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탕을 가 본지 오래이다. 아주 어렸을 적 어머니를 따라 목욕탕을 몇 차례 가 본 뒤로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이후에는 더 이상 목욕탕을 가지 않았다. 왜였을까. 목욕탕에 대한 기억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우선 부끄러움이 많은 성격 에 노출한 몸으로 많은 이들과 부딪치는 게 어색했다. 특히 친구라도 만나는 날은 기분이 찜찜했다. 목욕탕에서는 주로 어르신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들이 탕에 들어가 내뱉는 소리는 놀라웠다. 그 때만 해도 뜨거운 물에 들어가는데 시원하다니 놀랍게만 생각했다.
이 책은 30대 이상이면 알 법한 목욕탕에 대한 기억을 소환한다. 지금은 목욕탕보다 찜질방이 훨씬 많아졌으나 예전에는 목욕탕 간판 기호가 길거리에 흔했다. 그만큼 우리 기억에 친숙한 존재가 목욕탕이다.
작가가 글을 쓰고 일러스트레이터가 그림을 그리고 글도 쓴 책이다. 최초에는 세계 곳곳에 있는 목욕탕을 기획했는데 첫 방문지였던 태국 노천 온천에 얽힌 사연을 알고 이후 여러 방문지를 경험하면서 제목처럼 기획을 변경했다고 한다.
만약 이 책을 최초의 기획처럼 출간했다면 나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바뀐 의도가 내게 들어맞았던 셈이다.
카나이 마키 사마귀가 앞발을 치켜든다. 야스다 씨가 웃으며 말한다. "같이 만들까요?" 둘 다 목욕탕을 좋아하니까 이런저런 탕을 경험해보는 책은 어떨까? 수증기 너머에 있는 역사의 진실을 펼치는 거다. 목을 씻고 기다려라, 역사수정주의! - P16~17
인터뷰를 한 이들, 방문한 장소들 담은 그림들은 아기자기하고 귀엽다. 다만 전쟁과 관련한 장소들은 아기자기한 그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무거웠다. 목욕탕이라는 장소가 아니었다면 무거운 이야기를 풀어내지 못했으리라. 탕에 몸을 담그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처럼 인터뷰이들도 그랬을 것이다.
첫 번째 목적지는 열대 우림이 가득한 정글 노천탕 힌다드 온천으로 태국 중부 칸차나부리에 위치해 있다. 그곳은 녹음이 짙은 계곡과 미지근하고 질 좋은 온천수로 유명하다.
칸차나부리까지는 일반적으로 버스를 이용하는 게 편하다고 한다. 그러나 작가들은 태국 국철 '남톡 지선' 철도를 이용하여 이동했다. 과거에는 '타이멘 철도'라 불렀는데 2차 세계대전 일본군이 인도 침공을 계획하면서 태국과 버마를 연결하기 위해 건설한 철도였다. 일본군은 연합군 소속 포로들과 아시아 각국에서 징용된 노동자들을 비롯 20만 명이 넘는 노동자를 공사 현장에 동원했다. 이 과정에서 기아, 피로, 전염병, 감독관의 학대로 수만 명에 달하는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힌다드 온천은 일본군의 휴식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었다.
와트 완카나이 온천은 사찰 안에서 솟는 온천을 뜻하여 기도도 하고 온천욕도 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장소다.
두 번째 목적지는 일본 최남단 오키나와에 마지막 남은 대중목욕탕인 나카노탕이다. 오키나와는 종전 후 귀향으로 인해 인구가 증가하고,전후 부흥기의 분위기에 맞물려 1960년대 초기 공중목욕탕은 전성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주택의 현대화로 가정용 욕조가 보급되고 1973년 오일쇼크로 연료비가 급등하면서 공중목욕탕의 숫자는 줄어든다. 그렇게 2014년을 기점으로 나카노탕은 오키나와현 내에 남은 마지막 공중목욕탕이 되었다.
사진에서 보듯 나카노탕은 몸 씻는 곳과 탈의실의 구분이 없다. 이것이 오키나와 스타일이란다. 그리고 수도도 온수와 냉수의 수도꼭지가 호스 하나로 연결되어 합류되어 나오는 구조로 특이하다. 약 알칼리성 광천수로 약간의 미끄덩한 느낌이 있어서 손님들 중에는 아무리 씻어도 비눗기가 가시지 않는다는 푸념을 듣기도 한다고 한다. 목욕비는 370엔, 하루 손님은 20명 남짓이고 관리비는 늘어만 가서 언제 그만두어도 이상하지 않지만 계속 영업을 잇고 있는 주인장의 신념이 느껴졌다.
