전선이나 필리핀 전선으로 전출되어 패전 때까지 그곳에 배치되었다. 
일본이 동남아시아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연합군 포로를 감시하기 위해 조선총독부 정보과에서 1942년 포로감시원 모집을 시작한다. 모집 지원자가 적자 강제 모집을 이용하여 차출하기도 했다. 그렇게 많은 조선인 포로 감시원들이 일본군의 탈을 쓰고 동남아시아 전선 각지에 배치된다. 이들은 전후 전범재판에 서며 사형을 당하거나 형량을 받고 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고통에 내몰렸다. 

일반적으로 '동남아시아'라는 말은 영어 'South East Asia'로 번역된다. 1943년 8월에 열린 회담에서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처칠 영국 수상이 '동남아시아사령부(South East Asia Command)'를 설치하기로 합의할 때 등장한 용어이다. 당시에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대륙부 및 도서부 동남아시아 전역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했다고 한다(P257). 이 동남아시아라는 용어를 일본도 그렇고 우리도 사용 중이다. 
한국에서 동남아시아 연구는 1990년이 되어서야 동남아시아 전문가 주도 하에 시작되었다. 서구에서는 정치학, 인류학, 역사학 등 다양한 방면으로 지역 연구가 이루어졌고 일본에서는 여기에 경제학에 대한 연구 조사도 이루어졌으나 한국은 정치학의 범위에서만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는 동남아시아 역사 전공자가 많지 않고 전공한 이들도 서구에서 공부를 하다 들어온 이들로 그곳에 축적된 학문에 의존하는 측면이 많았던 탓이다. 
제국주의에 의해 식민화된 동양은 스스로를 표상할 수 없었기에 서구라는 타자에 의해 표상되었다. 그리고 탈식민지 시대로 접어든 이후에도 구(舊) 식민지의 학문 연구에 미치는 식민지 종주국의 영향력은 강력하다. 식민지학의 전통이 아직도 잔존하고 있는 것이다(P260). 

한국에서 동아시아는 오래도록 한국, 중국, 일본의 삼국과 베트남 정도에 한정하여 좁은 범위로 인식하고 있었고 일본의 연구도 식민지학의 구도 하에서 구축되어 있었던 측면이 있다. 따라서 한국과 일본 모두 미래 탈식민주의 역사학을 위해 동남아시아 역사의 연구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 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 일본 제국주의의 큰 부분을 차지했던 남진 정책과 대동아공영권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가 동남아시아에서 행했던 정책들을 살피며 그들의 근대 역사를 간접적으로 확인해보는 기회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들의 근대 역사를 좀 더 들여다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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