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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코펜하겐 삼부작 2 - 청춘

category 리뷰/책 2022. 10. 20. 17:00

나는 어린 시절에 내가 두려워했던 것을 하나 떠올린다. 착실한 숙련공. 나는 숙련공에 대해서는 아무런 거부감도 없지만, 미래의 모든 밝은 꿈을 가로막는 건 '착실한'이라는 단어다. 그 단어는 비 내리는 하늘처럼 온통 회색으로 물들어 있어서 스며 나오는 밝은 햇빛을 느낄 만한 부분은 어디에도 없다. - P22

토베는 착실함이란 단어에 거부감을 느꼈다. 지금도 그런 가르침을 받는지 모르겠지만 성인이 되기 전까지 어른들은 내게 '착실함'을 강요했다. 그것이 분명한 강요였는데도 나는 크게 거부하지 않았다. 만약 못견뎌내면 어떤 형태로든 본인을 망가뜨리게 되지 않을까. 토베의 청춘은 이렇게 시작부터 밝지 않다. 

여기서 사는 한, 나는 외롭고 이름 없는 삶을 살아갈 운명에 처해 있다. 세계는 내 어떤 부분도 인정해 주지 않고, 내가 모서리 하나를 겨우 붙잡을 때마다 내 손아귀를 슬쩍 빠져나간다. 사람들은 죽고, 그들 머리 위의 건물들은 헐려 나간다. 세계는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지속되는 건 오직 내 어린 시절의 세계뿐이다. - P48

세계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경제는 좋지 않았고 전쟁의 광풍이 불었다. 하지만 그런 외부적 상황은 당장 먹을 것이 없고, 죽을 것 같을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지금을 살아갈 수 없어서 토베는 과거를 떠올린다. 여전히 자신을 인정해주는 사람은 없고 자신을 둘러싼 세계는 낯설기만 하다. 

나는 미칠 듯 화가 날 때면 늘 나중에 후회할 말을 한다. "책을 읽고 싶어요." 나는 말한다. "그리고 글도 쓰고요." 아버지는 내게 도대체 무슨 글을 쓰고 싶으냐고 묻는다. "시요!" 나는 소리 지른다. "시를 굉장히 많이 썼고요, 예전에 제 시들이 훌륭하다고 말해 준 편집자도 있었어요." "저것 보라지." 아버지는 커다란 손으로 자기 얼굴을 문지르며 말한다. "쟤도 제정신이 아닌거야. 쟤가 저런 거 하면서 노닥거리는 거 알고 있었어?" "아니." 어머니의 대답은 퉁명스럽다. "근데 그건 쟤가 알아서 할 일이잖아. 쟤가 글을 쓰고 싶어 한다면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는 건 분명해." (...)
"토베." 아버지의 목소리는 부드러워져 있다. "언제 네..... 그 ...... 시들 좀 나한테 보여줄 수 있겠니? 내가 그런 걸 좀 아니까 말이야." 내 분노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우리 아버지에게는 뉘우치고 참회하는 능력이 있다. 그리고 그건 우리 어머니에게는 없는 능력이다. - P103~104

어머니는 자신을 비웃고 이해하지 않았지만 최소한 아버지는 상처를 주고 미안하다는 말을 건넨다. 시를 쓰는 사람이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글을 쓸 공간을 가지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할텐데도 토베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부모가 원망스럽다. 이 당시 이렇게 자신의 능력을 포기하고 매몰된 여성들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당신이 내가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함께하는 여자일 거예요." 3년 동안 일자리가 없는 상태로 지낸 그는 덴마크에서 썩어 가느니 차라리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싶다고 한다. 그는 생활 보조금으로 살아간다. 일을 했을 때는 택시 한 대를 가진 사람 밑에서 그 택시를 운전했는데, 운전 말고는 어떤 기술도 배운 적이 없다고 한다. (...) 니나와 나는 일자리가 없는 청년들은 피하자고 의견을 모았었지만, 실업자가 아닌 남자를 찾기는 어렵다. 10시가 되자 쿠르트는 나를 집까지 데려다준다. 달빛은 밝고, 마음은 조금 흔들린다. 나는 머지않아 영웅적인 죽음을 맞을 한 남자와 함께 거리를 걷고 있다. - P109~110 
나는 그대로 서서 인적이 거의 없는 거리를 걸어가는 그를 지켜본다. 코트도 없는 그는 두 손을 재킷 주머니에 찔러 넣고 있다. 그는 곧 죽을 것이고, 나는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을 것이다. - P111

