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래 씨는 오스트레일리아 법정의 재판에서 전쟁 범죄인이 되었다. 양칠성은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에 참가해 인도네시아를 재침략한 네덜란드군에 의해 총살되었다. 그리고 1975년 인도네시아의 독립 영웅으로 추서되었다. 이상문 씨는 항일 비밀 결사인 고려독립청년당 당원으로 옥고를 겪었고, 2011년 11월 17일 한국의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다. 전후의 행보는 다르지만, 그들은 모두 1942년 6울 포로 감시를 위해 모집되어 부산 노구치 부대에서 훈련받은 군무원 3,016명의 일원이었다(P251).
일제 식민사학 총서인 『남양과 식민주의』를 읽으면서 이 책을 읽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일본이 대동아공영권을 주장하며 전쟁을 남방까지 뻗치게 되었을 때 피해는 현지인만 입은 것이 아니었다. 많은 조선인들이 강제 동원 등으로 이 곳에 왔기 때문이다. 실은 4월에 읽었던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를 읽으면서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미루다가 8개월이 지나서야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얼마 전 읽은 책으로 가해자와 피해자, 희생자에 대한 생각을 최근 들어 많이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책은 여러 모로 복잡한 생각을 갖게 했다. 그리고 1923년생 최영우와 자신의 의지로, 반강제로 또는 강제로 남방에 끌려간 많은 식민지 청년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면사무소에서 남방에서 포로를 감시하는 일을 할 사람을 모집하고 있대. 월급 50엔에 2년 계약이래. 나도 갈 생각인데 너도 가지 않을란가?"라고 두 살 위의 선배가 권유했어요. 1942년 5월의 일입니다. 그때 저는 열일곱 살이었어요. 이미 청년단과 소방단에 호출되었으니 어차피 어딘가로 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어요. 시절이 시절인 만큼 집에서 한가하게 있을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소방단은 단순히 '불끄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경단' 비슷한 단체로, 일정 나이가 되면 자동적으로 가입하게 됩니다. 청년단과 소방단은 예전부터 조선에 있었던 조직이 아니라 전시 체제로 돌입한 뒤에 만들어졌다고 기억해요. 정기적인 모임은 아니었지만, 때때로 호출도 하고 나가지 않으면 왜 나오지 않았냐고 추궁했어요. 집합 장소인 학교나 면사무소 광장에서는 호출된 인원이 모여서 경찰서장으로부터 시국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는 했어요. 그런 경우 군가는 으레 따르기 마련이었고요(P44~45).
일본이 전시 체제를 확장하면서 조선의 청년들은 이런 식으로 차출되었다. 모집을 하였다고 하지만 인원이 채워지지 않자 면사무소에서 반강제로 인원을 꾸려 강요로 보내기도 했다. 조선에 있다가는 어떤 형태로든 끌려갈 것이 보이는 상황에서 선택지가 얼마나 있었을까. 그는 그렇게 부산의 노구치 부대에서 훈련을 받고 일본군이 되어 타이로 향한다.
1944년 6월도 지나고, 당초 계약한 2년 기한이 지났지만 귀환이 이루어지지 않는 바람에 조선인 군무원 사이에는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어요. 타이 어딘가에서 포로와 도망한 조선인 군무원이 나왔다는 소문도 돌았어요. 타이무앙에 있을 때, 1945년 1월 자바에서 발생한 고려독립당 사건을 듣고 놀랐어요. 조선인 군무원들이 일본군 상관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고, 서로 총격을 가했다는 겁니다. 각 부대에 헌병대가 배치되고, 우리 군무원이 소지한 총도 회수했어요. 수용소 안을 순회하는 위병도 그때까지는 우리 군무원이 하고 있었는데, 다른 부대의 일본인을 불러서 하게 했어요. 우리 군무원은 한자리에 서서 감시하는 보초 근무만 서게 했어요. 일본인 상관과도 왠지 뜨악하게 되었고, "조선인 군무원 주제에"라며 모멸하고는 했어요(P57).
