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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조선총독부의 조선사 자료수집과 역사편찬

category 리뷰/책 2022. 10. 19. 09:47
망국책임론은 일제에 의한 문명화의 논리로 귀결되며, 그것이 근본적으로 식민지 근대화론 재등장의 배경에 깔린 서사 구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수많은 식민사학 비판이 있었지만 대부분 고대사부터 조선시대사에 집중되었고, 식민사학의 근대사 서술에 대한 비판은 본격적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이 책이 식민사학으로서 조선총독부의 조선사 자료수집과 역사편찬 중에서도 특히 고종시대사 인식에 주목하는 이유이다. - P11
 
일제 식민사학의 논리는 정체성론과 타율성, 당파성론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 귀결은 망국책임론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일제 병합의 논리로 이용되었다(해방 후에도 역사계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정작 근대화 시기인 대한제국기와 병합 전후의 역사 서술에 대한 고찰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때문에 이 책은 일제 시기 조선총독부가 주도한 역사 서술 중 고종과 순종 시대에 주목한다.
개인적으로 고종과 순종 시대의 역사는 자료가 많이 남아 있으나 들여다보기가 꺼려진 것이 사실이다. 일본 관변학자들의 구미에 맞게 씌어졌을 것이라 생각하기에 볼 가치가 있는가 단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저자의 말처럼 정작 이 시대에 씌여진 역사 서술은 근현대 사학자들이 사료로 많이 활용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활용 수단이 없어서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거나 아니면 나처럼 아예 들여다보지 않거나 비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곱씹게 된다.
 
일제는 조선에 맞는 법제적 기초를 확립하고자 구관 조사를 실시하면서 엄청난 분량의 기초 자료들을 수집했다. 또 통감부 시기부터 궁내부 규장각 도서과로 취합된 '제실도서'들을 '조선총독부도서'로 목록화하고 해제 작성하였다. 대한제국 정부기록류와 황실제산 관계 문서를 포함한 규장각 자료는 총독부 취조국과 참사관 분실에서 일차적으로 정리를 마치고 학무국 학무과 분실로 이관(1922년)되었다가 경성제대로 이관되었다(1924).
 
일제는(데라우치 마사타케를 비롯하여) '내선동화(일선동조론)'를 위해 조선인의 심리, 민정, 역사 연구가 필수적이라는 인식을 가졌다. 병합 합리화를 위한 이론적 근거 마련을 위해 조선 반도사 편찬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조선반도사』는 공정하고 객관적인 서술을 표방했으나 실제로는 조선의 역사서를 불신하고 일제가 보는 식민지 역사성을 구축하겠다는 목적을 가졌다.
편수체계는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쳤다. 먼저 조선인 조사 주임들이 3개월에 한 번 수집한 사료를 중추원 서기 관장에게 제출하면 서기관장이 사료를 편집 주임에게 교부하고 편집 주임이 1기 기초(起草)를 끝내고 다시 서기 관장에게 제출한다. 서기 관장이 제출 자료를 등사하여 심사위원에게 회부하고 의견을 수렴한 뒤 심사위원이 의견을 덧붙이면 서기관장이 편집주임과 심사위원의 협의회에 부의하여 채택 여부를 결정한다. 마지막으로 완성된 안을 의장 및 총독 결의에 거쳐 확정한다.
하지만 『조선반도사』 원고는 일부만 완성되는 등 집필이 순탄치 않았는데 집필진이 전출, 사망하는 등 개인적 이유와 조선인의 사료조사, 일본인의 집필로 이원화된 편수체계 시스템의 문제가 있었고 3.1운동으로 총독부 방침이 변화되면서 일선동조론이 조선인의 저항을 북돋을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반도사』는 타율성과 대외의존성을 강조하며 병합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펼쳤다.
 
한편, 『조선반도사』가 사료집 편찬 방식으로 전환하자 대중성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이 때 관변 단체인 조선사학회가 평이하고 간명한 서술로 대중들에게 어필하는 연구 결과물인  『조선사대계』를 편찬한다. 이는 총독부가 관변학회 이름을 빌려 보급한 최초의 식민지 통사였다.
 
3.1운동의 영향으로 일제가 문화 통치를 실시한 이후 중추원은 풍속 조사(조선의 의식주, 관혼상제, 연중행사 등)하고, 제도 조사(국제, 왕실, 구역, 관직, 관원, 내무, 외교, 군제, 재판, 재무, 지방 자치 등으로 나누고 광범위한 자료를 바탕으로 등사와 발췌 진행)를 실시한다.
일제의 관심이 조선사와 만주 대륙 간의 연관성을 규명하는 데로 이동하였고 일선동조론은 조선인의 반감 가능성을 높이므로 눈치를 보지 않을수 없었기에 자연스레 이들의 관점은 만선사관으로 이동하였다.
역사 편찬 사업을 위해 조선사편찬위원회를 설치하고 기획부터 진행 과정 전부를 구로이타 가쓰미가 주도하여 『조선사』 편찬이 이루어진다.
구로이타에게 문화통치란 박물관 전시를 통해 식민지 조선인들이 조선 문화가 열등하고 후진적임을 실물로 확인하고 그 결과 독립을 주장하지 않도록 하는데 있었다. 편찬 방식은 조선인의 반발을 초래하지 않도록 아카데미즘의 방패 아래 사료집 형식으로 진행하였다.
 
