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독립운동 열전》 1권에서 사건을 중심으로 잊힌 독립운동사와 한국근대사를 살펴보았다면 2권은 인물 중심으로 들여다본다. 그래서 2권의 부제는 <잊힌 인물을 찾아서>이다. 1권은 목차가 부제와 착 들어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있었던 반면 2권은 부제에 맞게 목차도 잘 구성되어 있는 편이다.
책의 내용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김단야, 홍범도, 김창숙, 주세죽, 김마리아, 이동휘 정도를 제외하고 이 곳에 등장하는 인물은 대부분 낯설었다. 여전히 우리는 임시정부, 한인애국단 등 알려진 독립운동 단체를 중심으로 한 인물들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을 했다. 때문에 앞으로도 찾아야 할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 많다는 사실을 꼭 기억할 필요가 있다.
1922년 조선공산당(내지당 또는 중립당)에 가담한 두 명의 인물이 있다. 김사국과 김한이다. 둘은 모두 당에서 손꼽히는 지도자였다. 김사국의 경우 동생인 김사민도 독립운동에 참여한 이력이 있어 놀라웠다(김사민은 신생활사 필화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1924년 7월 만기출옥했으나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태로 평생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아야 했다) . 김한은 김상옥 사건에 연루되어 김원봉과 비밀 교신을 하고 다량의 폭탄 국내 반입하려한 혐의로 형량 5년을 언도받는다. 그는 법정에서 총독정치가 얼마나 조선인의 삶을 파괴하고 있는지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했다. 교육과 산업은 물론이오 그 밖의 어느 방면을 보더라도 조선 사람은 '불평'과 '원한'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조선인에게 남겨진 것은 총독부 법령을 위반하거나 아니면 죽는 길밖에 없다, 김상옥 사건도 이 같은 총독정치가 만든 것이라고 토로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혁명을 언급했다. 그는 헤겔과 다윈을 인용하면서 혁명을 위험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실제로는 우주 만물이 살아가는 자연법칙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조선 사람이 자유와 해방을 요구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라는 주장으로 이어졌다.(P45) 김한의 진술에서 주목해야 할 요소가 또 하나 있다. 끝내 비밀결사 내지당(조선공산당)의 존재를 발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김한은 시종일관 해외 망명자들과 비밀리에 연락하고 폭탄 반입을 모의한 것이 자신의 개인적 판단이었다고 진술했다. 덕분에 내지당은 삼엄한 수사에도 불구하고 노출되지 않을 수 있었다. 김한은 일본 관헌들의 야수적인 취조 속에서도 비밀결사의 동료들을 보호하는 데 성공했다.(P46)
유림 독립운동계의 거목인 김창숙 선생에 대한 일화는 감동적이었다. 조선총독부가 경북 경찰부를 통해 망명자 김창숙에게 제안을 해왔다고 한다.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국내에 들어와 귀순한다면, 과거 '범행'을 모두 불문에 부치고 후대하겠다는 말이었다. 가옥을 새롭게 단장하고 논밭을 새로 사줘서 생활을 보장하겠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내희 숙씨는 경상북도 경찰부의 내용을 받아들여 전향 권유 편지를 베이징의 김창숙에게 발송했다. 총독부 당국이 이처럼 관대한 처분을 내렸으니 이제 가정의 즐거움을 누리기를 바란다고 권면하기까지 했다. 김창숙은 가까운 친족으로서 유교 고전학에 대한 담론을 나누고 문중의 대소사를 논의하던 사이였기에 실망감에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김창숙은 바로 붓을 들고서 답장을 썼다. 절교 선언이었다. 그는 아들 환기에게도 사정을 전했다. 문중에서 가장 믿고 의지하는 김황에게 편지를 써서 자초지종을 알리고, 내희 숙씨가 더 이상 일족의 일에 간여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P126~127) 자신의 일족의 잘못을 덮는 것이 아니라 단호하게 내치는 모습이 참으로 멋있었다. 이 일화야말로 대쪽 같은 선비의 꼿꼿함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 아닌가 생각한다.
빨치산 대장들 박종근, 박영발, 방준표들이 있다.
박종근에게 주어진 보직은 경북도당 위원장 직이었다. 29세였다. 열일곱 살부터 반일운동에 참가했던 만큼 혁명운동 경력이 벌써 13년째였다. 사상범으로 투옥된 기간만 3년 7개월이나 됐다. 대중운동의 현장 경험도 갖추고 있었다. (...) 그뿐이랴. 해외유학도 나녀왔다. 모스크바 조선당학교 2년간의 유학을 통해 견문을 넓혔고, 본격적으로 마르크스주의 이론도 배웠다. 실천과 이론, 어느 면에서 보더라도 잘 준비된 간부였다.(P199~200)
박영발은 해방 이후 정국에서 당과 노동조합 양 부문에서, 그리고 총파업 투쟁의 지휘 방면에서 없어서는 안될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장래 당조직을 이끌 중견 지도자로 지목받았다. 최고위 간부교육을 이수할 자격이 있다고 평가받은 것이다. 1948년 7월 그는 모스크바 유학길에 올랐다. 다소 늦은 나이였지만, 모스크바 조선노동당 간부학교 입학대상자로 추천된 것이다.(P221~222)
9월총파업은 조선공산당이 주도한 전국적인 노동자 파업투쟁을 가리킨다. 1946년 9월 23일 부산 지역 철도노동자 7,000여 명의 파업이 첫 출발점이었다. 경남도당 노동부장인 방준표의 역할이 중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가 맞섰던 대상은 대한노총, 무장경찰, 미군 헌병 '3자의 합작적 공세'였다. 9~10월에 걸쳐 "장렬한 피투성이 반항투쟁에 직접 참가 지도하였다"고 기록했다.(P237)
놀라운 것은 그들 모두 해방 이후 모스크바 유학을 가게 된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그들의 노동 투쟁 이력이 유학에 도움이 된 것 같다. 박종근은 12개의 과목 모두 5점 만점에 5점을 받을 정도였고 박영발도 그에 못지 않은 최상 레벨의 성적을 받았다고 한다. 세 사람 모두 박헌영의 좋은 평가까지 받은 것을 보면 실력자들이었음에 분명했던 것 같다.
