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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토록 평범한 미래

category 리뷰/책 2022. 10. 11. 10:05
세찬 바람이 부는 오늘 아침 쉼 없이 단숨에 읽었다. 이 소설은 추억, 상실, 용서,  사랑, 이어진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누구에게나 있을 평범한 일상이 이야기로 구성되었을 때 나 같은 독자들은 반갑다. 나와 거리가 먼 이야기라면 이렇게 공감하기 어렵다. 딴 세상 같은 이야기는 잡히지 않기에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다. 소설은 이래야 해, 벅차오름을 느꼈다.
 
총 8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어느 단편에서 울먹거렸는지는 모르겠으나 몇 차례 그랬다. 유독 추억과 시간이라는 단어를 붙잡았다. 그 중 1999년과 2014년도로 시계 바늘을 되돌린 순간 그 시절의 추억은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과거는 돌이킬 수 없음에도 선택을 할 수 없기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감정은 그 사람의 기억이란 영원 속에 잠잔다. 그러다 어느 노래를 들을 때, 어떤 장소에 갔을 때, 누군가를 만날 때 기억이 떠오르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먼 훗날이 되면 씨랜드 화재 사고와 영화 <매트릭스>와 신이 내놓은 몇 가지 대답과 기나긴 사랑의 시작으로 기억될 여름이 될 테지만, 그때는 어느 여름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여름이었다. - P12
 
1999년 나는 돈을 벌기 위해 학교 사무실, 카페, PC방 등에서 3중 알바를 뛰었고, 돈이 없어 선배에게 술을 얻어 먹으며 신세 한탄을 늘어놓았다. 친구들과 놀러 다니고 싶었지만 그것을 사치라 느꼈다. 이 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친구들과 미친 듯 놀 수 있을까, 마음은 그렇지만 돌아간다 해도 똑같은 선택을 할 것 같다.
 
어떤 사건이든 평범한 일에서 시작한다. 돌아보면 그것이 내게 특별한 사건인 것이다. 만약 어떤 일이 특별한 추억으로 남을 줄 안다면 사람들은 그 시간을 조금 더 절실하게 보내지 않을까. 하지만 누구나 그것을 알 수 없기에 흘려보내고 뒤늦게 후회하는 일이 많다고 여긴다.
만약, 시간이 거꾸로 흐른다면 어떨까. 그러니까 현재에서 과거로 시간이 흐르는 것이다. 마지막에는 과거를 만나게 된다. 좋을까, 나쁠까. 아프게 헤어진 사람이 있다면 과거의 그 사람을 만나 사랑을 할 때를 다시 만나겠지. 무던하게 이별했든 나쁜 감정만 남은채 이별했든 시작을 다시 경험한다면 어떤 감정일지 생각했다.
 
시간의 끝에,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에 이르렀을 때 이번에는 가장 좋은 미래를 상상할 수 있기를. 그렇게 시간은 거꾸로 흘러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마지막 순간에 이르고 그들은 그 순간을 한번 더 경험한다. 그리고 놀란다. 이토록 놀랍고 설레며 기쁜 마음으로 우리는 만났던 것인가?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둘은 오랜 잠에서 번쩍 눈을 뜬 것처럼 서로를 바라본다. 처음 서로를 마주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리고 시간은 다시 원래대로 흐르고, 이제 세 번째 삶이 시작된다. - P23
 
내가 가는 장소는 수많은 사람이 오간다. 내가 남긴 방명록 페이지를 누군가가 본다면? 실의에 빠진 사람이 우연히 들른 곳에서 희망을 발견한다면?
문득 세상에 나만 남겨진 것 같아서 무서운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옆에 누군가 있어도 보이지 않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을 때. 그럴 때는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을까. 희망이 사라져버린 것같은 고독감이 밀려들 때는 결국 주변을 보아야 한다 생각한다. 어떤 것이든 잡아보겠다는 생각으로 안간힘을 쓰면 위로를 얻을 수 있다.
 
