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찬 바람이 부는 오늘 아침 쉼 없이 단숨에 읽었다. 이 소설은 추억, 상실, 용서, 사랑, 이어진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누구에게나 있을 평범한 일상이 이야기로 구성되었을 때 나 같은 독자들은 반갑다. 나와 거리가 먼 이야기라면 이렇게 공감하기 어렵다. 딴 세상 같은 이야기는 잡히지 않기에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다. 소설은 이래야 해, 벅차오름을 느꼈다.
총 8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어느 단편에서 울먹거렸는지는 모르겠으나 몇 차례 그랬다. 유독 추억과 시간이라는 단어를 붙잡았다. 그 중 1999년과 2014년도로 시계 바늘을 되돌린 순간 그 시절의 추억은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과거는 돌이킬 수 없음에도 선택을 할 수 없기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감정은 그 사람의 기억이란 영원 속에 잠잔다. 그러다 어느 노래를 들을 때, 어떤 장소에 갔을 때, 누군가를 만날 때 기억이 떠오르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먼 훗날이 되면 씨랜드 화재 사고와 영화 <매트릭스>와 신이 내놓은 몇 가지 대답과 기나긴 사랑의 시작으로 기억될 여름이 될 테지만, 그때는 어느 여름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여름이었다. - P12
1999년 나는 돈을 벌기 위해 학교 사무실, 카페, PC방 등에서 3중 알바를 뛰었고, 돈이 없어 선배에게 술을 얻어 먹으며 신세 한탄을 늘어놓았다. 친구들과 놀러 다니고 싶었지만 그것을 사치라 느꼈다. 이 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친구들과 미친 듯 놀 수 있을까, 마음은 그렇지만 돌아간다 해도 똑같은 선택을 할 것 같다.
어떤 사건이든 평범한 일에서 시작한다. 돌아보면 그것이 내게 특별한 사건인 것이다. 만약 어떤 일이 특별한 추억으로 남을 줄 안다면 사람들은 그 시간을 조금 더 절실하게 보내지 않을까. 하지만 누구나 그것을 알 수 없기에 흘려보내고 뒤늦게 후회하는 일이 많다고 여긴다.
만약, 시간이 거꾸로 흐른다면 어떨까. 그러니까 현재에서 과거로 시간이 흐르는 것이다. 마지막에는 과거를 만나게 된다. 좋을까, 나쁠까. 아프게 헤어진 사람이 있다면 과거의 그 사람을 만나 사랑을 할 때를 다시 만나겠지. 무던하게 이별했든 나쁜 감정만 남은채 이별했든 시작을 다시 경험한다면 어떤 감정일지 생각했다.
시간의 끝에,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에 이르렀을 때 이번에는 가장 좋은 미래를 상상할 수 있기를. 그렇게 시간은 거꾸로 흘러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마지막 순간에 이르고 그들은 그 순간을 한번 더 경험한다. 그리고 놀란다. 이토록 놀랍고 설레며 기쁜 마음으로 우리는 만났던 것인가?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둘은 오랜 잠에서 번쩍 눈을 뜬 것처럼 서로를 바라본다. 처음 서로를 마주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리고 시간은 다시 원래대로 흐르고, 이제 세 번째 삶이 시작된다. - P23
내가 가는 장소는 수많은 사람이 오간다. 내가 남긴 방명록 페이지를 누군가가 본다면? 실의에 빠진 사람이 우연히 들른 곳에서 희망을 발견한다면?
문득 세상에 나만 남겨진 것 같아서 무서운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옆에 누군가 있어도 보이지 않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을 때. 그럴 때는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을까. 희망이 사라져버린 것같은 고독감이 밀려들 때는 결국 주변을 보아야 한다 생각한다. 어떤 것이든 잡아보겠다는 생각으로 안간힘을 쓰면 위로를 얻을 수 있다.
"살아남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어느 시점부터인가 줄곧 나를, 한 번도 만나본 적도 없고 얼굴도 모르는 나를 기억하게 된 일에 대해서 생각했어. 나는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는 동안에도 나를 기억한 사람에 대해서 말이야. 그렇다면 그 기억은 나에게, 내 인생에, 내가 사는 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 P181
2014년은 다른 모든 일들을 덮어버릴 만큼 세월호 사건의 존재가 커서 가슴 속에 무겁게 내려 앉아 있다. 살아남을 수 있었던 사람들, 평범한 미래를 꿈꿀 수 있었던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또 주책없게 눈물이 난다. 그 해는 거의 매일을 울었고 우울함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어느덧 8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서 감정이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말에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자신은 이제 새들이 모두 날아가고 난 뒤의 빈 나무 같은 사람이 됐다고 생각했지만, 그 기사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한번 시작한 사랑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고. 그러니 어떤 사람도 빈 나무일 수는 없다고. 다만 사람은 잊어버린다고. 다만 잊어버릴 뿐이니 기억해야만 한다고, 거기에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영원히 사랑할 수 있다고. - P211
나는 미래가 잘 그려지지 않는다. 과거를 붙잡는 사람이구나 생각한다. 조금도 상상할 수 없고 막연해서 미래를 두려워하기에 그려보지 않는건가 생각한다.
'실패하더라도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미래이구나. 먼 이상보다는 평범한 미래를 살아갈 수는 있겠구나.'
"과거는 자신이 이미 겪은 일이기 때문에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데, 미래는 가능성으로만 존재할 뿐이라 조금도 상상할 수 없다는 것. 그런 생각에 인간의 비극이 깃들지요.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오히려 미래입니다." - P29
이제는 안다. 우리가 계속 지는 한이 있더라도 선택해야만 하는 건 이토록 평범한 미래라는 것을.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한 그 미래가 다가올 확률은 100퍼센트에 수렴한다는 것을. - P34~35
이 책은 사랑. 공감과 위로. 시간의 어느 점에 자리한 기억으로 독자를 이끌고 간다. 여전히 작가님의 따뜻하고 희망을 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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