간신히 홍콩까지 와서 '이제는 됐다'고 생각하던 참에 체포된 만큼 충격이 컸습니다. 풀려났다가 다시 체포된 제 경우는 전범 동료들이 겪은 경험 중에서도 최악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체포되어 기소장을 받고, 기소장이 각하되어 귀환하는 배를 타고 홍콩까지 오고, 다시 체포되어 창이 형무소로 끌려 가고, 그 후 겪은 최악의 시련... 저는 약 3주 후인 1947년 2월 18일, 영국 군함에 실려 창이 형무소로 되돌아갔습니다. 그 콘크리트 담을 다시 쳐다보며 전보다 훨씬 심한 중압감에 짓눌려 숨이 막힐 듯했어요(P77).
계약 기간이 지났지만 전장의 상황은 좋지 않았고 그는 결국 종전까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후 전쟁 재판으로 그는 1차 무죄를 선고받고 고향으로 돌아가다 다시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는다. 아무리 전쟁 범죄라고 하지만 제대로 된 변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고 1심이 최종심이 된다는 것은 확실히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잘못되었을지 모를 판결을 받았다고 생각하니 기가 막힌다.
대부분의 수용소 관련 재판은 시내에 설치된 열 군데의, 방청객도 거의 없는 법정에서 진행되었어요. 재판을 위해 서로 접촉하지 못하게 독방에 감금되는 동료가 늘어나기 시작했어요. 독방으로 옮겨진 동료에 대한 경비병의 폭행은 점점 심해졌어요. 이런 환경에서 우리는 취조를 받고, 자신의 증언과는 상당히 다른 내용의 서류에 서명하라는 요구를 받기도 했어요. 어떤 사람은 백지에 서명하라는 요구를 받기도 했고요.
우리에게는 법정에서의 유일한 자기 변론마저도 허용되지 않았고, 또한 기소 사실에 대한 반증마저 거의 허용되지 않았어요. 영어로 진행된 재판이라 애당초 언어라는 면에서 불리했기 때문에 항변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어요. 재판은 그야말로 졸속 재판으로 1심이 곧 최종심인 군사 재판이었어요(P67).
이시이 대좌의 "대본영이 서두르라는 명령을 자신은 받지 않았다"라는 발언은 책임 회피일 뿐이지요. 소장이 대본영 명령을 모를 리 없어요. 왜 "수용소에 관한 문제는 내 책임이며, 군무원에게 책임이 없다"는 한마디를 해주지 않았을까, 증언을 서 준 것은 고마웠지만 납득할 수 없었어요. 제 재판은 고소인은 단 한 명도 법정에 나오지 않은 서류상의 재판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소 사실에 반론도 할 수 없었습니다. 스기마쓰 변호사는 피고는 가장 말단인 군무원으로 권한이 없었다, 중형을 부과해서는 안 된다며 정상 참작을 요구하는 변론을 했어요. 한편, 오스트레일리아 측 검사의 논고는 낱낱이 통역되는 것도 아니어서, 무슨 내용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끝났어요.
재판관은 기소장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 같았어요. 휴정하고 옆에 딸린 별실에 들어갔다 몇 분 후에 나와서 판결 이유는 달지 않고 '"death by hanging!(교수형)"이라고 선고했어요(P87).
이학래는 전후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8개월간 사형수로 수용되었다. 나중에 20년형으로 감형되었고, 11년 가량 구금되어 있다가 1956년 10월 가석방되었다. 그러나 '일제에 협력한 사람'이라는 낙인 때문에 그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에 눌러앉게 되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발효되면서 연합국 전쟁 범죄자의 형 집행 대상자로 일본은 (자신들을 위해) 전쟁에 뛰어든 조선인들도 포함시켰다. 형刑은 일본인이어서 살게 하면서, 보상은 일본인만 대상으로 했다. 필요할 때는 써 놓고 뒤통수치는 것이 아니고 무어란 말인가.