"살아남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어느 시점부터인가 줄곧 나를, 한 번도 만나본 적도 없고 얼굴도 모르는 나를 기억하게 된 일에 대해서 생각했어. 나는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는 동안에도 나를 기억한 사람에 대해서 말이야. 그렇다면 그 기억은 나에게, 내 인생에, 내가 사는 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 P181
 
2014년은 다른 모든 일들을 덮어버릴 만큼 세월호 사건의 존재가 커서 가슴 속에 무겁게 내려 앉아 있다. 살아남을 수 있었던 사람들, 평범한 미래를 꿈꿀 수 있었던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또 주책없게 눈물이 난다. 그 해는 거의 매일을 울었고 우울함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어느덧 8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서 감정이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말에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자신은 이제 새들이 모두 날아가고 난 뒤의 빈 나무 같은 사람이 됐다고 생각했지만, 그 기사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한번 시작한 사랑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고. 그러니 어떤 사람도 빈 나무일 수는 없다고. 다만 사람은 잊어버린다고. 다만 잊어버릴 뿐이니 기억해야만 한다고, 거기에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영원히 사랑할 수 있다고. - P211
 
나는 미래가 잘 그려지지 않는다. 과거를 붙잡는 사람이구나 생각한다. 조금도 상상할 수 없고 막연해서 미래를 두려워하기에 그려보지 않는건가 생각한다.
'실패하더라도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미래이구나. 먼 이상보다는 평범한 미래를 살아갈 수는 있겠구나.'
 
"과거는 자신이 이미 겪은 일이기 때문에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데, 미래는 가능성으로만 존재할 뿐이라 조금도 상상할 수 없다는 것. 그런 생각에 인간의 비극이 깃들지요.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오히려 미래입니다." - P29
 
이제는 안다. 우리가 계속 지는 한이 있더라도 선택해야만 하는 건 이토록 평범한 미래라는 것을.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한 그 미래가 다가올 확률은 100퍼센트에 수렴한다는 것을. - P34~35
 
이 책은 사랑. 공감과 위로. 시간의 어느 점에 자리한 기억으로 독자를 이끌고 간다. 여전히 작가님의 따뜻하고 희망을 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이토록 평범한 미래(양장본 Hardcover)
작가 김연수가 짧지 않은 침묵을 깨고 신작 소설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출간한다. 『사월의 미, 칠월의 솔』(2013) 이후 9년 만에 펴내는 여섯번째 소설집이다. 그전까지 2~4년 간격으로 꾸준히 소설집을 펴내며 ‘다작 작가’로 알려져온 그에게 지난 9년은 “바뀌어야 한다는 내적인 욕구”가 강하게 작동하는 동시에 “외적으로도 바뀔 수밖에 없는 일들이 벌어진”(특별 소책자 『어텐션 북』 수록 인터뷰에서) 시간이었다. 안팎으로 변화를 추동하는 일들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김연수는 소설 외의 다른 글쓰기에 몰두하며 그 시간을 신중하게 지나왔다. 변화에 대한 내적인 욕구와 외적인 요구는 작가를 어떤 자리로 옮겨오게 했을까. 『이토록 평범한 미래』는 작가가 최근 2~3년간 집중적으로 단편 작업에 매진한 끝에 선보이는 소설집으로, ‘시간’을 인식하는 김연수의 변화된 시각을 확인할 수 있게 한다. 김연수는 과거에서 미래를 향해 흐르는 것으로만 여겨지는 시간을 다르게 정의함으로써 우리가 현재의 시간을, 즉 삶을 새롭게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아름답고 서정적인 언어로 설득해낸다. 특별한 점은 그 가능성이 ‘이야기’의 형태로 전달된다는 것이다. 지구에 종말이 올 것이라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으로 떠들썩했던 1999년 여름, 동반자살을 결심한 스물한 살의 두 대학생은 뜻밖의 계기로 시간여행을 다룬 소설 『재와 먼지』를 접한 뒤 의외의 선택을 하게 되고(「이토록 평범한 미래」), 아이를 잃고 아득한 어둠 속에 갇혀 있던 한 인물은 자신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바다 앞에서 이백 년 전에 그 바다를 지난 역사 속 인물인 ‘정난주’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린다(「난주의 바다 앞에서」). 그뿐 아니라 이번 소설집에 실린 여덟 편의 작품에서 인물들은 끊임없이 서로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간다. 마치 이야기가 현재의 자신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실험하는 신중한 관찰자처럼. 그렇게 이야기와 삶이 서로를 넘나들며 아름답게 스며드는 과정을 함께 경험함으로써 우리는 왜 어떤 삶은 이야기를 접한 뒤 새롭게 시작되는지, 그리고 이야기를 사랑하면 왜 삶에 충실해지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이야기가 지닌 힘을 끝까지 의심에 부친 끝에 도출해낸, 소설의 표현을 빌리자면, “언젠가 세상의 모든 것은 이야기로 바뀔 것이고, 그때가 되면 서로 이해하지 못할 것은 하나도 없게 되리라고 믿는 이야기 중독자”(「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 김연수의 각별한 결과물이다.
저자
김연수
출판
문학동네
출판일
2022.1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