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책] 코펜하겐 삼부작 3 - 의존

category 리뷰/책 2022. 10. 20. 16:59

"가끔씩 내가 다른 사람들을 상대하는 법을 전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마치 내가 온 세상을 통틀어 쳐다보고 있는 거라곤 나 자신인 것처럼요." - P88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홀로서기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대부분은 독립을 하면서이지만 큰 상실을 경험할 때도 그렇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찾아와도 죽을 때까지 누구에게 기대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토베는 그런 사람이였나. 그의 작품은 갈수록 주목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그의 마음은 불안에 흔들리고 끊임없이 갈피를 잡지 못한다. 방황이 그의 주위를 맴돌고 있다.

토베는 비고가 자신보다 배 이상 나이가 많은 남자인데 자신의 나이는 한창이라는 걸 결혼을 하고 나서야 깨닫는다. 비고가 출근하고 나면 그제서야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 든다. 매일이 똑같이 느껴지고 지루하게 느껴질 뿐 결혼 이전 자신의 존재가 아득하게 멀리 있다.
결혼 생활이 불만족스러운 토베는 그제서야 어머니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자신과 두 살 밖에 차이 안나는 사위를 보고서 어머니도 난감했을 것 같다. 결혼 생활을 하고 나서야 어린 시절이 행복한 것이었나를 떠올리는 토베가 안쓰러웠다.

"가끔씩 당신은 아주 아득해져서 닿을 수 없게 느껴져요. 당신은 너무 매력적이고, 난 당신과 사랑에 빠진 것 같아요." 이어서 그는 묻는다. "내가 편지를 써도 될까요? 우편물이 그 사람이 집을 나가고 난 다음에 배달되나요? " 다음날 나는 피에트에게서 러브레터 한통을 받는다. '내 소중한 아기 고양이에게. 당신은 내가 결혼하고 싶다는 상상을 해 볼 수 있었던 유일한 여자예요.' 불안해진 나는 비고 F.에게 전화를 건다. "무슨 일이에요?" 나는 약간 퉁명스러운 그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한다. "모르겠어요. 그냥 좀 많이 외로워서요." "알았어요. 오늘밤에는 집에 있을게요. 됐죠?" - P30~31

비고에게 거짓말을 하고 집을 나온 토베는 피에트라는 남자를 만났다.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으나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 그는 순간 비고를 떠올린다. 불현듯 떠오르는 불안과 공포, 자신을 붙잡아 달라고 외치는 듯한 토베의 말이 귓가에 울려퍼진다. 그는 사람을 만나도 사랑을 해도 외롭다고 느낄 뿐이다.

"얼마 전에 어떤 젊은 여자를 만났는데, 굉장히 예쁘고 굉장히 돈이 많은 사람이에요. 우리는 곧바로 사랑에 빠졌는데, 이제 그 사람이 윌란으로 나를 초대했어요. 맨션으로요. 그 사람 가족이 소유한 집이래요. 내일 떠날 거예요. 그래도 당신이 힘들어하지 않기를 바라요."
현기증이 난다. 내 집세는, 내 미래는 어떡하라고?
"눈물 금지." 피에트가 단호하게 두 손을 펴 들며 말한다. "제발, 윗입술에 힘 딱 주고 버텨요. 우리 관계에는 어떤 의무도 없었어요. 그렇죠?" - P50

피에트는 이런 말을 던지고 토베를 떠난다. 욕지거리가 절로 나왔다. '아... 세상에는 역시 미친 놈들이 많아 하면서.' 새로운 삶을 꿈꾸었던 토베는 무너지고 만다. 저렇게 의무 운운하며 떠나버리면 그만인가 죄책감이란 없고 욕망대로 살고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에베는 명확한 답이 없는 질문들을 사랑한다. 예를 들자면 그는 흑인들의 피부가 왜 검은지, 유대인들의 코는 왜 매부리코인지 같은 질문에 관한 자신만의 가설을 세워 놓았다. 한 번은 그가 한쪽 팔로 머리를 괸 채 옆으로 누워서는, 매우 도덕적인 고뇌를 담은 듯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본 적이 있다. "나 지하 저항 조직에 합류할까 생각하고 있어요." 그는 엄숙하게 말했다. "프랑스가 함락된 뒤로 상황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아요." 그때 나는 그런 일은 신경 써야 할 아내와 아이가 없는 사람들에게 맡기면 되지 않느냐고 대답했다. 이제 그는 그 생각은 잊어버리기로 한 것 같다. - P71~72

피에트와 헤어지고 난 뒤 토베는 에베라는 남자를 만났다. 그를 만나고 나서야 자신이 아직 비고와 이혼하지 않았음을 깨닫고 토베는 비고에게 이혼을 요구한다. 에베는 질문을 사랑하고 외부 세계에만 관심이 많은 듯한데 토베는 피에트와는 다른 그가 좋았던 걸까.