토베는 크로그가 부자고 어마어마한 서재를 갖고 있어 책을 얼마든지 읽을 수 있고 자기 시를 이해해준다하여 헤어지고 나서도 끊임없이 그를 떠올린다. 하지만 나는 쿠르트와의 짧은 만남과 헤어짐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기로 해서 토베는 만나자마자 그의 죽음을 생각하며 헤어진다. 당시 이런 죽음들이 너무 많았을 것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는 이 상황이 현실이다. 푸틴은 전쟁에 나갈 병사를 위해 강제 동원령을 내렸다. 총알받이가 되기 싫다며 일부는 탈출을 감행하고 그럼에도 동원당해 나간 병사들의 운명은 장담하기 어렵다. 과거는 왜 현실이 되어야 하는가.

나는 내 시들이 출판돼서 시에 대한 감각을 갖춘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 그 바람이 왜 그토록 간절한지는 나 자신에게도 설명할 수가 없다. 어쨌든 나는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내가 어둡고 구불구불한 길들을 지나며 다가가고 있는 목표다. 그것이 내가 아침마다 일어나고, 인쇄소에 나가고, 룅렌 양 맞은편에 앉아 백 개의 눈을 가진 아르고스 같은 그의 시선을 여덟 시간 동안 버틸 수 있게 해 주는 힘이다. 그것이 내가 열여덟 살이 되는 바로 그날 집에서 이사를 나가고 싶어 하는 이유다. 빙 앤뱅이 밤새도록 시끄럽게 울부짖는다. 술 취한 사람들이 카페 뒷문에서 우리 건물 마당으로 쫓겨난다. 그곳에서 그들은 소리치고, 욕하고, 싸운다. 아침이 찾아올 때까지, 마당과 이 거리에 고요함은 찾아오지 않는다. - P115~116

나는 우리 가족이 너무 피곤하다. 내가 자유롭게 움직이고 싶어 할 때마다 그들과 부딪히는 것 같다. 어쩌면 나는 결혼해서 나 자신의 가족을 꾸린 뒤에야 그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P121

토베는 열여덟살이 되기만을 바라고 있다. 그 때가 되면 그는 자유를 찾는 것이다. 지금 집은 외부 환경이 좋지 않고 부모와도 사사건건 부딪치니 머릿속만 복잡해진다. 집을 나가기만 하면 앞으로 자신의 시 세계가 펼쳐질거라 믿는다. 과연 그의 믿음처럼 미래는 장미빛일까.

"우리, 반지를 빼야 할 것 같아요. 난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본 적이 없어요." "나도 당신을 정말로 사랑한 적이 없어요." 내가 말한다. "없죠." 그는 주억거린다. "알아요." 완전히 당황한 그가 엄청나게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바람에 나는 그를 따라잡으려고 거의 달려야 한다." "우리 어머니는 당신이 나한테 너무 과분하대요." 그가 설명한다. "당신은 돈도 많고 책도 좀 읽고, 뭐 그런 사람이랑 결혼해야 할 것 같아요." "네." 내가 말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 집 현관 앞에 도착한 그는 언제나처럼 내게 부드럽게 키스하더니 자기 손가락에서 반지를 비틀어 뺀다. 그가 그것을 주머니에 넣고, 내 것도 그리로 들어간다. - P139

토베는 악셀이라는 남자를 만났다. 그가 여자를 수시로 바꾸는 인물이라는 말도 들었지만 사랑에 빠졌을 때 그런 말이 들릴까. 무시하고 약혼을 했다. 학생이라 돈을 못 벌고 있는 자신과 비교해서 돈을 벌고 있고 시를 쓰는 것으로 돈을 벌 수도 있는 토베에게 열등감을 느낀 게 틀림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머니 핑계를 대는 건 너무하지 않나. 여러 모로 치기어리다는 생각 뿐. 아니다 다를까 그와 파혼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부모는 잘했다고 칭찬한다. 