여성 독립운동가 파트도 눈에 띄었다. 그 중 이덕요와 박신우, 송계월에 대해 말해보겠다.
이덕요는 사회주의자이자 페미니스트였다. 그는 함흥 자혜의원에서 간호원으로 일하다 의학 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유학,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 졸업 후 조선으로 돌아와 의사의 길을 걸었고 해마다 신년에 신문사들이 개최하는 '여류 명사 초청 가정문제 좌담회'에 초대되어 여성 문제와 가정 문제에 대해 발언할 정도로 명사였다. 문필과 단체 활동 등을 통해 여성해방운동에도 참여하였으며. 사회주의 운동에도 가담했다. 우리가 잘 아는 여성 최대 독립운동단체인 <근우회> 정치문화부에도 속해 있었다. 이덕요는 여성운동의 의의를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사명과 연관시켜 이해했다. 일간신문에 실은 한 기고문을 보자. 기고문에서 그는 오늘날 조선이 요구하는 여성은 "오랫동안 남성에게 유린되어 온 조선 여성의 해방운동"을 실행함과 동시에, 한걸음 더 나아가 "역사적 사명을 다하려는 대중운동과 악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언론 지면의 표현상 제약을 감안하더라도 여성운동과 노동운동을 연관 지어 포착하고 있음이 뚜렷이 드러난다.(P275)
박신우는 <근우회>의 선전 조직부에 있으면서 책사 노릇을 했는데 기획력, 실행력 모두 출중했다고 한다. 남편 김규열과 박신우 모두 코민테른 제공 고등 교육과정을 이수한 사회주의 엘리트였는데 1928년 초 블라디보스토크와 모스크바를 근거지로 조선공산당의 해외 부문 사업을 맡게 되어 갔다. P-3759 사건은 바로 '소련 국가폭력에 의한 조선공산당 서상파 망명자 그룹 탄압 사건'이었다. 소련 정치보위부는 피억압 민족의 해방을 위해 투쟁한 혁명가들에게 '일본제국주의의 스파이'라는 모욕적인 범죄의 낙인을 찍었다. 체포 6개월 뒤 사건 관련자 가운데 김규열, 김영만, 김중한에게 총살형이 집행됐다. 1934년 5월 21일이었다. 다른 두 사람은 한두 등급 아래 처분을 받았다. 윤자영은 노동수용소 8년 징역형, 박신우는 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노동수용소 이후 박신우의 운명에 대해서는 아직 알지 못한다. 관심을 갖고 주시한다면 언젠가 드러날 때가 있을 것이다. 이 탄압 사건의 피해자들은 뒷날 소련의 국운이 저물어가던 1989년에 비로소 소련 정부로부터 복권됐다. 55년이 지난 뒤였다. 너무나 뒤늦게 찾아온 정의였다.(P286)
송계월은 1930년 1월 제2차 경성 연합시위 사건을 주도적으로 모의한 혐의를 받았다. 글 실력이 출중해 문단에도 데뷔했고(<가두 연락의 첫날>) 잡지사 개벽의 기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1933년 폐결핵으로 23살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그래도 그녀의 전집이 두 권 남아 있어 다행이다.(<송계월 전집>) 그녀는 사상과 이론 문제에 관해서는 비타협적인 투사가 되곤 했다. 그녀와 교유하던 남녀 문인들은 말했다. "계월이는 그렇게 얌전하다가도 이론 투쟁에만 들어서면 여로하가 솟아오르는 기개가 있어 건드리기가 어렵다." 한걸음도 사양하지 않는 조리 있는 언변과 불길을 일으키는 듯한 열정으로 인해 무리 가운데 우뚝 섰다고 한다.(P292)
1962년 3.1절 일산 신문에 이채로운 보도 기사가 실렸다.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기로 예정된 한 인물의 자격을 취소하기로 결정했다는 기사였다. 문제의 인물은 장재성이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지도자로 손꼽히는 이였다. 그에게는 건국공로훈장 단장을 수여할 예정이었다. 단장이란 포상 등급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1등 중장, 2등 복장에 뒤이은 3등 훈장이다. 해방 후 처음 시행하는 독립유공자 서훈이었다.
왜 서훈을 취소했는가? '공산당에 관련된 혐의' 때문이었다. 독립운동에 커다란 공로가 있다 하더라도 사회주의 사상과 운동에 공감한 경우에는 유공자 서훈을 하지 않겠다는 지침이었다.(P307~308)
이 사례 뿐 아니라 사회주의 운동의 이력이 있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 기준에 거부되거나 선정되었다 취소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다. 독립유공자는 말 그대로 독립운동 이력이 있는 운동가에게 전달하는 훈장이다. 그것에 정치적 이유나 이념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독립유공자 서훈 기준이 아무쪼록 개정되기를 바란다.
이 책을 통해서 수면 아래 잠자고 있던 다양한 독립운동가들의 이력을 만날 수 있었다. 이들 중 한 둘이라도 더욱 깊게 들여다보는 기회가 된다면 이 책의 역할은 그 이상을 하는 셈이라 생각한다. 몰랐던 인물들을 알게 되었고 일대기 뒤에 숨겨진 뒷 이야기까지 만날 수 있어 감사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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