독주가 시작되기 전에 조용히 울리는 드럼 롤 같은 하루하루가 지나간다. 나는 임신과 어머니 되기, 그리고 아기 돌보기에 관한 책들을 읽으며 왜 에베는 이 모든 것에 나만큼 관심이 없는지 이해할 수 없어 한다. 그는 자기가 아버지가 된다는 사실을 거의 믿을 수가 없다고 한다. 그는 신문에 실린 내 이름을 볼 때도 믿을 수 없어 한다. 그는 자기가 유명한 사람과 결혼했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가 그 점을 좋아하는지 아닌지조차 알지 못한다. - P76

"아주 토실토실하네." 그의 말을 들은 나는 기분이 상해 투덜거린다. "할 말이 그게 다예요? 스물네 시간이나 걸려서 낳으면서, 난 아이는 다시는 안 낳겠다고 맹세했는데, 난 아파서 소리를 치고 비명을 질렀는데, 당신이 할 말이라곤 애가 토실토실하다는 것밖에 없어요?" 에베는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짓지만, 아이가 자라면 아마 더 예뻐질 거라고 말해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 그러더니 내게 언제 집에 오느냐고, 보고 싶다고 말한다. 나는 요람 위로 몸을 굽히고 조그만 손가락들을 만지며 말한다. "이제 우리는 아버지고, 어머니고, 아이고, 그렇네요. 정상적인 보통 가족이 됐어요." 그러자 에베가 묻는다. "왜 정상적인 보통 사람이 되고 싶어해요? 당신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건 누구나 다 아는데." - P80~81

하지만 에베는 토베를 이해하려는 생각이 없다. 임신은 혼자 한 게 아닌데도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다. 고독하고 외로웠을 토베의 절박함이 느껴져서 마음이 너무 아팠다.

지금 이 순간 남자들은 내 세계에 속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들은 다른 행성에서 온 것처럼 이질적인 생명체들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몸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 종양처럼 달라붙은 점액 덩어리가 몸 주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살아가기 시작할 수도 있는 말랑하고 부드러운 장기 같은 건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 P113

또 다시 임신을 해버린 토베는 임신중절을 할 수 있는 곳을 찾아 헤맨다. 이미 딸이 하나 있는 자신이 또 아이를 갖게 된다면 앞으로의 작품 활동에 지장이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에베는 그냥 낳으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는데 무책임하게 느껴졌다.
하면 그만은 아니지 않나. 책임 의식이라고는 없는 그들에게 화가 난다.

"나 임신했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아이를 낳고 싶지는 않아요." "알겠어요." 그는 그에게서 유일하게 호감 가는 부분인 진중한 회색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느긋하게 이야기한다. "그건 내가 도와줄 수 있어요. 내일 저녁에 오면 내가 소파술을 해 줄게요." 마치 그 일이 평소 일과라도 되는 둥 말하는 그는 세상 어떤 일에도 괴로움을 느끼지 않는 부류의 사람 같다. 안심한 나는 미소를 짓는다. "마취도 해 주실 수 있나요?" "내가 주사를 놓을 텐데, 그럼 당신은 아무것도 못 느낄 거예요." 그가 말한다. "주사요? 무슨 주사죠?" "모르핀 아니면 데메롤이에요." 그가 말한다. "데메롤이 제일 좋죠. 모르핀은 토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 P144~145

나는 임신을 하면 늘 잠자는 데 문제가 생긴다고 말했다. 왜 그런 말이 나오는지 나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카를은 턱을 문지르며 그 말에 대해 생각했다. "이렇게 해 보면 어떨까요." 그가 말했다. "내가 클로랄 수화물을 좀 줄게요. 좋은 진정제고 부작용도 거의 없거든요. 맛은 좀 끔찍하지만, 그냥 우유에 타서 마시면 돼요." - P173