"편집자님이랑 있으면 어떤 나쁜 일도 생기지 않을 것 같아요. 여기 있는 동안에는 세계 대전이 일어나지도 않을 것 같고요." 비고 F. 묄레르의 표정이 갑자기 심각해진다. 그는 다시 입을 연다. "다른 일들은 너무도 암울해 보여요. 난 어쩌면 당신을 위해서는 이런저런 일을 해 줄 수 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세계대전이 일어나지 않게 할 수는 없어요." 내가 그런 말들을 하게 된 건 와인 때문이다. 어른들은 세계정세에 관해 생각하기 시작할 때면 모두들 내게서 뒤로 물러난다. 그에 비하면 내 시들과 나는 그저 바람이 아주 슬쩍만 불어도 날아가 버릴 먼지 알갱이들에 불과하다. "그럴 수는 없겠죠." 내가 말한다. "하지만 편집자님은 갑자기 돌아가시지 않을 거고, 이 건물도 무너져 내리지 않을 거잖아요." - P202~203

악셀과 헤어진 뒤 토베는 안정적인 남자를 찾았던 것일까. 그는 비고 F.뮐레르라는 남자를 만난다. 어쩌면 그의 직업이 가장 그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했는지 모르겠다. 내부와 외부가 모두 불안한 상황에서 그의 눈에 자연스럽게 들어온 남자. 가벼운 마음에 묵직한 바위 같은 남자를 바랐고 그렇게 '비고'와 결혼한다.

나는 시를 쓴다는 점에서는 조금 색다른 사람이지만, 동시에 평범한 면도 많다. 다른 모든 젊은 여자들처럼 나도 결혼을 해서 아이를 갖고 나 자신의 가정을 꾸리고 싶다. 스스로 생계를 해결하는 젊은 여자로 살아가는 일에는 어딘가 고통스럽고 취약한 면이 있다. 그 길의 앞에는 어떤 빛도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나는 항상 내 시간을 팔아넘겨야 하는 의무에서 벗어나서 오직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너무도 간절히 바라고 있다. - P218

토베는 시를 쓰는 것 외에는 자신이 평범한 다른 여자들과 같다고 생각한다. '특이하다? 특별하다!'라는 말을 들어온 그가 원했던 것은 어쩌면 안정감이었을 것이다. 인생의 한때 모험을 감행하고 싶을수는 있으나 전부를 내내 모험에 걸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토베의 고민이 지금의 여성들의 현실적 고민과도 맞닿아 있다고 느꼈다.

비고 F.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손톱만큼도 관심이 없다. 그는 오직 예술가들만 좋아하고, 예술가들하고만 시간을 보낸다. 나는 내게 존재하는 제법 평범한 점들은 뭐든 그에게 숨기려고 애쓴다. 나는 새로 산 원피스가 마음에 든다는 사실을 그에게 숨긴다. 나는 내가 립스틱과 볼연지를 쓰고,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볼 때면 내 옆모습이 어떤지 보려고 거의 삐끗하기 직전까지 목을 이리저리 돌려보는 걸 좋아한다는 사실을 숨긴다. 나는 나와 결혼할 수도 있는 그의 마음을 흔들 수도 있는 모든 것을 숨긴다. - P221~222

상대에게 온전한 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쉽지 않다. 하물며 내가 찜한 상대인데 그의 마음에 들길 원한다면 부족한 부분과 감추고자 하는 부분을 되도록 숨기려 할 것이다. 하지만 인생을 살아보니 이렇게 나를 숨기며 만난 관계는 결코 건강하지 못함을 우리는 안다. 토베는 그렇게 결혼이란 제도로 뛰어든다.

청춘은 어떤 색일까? 코펜하겐 삼부작 2권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적어도 초록빛은 아닌 듯하다. 청춘은 끊임없는 내면의 불안과 현실과의 싸움에서 오는 좌절과 고통의 기록이다. 지나가면 덧없음에도 그때만큼은 간절해서 연약하게 만드는 마음이다. 

젊음 그 자체는 그저 덧없고 연약하며 잠시뿐인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통과해야 한다. 젊음에 그 밖의 의미는 아무것도 없다. - P179~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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