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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동방의 애인.불사조

category 리뷰/책 2022. 12. 19. 10:28

"왜 우리는 이다지 굶주리고 헐벗었느냐??"
전 세계의 무산대중이 짓밟히는 계급이 모두 이 문제 밑에서 신음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이 문제를 먼저 해결치 못하고는 결정적 답안이 풀려나올 수가 없다 하였다. 따라서 이대로만 지내면 조선의 장래는 더욱 암담할 뿐이라 하였다.
(...)
과학적으로 또는 논리학적으로 설명은 되지 못하여 대단히 간단하나마 그럭저럭하여 그 당시 그 곳에 재류하던 일부의 지도자들과 또 그들을 따르는 청년들은 앞으로 나아갈 목표를 바꾸고 의식을 전환하였던 것이다.
그 새로운 길로 매진하기 위하여는 무엇보다도 굳은 단결과 의식을 전환하였던 것이다.(P81~82)


심훈의 대표작은 「상록수」와 「그날이 오면」 정도일 것이다. 심훈 사후 80주년이 되는 2016년 심훈 전집 시리즈가 기획되었는데 이 책에 실린 「동방의 애인」과 「불사조」 는 각각 1930년, 1931년에서 1932년 조선일보에 연재된(그러다 중단) 소설이었다.  


 「동방의 애인」은 제목이 그다지 끌리지 않았으나 1920년대 상해를 배경으로 실존 인물인 박헌영, 주세죽, 김단야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라고 하길래 읽어보게 되었다.

박진은 인삼 장수 행세를 하면서 상해와 조선을 오가는데 정열과 모험심이 투철한 이다(그는 나중에 추천으로 군관학교에 들어가기도 한다). 배영숙은 기독교 장로의 무남 독녀로 남부러울 것이 없는 여인이다. 김동렬은 이지적이고 침착하며 치밀한 성격으로 잡지사에서 일하고 있다.  강세정은 학당의 학생으로 시위운동에 앞장을 서서 지휘하며 감옥을 오간다. 

김동렬과 박진은 기미년 독립 운동으로 감옥에서 1년이 넘는  형기를 마치고 나온다. 그들은 조선이 아닌 해외로 눈을 돌리며 상해로 떠날 결심을 하게 된다.

"넓은 무대를 찾자! 우리가 마음껏 소리 지르고 힘껏 뛰어볼 곳으로 나가자!"
하고 부르짖은 것은 서대문 감옥 문을 나서자 무학재를 넘는 시뻘건 태양 밑에서 두 동지가 굳은 악수로 맹세한 말이었었다. 그들의 가슴 속에는 정의의 심장이 뛰놀고 새로운 희망은 그들의 혈관 속에서 청춘의 피를 끓였다. (P36)

강세정은 둘이 상해로 훌쩍 떠난 것을 알고 편지를 보내 그 곳으로 갈 것을 예고한다. 

저도 떠나겠어요! 당신네들이 의를 위하여 피를 흘리실 때면 붕대 한 조각이나마 감아드릴 사람도 필요하겠지요! 지난날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하여 당신의 뒤를 따른다는 것보다도 저는 이 땅의 이슬을 받고 자라난 한 사람의 여자로서 마땅히 밟아야 할 길을 찾기 위하여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P49)

강세정은 참으로 강단이 있는 여성이지 않을 수 없다.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고 판단하고 그 결심을 이행하는 모습이다. 아무튼 세 사람은 그렇게 상해에서 조우한다. 
"지금 우리들은 지내는 게 말씀 아닙니다. 한 달이 넘도록 외상 밥만 무쪽같이 먹고···." (P64)
의기와 혈기로 호기롭게 떠난 청년들의 상해에서의 생활이란 기가 막힌 것이었다. 게다가 상해 임시정부는 내부 분열로 어지러운 상태였다. 
"여기 형편이 그렇도록 한심한 줄은 몰랐어요. 무슨 파 무슨 파를 갈라 가지고 싸움질을 하는 심사도 알 수 없지만, 북도 사람이고 남도 사람이고 간에 우리의 목표는 꼭 한 가지가 아니에요? 왜들 그럴까요?" (P66)

배영숙은 야학에서 강세정을 만나게 된다. 강세정은 조선에서 학당 지휘로 동무들 사이에서 이미 유명했기에 영숙이도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영숙이는 세정이와 다르게 고생을 모르고 자라기도 했고 밝은 성격에 말이 많은 편이었다. 둘은 그렇게 연을 맺는다.

동렬이는 혁명이 우선이므로 사랑은 사치라고 생각하여 세정이에 대한 연모를  애써 외면하려 한다. 하지만 더는 그 마음을 거부할 수 없었고 결국 둘은 결혼을 하게 된다. 
영숙이는 진이와 애정이 싹튼 상태였다. 하지만 둘은 환경이 너무도 달랐고 함께 영화를 보러 간 자리에서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진이는 군관학교를 입학하게 되면서 둘은 헤어진다.