한국에서는 친일 문제가 청산되지 않은 상태에서 경찰, 군인, 정치인 등 상부 조직의 지도자들이 친일 부역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았음에도 조선인 전범 재판자들에 대하여 '부일 협력자'라는 딱지를 붙이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이들은 조국에서 버림받고 사형을 받거나 포로들에게 가했던 행위로 고통받는 세월을 타지에서 보내며 자살하거나 정신병으로 고통을 받거나 밑바닥부터 경제 활동을 시작해야 했다.
1965년 12월 '한일 기본 조약'과 '청구권 협정'이 발효된 이후 '대일 민간 청구권' 대상은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발생한 피해로 한정되어 전범 재판에 의해 사형된 경우처럼, 전후 사망은 청구 대상에서 제외되면서 이들은 그야 말로 낙동강 오리알이 되었다. 일본 정부는 보상이 한국 국내 문제로 되었다는 이유로 더 이상 그들의 호소에 응하지 않았기에 피해는 고스란히 그들에게 전가되었다. 이 때의 한일 협정은 여전히 한일 관계에 악영향을 주며 발목을 잡는 계기로 작용한다.
1990년대 한국의 민주화 이후 위안부, 강제 동원 문제 등이 수면 위에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도 용기를 내기 시작했다.
1991년 11월 12일 도쿄 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습니다(P178). 저는 전범으로 고발된 인과 관계 및 일본 정부의 부조리한 처사에 주안점을 두어 다음과 같이 진술했습니다.
① '모집'이라고는 하지만, 반은 강제적인 압력의 결과였다는 점
② 2년 계약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점
③ 군무에 관한 책임을 전가했을 뿐만 아니라, 포츠담 선언 제10조,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 제11조에 따라 '포로 학대 죄'를 조선인 감시원에게 덮어씌우는 포로 정책을 구사한 점
④ 청춘만이 아니라 목숨까지 빼앗고 전후 처리에서도 희생을 강요하면서, 국적 조항을 이유로 '외국인'으로 취급해 원호에서 배제시키는 등의 차별 대우를 한 점(P179~180)
2003년 「일제 강점하 강제 동원 피해 진상 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고 다음 해 발효되어, 일본 식민지 지배하의 피해에 대한 진상 규명과 피해자 구제 움직임이 본격화었다. '군인·군무원·노무자·위안부 등의 생활을 강요받은 자가 입은 생명·신체·재산 등의 피해'를 본인·유족 등의 신청을 기초로 한 조사를 통해 피해 인정 여부를 판단 수용한다는 것이었다.
저는 곧바로 신청 서류를 작성했어요. 본인 또는 유족이 직접 신청하지 않은 동진회 회원, 그리고 사형자·자살자는 동진회 명의로 제가 신청 서류를 작성해 모두 육십팔 명의 피해 인정을 신청했어요. 그리고 2006년 6월 먼저 서른한 명에 대한 강제 동원 피해 인정이, 그 후 나머지 전원에 대한 피해 인정이 이루어졌습니다(P215).
가해자와 피해자, 희생자의 구분이 무 자르듯 명확하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들은 어떤 형태로든 연합군 포로를 감시하고 노동을 강요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전후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타지에서 망령으로 떠돈 세월을 생각하면 가해자라고 단언할 수도 없다. 잔혹했던 시간들이 아니였나 생각한다. 그 시간을 지나간 평범한 민중들에게 잔혹하지 않았던 일을 찾기는 어려울 것 같다.
저는 신년 수첩을 구입하면 우선 동진회 운동의 경과 등을 수첩의 맨 끝에 적어 넣습니다. 따로 유골 송환의 경과와 자살자에 관한 내용도 적어 넣지요. 매년 거의 동일한 내용을 반복해 베껴 쓰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그 해의 동진회 운동 방침, 또 가족의 연간 계획 등도 적어 넣습니다
2016년의 운동 방침의 첫 번째 내용은 "법안 재제출. 실현의 중대 고비"라고 적었어요. 아무리 힘들어도 살아 있는 한 그 실현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제 머리 속에는 항상 죽어간 동료, 그 중에서도 사형당한 동료들이 있어요(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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