이나바 이와키치가 참여하면서 조선 민족 주류를 북방계로 인식하는 그의 관점이 영향력을 끼친다. 다만 조선인 위원들은 일본인 위원들의 관점에 문제를 제기했으나 그들은 적극적으로 방어했다.
하지만 이마니시 류가 유학을 다녀온 후 1,2편의 주임을 맡으면서 고구려사로 대변되는 북방의 역사를 제외하고 한반도 남부 한(韓) 종족의 역사 위주로 인식하는 그의 상고 체계가 반영되었다.
조선사편찬위원회는 1923년 전국의 지방 관청과 민간이 보유한 고문서 등을 끌어모으기를 시도한다. 그러나 1924년이 되어서도 수집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고(조선인들의 반응이 시큰둥) 이에 조선총독부는 조선사편찬위원회를 조선사편수회로 격상하면서 사료 수집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조선사편수회는 구로이타가 사업을 총 지휘했고 이나바 이와키치가 소수의 수사관들과 실무를 진행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기에 실무 위원들의 영향력은 제한이 많았다.
『조선사』의 고대사는 이마니시 류가 주도하면서 이전 『조선반도사』와 큰 차이가 없었고 조선시대사 부분은 이나바 이와키치, 세노 우마쿠마가 담당하면서 내용이 대폭 확대되었다.
 
『조선사』의 시대 하한은 1894년까지였는데 일본이 경복궁을 침략하여 세운 개화파 정권인 갑오개혁으로 마지막을 장식하려는 의도였다고 볼 수 있다.
또 제6편 시작 시기는 순조 즉위년(1801년)으로 정리하면서 서양 제국과의 관계에서 시작하려는 의도를 관철시켰다.
『조선사』 제6편 제4권은 다보하시 기요시가 주도했는데 다른 편에 비해 훨씬 많은 편수를 담고 있으나 그것이 공정하고 객관적인 역사 편찬을 담보해주지는 못한다. 다보하시 기요시는 대외 관계에 편중하여 서술한 측면이 크고 개화 정책도 일본, 청과의 관계에서만 파악함으로써 고종 시대사를 주체적으로 보지 않고 대외관계의 객체로 전락시킨 결과를 가져온 인물이기 때문이다.
 
병합 이후 대한제국의 황실이 일본 천황가의 일원으로 이왕가가 되었다. 『이태왕실록』은 왕족으로서 이전의 실록의 형태가 아닌 '실기'의 형태를 띠었다. 아사미 린타로가 편찬을 주도하였는데(서지학자이자 조선본 수집가로 이름이 나 있었음) 이는 일본 궁내성에서 비밀리에 진행되어 조선왕실의궤를 기증 형식으로 반출하였다.
아사미 린타로가 편찬에 활용한 인용 자료들은 주로 왕실 계보와 궁궐 관련자료 등이 대부분이었고 근대 자료도 제시되었으나 체계적이지 못한 한계를 지닌다.
 
순종의 국장 이후 실록 편찬을 고려하면서 『고종순종실록』 편찬 사업이 추진되었다. 이는 오다 쇼고(식민 사학의 핵심)가 주도하고 실무는 시노다 지사쿠(조선사 편수회 참여, 조선사학회 고문)가 맡았다. 사료 모집 위원으로는 기쿠치 겐조가 핵심이었다. 그는 『이태왕실록』을 일부 등사하여 『황제양위 젆수의 중요 일기』를 작성하여 실록 편찬의 참고 자료가 되게 하였다. 문제는 그가 을미사변에 직접 가담한 인물인데다 많은 대중적 저술을 통해 고종 시대상을 왜곡했다는 데 있다.
편찬 위원장 아래 사료모집 위원, 편집 위원, 감수 위원으로 나뉘어 작업이 이루어졌고 완성된 원고를 위원장이 이왕직 장관에게 제출, 결재하면 간행되는 마무리였다.
조선인 편찬 위원들이 전통적 연대기 바췌 기록을 토대로 초고 작성을 하는 동안 사료 모집부에서는 개항 이후부터 대한제국기에 해당하는 근대 사료 수집을 맡으면서 사료 수집은 기쿠치 겐조의 절대적 영향 하에 이루어졌기에 식민사학의 관점이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이들은 고종 시대 사료를 많이 수집하고 공포했으나(실증) 고종 시대의 근대적 모습을 담은 사료들이나 대한제국 공식 사료 등은 철저히 외면하면서 고종 시대의 실상은 축소되었다.
이렇게 『고종순종실록』 은 이왕직의 오다 쇼고가 주도하면서 대한제국기와 병합 전후사를 이전 왕조의 역사 형식을 빌리고 내용은 그들의 취사 선택하에 채워지는 결과를 낳았다.
 
마지막으로 이야기할 부분은 참여한 조선인들의 역할이다. 일본 학자 또는 관료들이 주도하였다고 하지만 조선인들의 역할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들은 대부분 친일 학자, 귀족, 유림 등으로 조선 자료에 상대적으로 접근하기 쉬웠을 것이고, 그들이 중간 다리를 해주지 않았다면 이런 결과물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이 책은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 5권으로 1권 이후 가장 인상이 깊었다. 이들이 사용한 사료들이 입맞에 맞게 취사 선택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었고 시대적 배경에 따라 그 흐름이 변화되었음을 정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