사진 속의 사관은 억지로 아내를 뿌리쳤다. 그때에 그의 인형과 같은 딸이 달려들어 아버지 무릎을 얼싸안고 앵두를 똑똑 따더니 (당신도 나와 같은 조그만 다른 계집애들의 아버지를 죽이러 가십니까?) 라고 쓴 자막이 비친다. 영숙이는 두 번 세 번 읽어보더니 진이의 소매를 끌어당기며 "박진 씨도 군인이 되시면 수많은 젊은 여자의 사랑하는 남편을 죽이시겠지요?" 진이는 소매를 뿌리치고 화를 더럭 내며 "그 따위 하나님 냄새 나는 인도주의는 걷어치우시오. 우리는 눈은 눈을 빼서 갚으면 그만이지요!" (P97)

동렬이는 국제당 청년대회에 참여할 조선인 대표로 뽑혀서 모스크바로 가게 된다. 

대회는 사흘 후 크렘린궁전 안에서 열렸다. 장내는 모두 새빨간 포장을 두르고 중앙에는 레닌과 마르크스의 사진을 건 것을 위시하여 각국 말로 쓴 슬로건이 빽빽하게 가로세로 붙었다. 모여든 대표는 일백오십명 가량인데 방청자는 세 갑절이나 되었다. 
그들은 에스페란토로 혹은 제 나라 말로 그 나라 그 지방의 정세를 보고하고 장래의 방침과 전술에 관한 토론을 하느라고 사흘이나 보냈다. 나흘 되는 날 동렬이는 조선말로 간단명료히 보고와 격려하는 연설을 하였다. 동양대학의 교수가 통역을 하자 만장은 박수로써 알아들은 표시를 하였다. (P130~131)

박헌영과 주세죽은 실제 연인이었는데 소설에서 김동렬과 강세정에 해당한다. 박헌영은 말이 없고 다른 학생들과 잘 어울리는 편은 아니었으나 침착하고 사려가 깊었다고 한다. 심훈은 박헌영의 경성보고 동창생으로 4년 동안 같이 생활했고 상하이 시절 혁명운동에도 함께 했기 때문에 그를 잘 알았을 것이다. 세정은 소설 속에서 총명하다고 묘사되어 있는데 실제로 주세죽은 용모가 빼어났고 3.1 운동에도 참가했으며 상하이로 망명, 사회주의를 수용하여 비밀결사 고려공산청년회와 고려공산당 조직회에 가담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소설 속 박진은 김단야일 것이다. 동렬이의 성격과는 대조적으로 묘사된 박진의 모델 김단야도 실제로 3.1운동에 참여했고 상하이 망명 이후 중국의 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소설 속 이야기가 실제와 그대로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실제의 삶은 실제 역사를 통해서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다. 


「불사조」는 함께 들어 있지 않았다면 솔직히 읽을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읽고 나서 친일파와 조선의 가부장제를 꽤나 잘 그려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계훈은 조선의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날린다. 그의 아비는 장관이고 집안은 윤택하니 남부러울 것이 없다. 김계훈은 이미 정희라는 처와 아들인 영호가 있었으나 독일에서 유학을 하며 반주자로 줄리아라는 여자를 사랑하게 된 후로 조선에는 다시 돌아가지 않을 생각을 한다. 허나 스투핀이라는 연적이 나타나며 호시탐탐 줄리아를 노려대는 대는 통에 겸사 겸사 조선으로 들어오게 된다. 

돌아온 뒤에 귀국 연주회를 하면서도 김계훈은 처와 자식을 볼 생각도 하지 않고 호텔에서 줄리아와 함께 지낸다. 정희의 오빠인 정혁은 김계훈에게 분노하고 그를 손보기로 결심한다. 

'이제까지 우리의 목표는 너무나 컸다. 눈앞에 닥치는 조그만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엄청나게 큰 것만 바라보고 대들었다. 그 결과 상한 것은 내 몸뿐이다. 이를테면 사람 없는 벌판에서 맹수의 떼를 만났다고 하자. 우리는 눈앞에 달려드는 조그만 새끼 짐승은 업신여겨 내버려두고 큰 짐승이 웅거하고 있는 굴을 향해서 돌을 던졌다. 활의 시위를 당겼다. 그동안에 조그만 짐승들에게 둘러싸이고 말았다. 눈은 아직도 먼 곳을 바라다보나 손발이 어느 틈에 꼼짝도 못하게 된 바에야 쓰러지는 수밖에 없다. 어리석었다! 과연 어리석었다!' 혁이는 저 혼자 흥분이 되어 지난 일을 뉘우쳤다.
'발등 위의 불부터 끄는 것이 순서다. 내 신변에 달려드는 놈은 크나 작으나 닥치는 대로 물어박질러야 한다. 큰 것만 바라다보고 주저하다가는 나 자신이 먼저 거꾸러진다.'
여기서 '우리'는 독립운동가들을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의 이상은 컸을 것이다. 일제로부터 독립을 해야한다는 열망, 결의. 그러나 친일파들은 부를 늘리며 법 위에 잘만 살아가고 민중들은 점점 가난해지고 압박당하는 현실 속에서 그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이렇게 정혁은 먼 이상을 내려놓고 자신의 분노를 돌릴 대상을 찾게 된다.