"통증이 계속되면 수술을 해줄 다른 의사를 찾아보면 돼요." 아마도 의사와의 대화가 그에게 정말로 깊은 인상을 남겼는지, 우리가 집에 도착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메타돈이라는 알약 처방전을 써 줄게요. 강력한 진통제인데, 그게 있으면 내가 집에 있으나 없으나 크게 상관없을 거예요." 그는 내 타자 용지를 한 장 꺼내 처방전을 쓴 다음 가장자리를 조심스럽게 오렸다. 그러고는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작품을 바라보았다. - P175

내가 에베를 만나러 가겠다고 말할 때마다 카를은 주사기를 꺼냈고 그 특유의 거칠고 무신경한 방식으로 나와 관계를 가졌다. "난 수동적인 여자가 좋아요." - P181~182

토베는 위험한 남자 카를을 만나 점점 약물에 빠진다. 그는 토베에게도 전혀 관심이 없고 자기 전공 말고는 관심도 없는 남자다. 게다가 알고 보니 카를은 정신병자였다. 토베가 이 남자에게서 탈출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생각할수록 소름이 끼친다.

진열장 속의 수은제 용기와 온갖 결정들을 담은 비커에서 부드러운 빛이 퍼져 나왔다. 나는 계속 거기 서 있었고, 그동안 내 안에서는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있는 작은 흰색 알약들에 대한 갈망이 시커먼 액체처럼 솟아올랐다. 그렇게 나는 섬뜩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 갈망은 나무줄기 속의 부패병처럼, 혹은 모체가 아무런 관계를 맺고 싶어 하지 않아도 자기 혼자 자라나는 태아처럼 내 안에 있었다. - P226

토베는 약물 의존에서 벗어나기 위해 병원에서 한동안 지낸다. 하지만 병원에서 빠져 나와도 수시로 찾아오는 약물의 충동에서 헤어나오질 못한다. 그런 그에게 빅토르가 찾아온다.

그의 전체적인 자태는 살짝 흐트러진 듯하면서도 어딘가 악마적인 생명력을 발산하면서 나를 완전히 매혹시켰다. (...) 나는 헬레에게 잠깐만 동생들을 봐 달라고 하고는 빅토르를 내 방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그는 자리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았다. 다른 의자에 앉은 내 심장은 세차게 뛰었다. 나는 행복과 공포가 뒤섞인 감정으로 가득 찼다. (...) 빅토르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내 발목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당신을 사랑해요." 그가 말했다. "당신이 쓴 시들을 사랑해요. 오랫동안 당신을 만나 보고 싶었어요." 나는 그의 얼굴을 들어 올려 내 얼굴을 향하게 하고는 말했다. "첫눈에 반한다는 얘기들은 다 거짓말이라고 항상 생각했어요. 지금까지는요." 나는 그의 머리를 내 두 손으로 감싸고 그 아름다운 입술에 키스했다. - P238~239

"한 200년쯤 너무 늦게 태어난 것 같아요. 하지만 만약 그때 태어났더라면 당신을 만나지 못했겠죠." 그는 나를 품에 안았고, 우리의 욕망은 충족되자마자 또 다시 되살아났고, 아이들은 다시금 야베의 보살핌에 맡겨졌다. "사랑에 있어서 끔찍한 점이 있다면 그거예요." 내가 말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없어진다는 거요." "맞아요." 그가 말했다. "그리고 결국에는 항상 엄청나게 고통스러워지죠." - P243

빅토르를 만나도 한동안 토베는 약물에 손을 댄다. 결국 특단의 조치로 도시를 떠나 약물을 쉽게 구할 수 없는 시골로 터전을 옮긴다. 토베는 그곳에서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고 수년간 빠져 있었던 약물 중독에서 서서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수시로 찾아오는 약물 충동은 여전히 그를 괴롭혔지만 그럴 때마다 빅토르와 아이들이 의지가 되었다.

이렇게 토베의 결혼 생활은 돌고 돌아 겨우 정착하게 되었다.

하지만, 누군가에 기대고 약물에 의존하는 것만이 토베를 구원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든다. 토베는 그 자신만으로 충분히 자신감을 갖고 살 수 있었다. 어릴 적부터 홀로서기를 꿈꾸었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삶을 사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았던가. 그 글을 펼치며 살 수는 없었던 것인가.
빅토르를 만나서 겨우 정착할 수는 있었다고 해도 찜찜함이 남았다.

'의존'이란 단어를 되뇌인다. 인간의 홀로서기는 그리도 어려운 것일까 생각해보게 된다. 작품 자체로는 별점 5이지만 스트레스를 주는 남자들 때문에 1을 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