어느 날 김계훈은 협박 편지를 받고 자신을 공격할 것이라는 생각에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 결국 아버지에게 SOS! 김장관은 집안의 뒷배를 봐주는 삼정 경부에게 은밀히 사정을 알아보게 한다. 

강흥룡은 인쇄직공으로 일하며 인쇄직공동맹에서 열성적으로 일하는 조직원이다. 그는 정희 유모의 아들이었다. 덕순은 여직공 대표인데 흥룡과 서로 의지하며 사랑하는 사이다. 

협박범이 알려온 장소에 삼정 경부가 나갔으나 놓치고 만다. 얼마 후 계훈의 음악회에서 정혁이 사회를 보던 날 일이 벌어진다. 갑작스레 바이올린 줄이 끊어졌고 공연이 중단되자 장내의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아까부터 제일 큰 목소리로 재훈이를 꾸짖던 젊은 사람은 돌아서며 선동연설이나 하는 어조로
"여러분! 저 따위 부르주아의 자식을···." 하다가 금세 말이 끊겼다. (P242)
삼정 경부는 부하와 함께 범인이 나타날 것이라는 짐작 하에 대기 중이었고 붙잡힌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줄리아는 김계훈에게 처자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조선에 대해서도, 그에게도 이미 어느 정도 실증이 난 상태였다. 김계훈은 그녀에게 빌어보았으나 어림없는 수작이었는데 그가 하는 넋두리라는게 어찌나 한심한지.
"내가 잘못된 것은 조선 놈으로 태어난 것뿐이요! 비극의 씨는 이십여년 전에 우리 부모라는 사람들이 뿌려 놓은 것이지 내야 무슨 잘못이 있고 죄가 있겠소?"
계훈이는 눈물 콧물이 뒤범벅이 된 얼굴을 쳐들고
"아 조선! 조선 놈!"
하고 부르르 떨며 제 나라를 저주하였다.
줄리아는 수건으로 더러운 것이나 묻은 듯이 얼굴을 닦으며 '흥 남은 제 고국이 그리워 죽겠다는데 조선이 싫으면 제가 어디로 갈 텐고' 하고 속으로 코웃음 쳤다. (P252) 
참으로 너무 찌질해서 보기가 민망할 따름이다.

줄리아가 떠나간 뒤 계훈은 스투핀과 같이 있을 거라는 질투에 사로잡혀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 질투가 방아쇠가 되어 결국 둘이 함께 있는 현장을 급습하게 되고 몸싸움을 벌이다 자신의 방아쇠에 팔을 맞고 만다. 피아니스트에게 그것은 치명상이었고 회복된다고 해도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물론 소설 속에서 친일파 자식이 이런 일을 당했으니 고소는 하였으나 실제 이런 일이 일어났겠는가 생각하니 또 씁쓸해졌다. 

감옥에서 취조 및 고문을 당하고 한참을 지나 강흥룡은 다리 병신이 된 채 출옥한다. 덕순은 그를 기다려왔고 그렇게 둘은 재회한다. 김계훈을 노린 것은 정혁이었지만 강흥룡은 음악회에서의 발언으로 괜히 고문을 받고 감옥 생활을 한 셈이었다. 억울할 법도 했을 것이다. 
"정혁이란 인물은 우리 운동 선상에서는 벌써 과거의 인물인걸. 소 '부르'의 근성이 골수까지 밴 사람이라면 더 평할 여지가 없겠지요." (P403)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그는 이상론자에 가까웠던 것 같다. 독립에 대한 열망이 있기는 했지만 민중들 사이에서는 그도 같은 부류의 인물로 취급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 해도 시부모를 모시고 살며 아이를 낳고 홀로 키우던 정희가 계훈이가 자신에게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집을 떠날 결심을 하게 된 것은 다행이었다. 
이대로 격이 난 채로 지나다가는 앞으로 무슨 욕을 당할는지 모른다. 도둑질을 했다고 모함을 할 수도 있겠고 나중에는 무슨 음행이나 있는 듯이 뒤잡을 것 같으면 지금보다 몇 갑절 되는 치욕을 당할는지도 보증할 수 없는 노릇이라 하였다. '이 놈의 집에서 뭘 바라구 있었나? 본 건 다 보았다. 그러면 애매한 누명을 쓰구 쫓겨나기 전에 내 발로 걸어 나가면 고만이 아닌가' (P424)

불사조는 막장 소설 같아서 재미를 보장한다.

두 소설 다 연재가 중단되지 않고 마지막까지 이어졌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아마도 대표작 만큼의 흥행이 보장되었을 것이고 또 현재의 우리에게도 기억에 남는 작품이 되었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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