나카노탕에서 작가들이 만난 인상적인 이는 샤미센을 연주하는 다쿠시 야스마쓰 씨 이야기였다. 그는 매일같이 특공기가 오키나와에서 하늘을 향해 나는 모습을 보았다. 돌아오지 못하는 그들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는 종전 후 1945년 미군이 만든 이시카와 수용소에서 가족들과 함께 수용되었다. 수용소에서는 미군이 버린 빈 깡통으로 몸통을, 낙하산의 가는 끈으로 줄을, 야전 침대 다리로 다리를, 젓가락으로 이음새를 만든 샤미센 연주 소리가 밤마다 울려퍼졌다고 한다. 수용소를 나와서도 샤미센을 잊지 못해 그는 샤미센을 배웠고 50년 이상이 되었다고 한다. 전쟁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그의 목소리가 샤미센의 연주 소리와 겹쳐 들린다. 평화의 목소리는 언제쯤 들을 수 있을까.
세 번째 목적지는 한국이다. 한국은 목욕탕 문화가 급변한 곳이다. 오키나와처럼 가정에 욕조가 보급되면서 대중목욕탕의 숫자는 급격히 줄었다. 그 대신 찜질방 문화가 등장했다.
부산 해운대 일대는 일본의 식민지 경영이 진행되면서 온천지로 정비됐고 해방 후 외국 자본의 호텔이 진출하면서 리조트지로 성장했다. 해운대 온천센터는 일대 중 규모가 가장 큰 온천 시설로 그곳에서 만난 인터뷰이 최병대씨의 단골이기도 했다. 이 분의 인터뷰를 보면서 많은 생각이 오갔다. 그는 1929년생으로 일본에서 소학교와 중학교를 다녔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중앙정보부 전신인 CIC에 직장을 얻어 근무했다. 1965년 한일조약 체결로 일본 영사관이 개설된 후 현지 직원 1호로 채용되어 29년간 근무했다. 광주 항쟁이 벌어졌을 때 광주 일본인들을 안전한 곳으로 이송하는 임무도 하는 등 그는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여러 가교 역할을 했다.
패전 후 약 5,000명 정도로 추정되는 일본인 아내들을 위해 '부용회'라는 단체가 만들어졌다. 그녀들은 일본인에 대한 반감에 괴롭힘을 당하고 막상 한국에 오니 남편은 본처나 정혼자가 있어 훼방꾼 취급을 받기도 했고 한국전쟁 때 남편을 잃기도 했다고 한다.
과거와 원한은 흘러간대도 흘려보낼 수 없는 은혜가 있지
남이 베풀어 준 인정 덕분에 내일로 노 저어 나가는 배도 있지
"이거,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산 내 심정이랄까." - P183~184
엔카를 부르고 일본인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이 분의 말이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말로 설명이 안 되는 감정이 밀려왔다. 그 분의 인생도 어렵게 살아왔겠구나 하는 생각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스타일에 차이는 있겠지만 대중탕의 때밀이 문화는 세계 각지에 존재한다. 그러나 한국의 때밀이가 적어도 일본의 산스케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결이 거친 이태리타월로 때를 '모조리 벗겨내는' 모습에는, 똑같이 몸을 씻는게 목적인 슨스케에는 없는 박력이 존재한다. 뭐랄까, 공세를 가하는, 적극적인 돌파의 느낌이랄까. 이태리타월은 세포를 자극해 각성시킨다. 말하자면 모종의 '전투'와도 같다. - P209
한국 공중목욕탕에 가 본 사람 치고 때밀이를 경험하지 않은 이가 있을까. 나도 몇 번 받았는데 그 때마다 무척 아팠던 통증만 뇌리에 떠오른다. 때밀이에 사용하는 이태리 타월은 부산에서 탄생한 것이라고 한다. 여러 설이 있는데 책에도 소개된다.
네 번째 목적지는 사무카와정이다. 가나가와현 코자군 사무카와정은 동일본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데 전쟁 후 수많은 귀환자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귀환자들의 주택에 욕실이 없어 공중 목욕탕을 개설해달라는 요청에 따라 만들어졌다. 작가들은 '스즈란탕'을 가려고 했으나 2014년까지 운영한 끝에 폐업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설마 하며 갔지만 역시 사라지고 없었다. 이대로 취재를 멈출 수는 없어서 사무카와 도서관을 찾았다. 그곳에서 과거에 귀환자 주택이 있기 전 해군 군수 공장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된다.
1941년부터 1944년까지 사가미 해군 군수 공장에서는 총 5,000톤의 독극물, 폭탄으로 치면 4만 3000여 개의 이페리트 폭탄이 제조됐다는 사실이 판명됐다. "많았을 때는 3,000명 이상의 노무자가 군수 공장에서 근무했다고 합니다." - P265
"조선에서 온 소년공들도 있었습니다. 아마 독가스 공장에 있었을 거예요. 처음에는 지나칠 때마다 '안녕.' 하며 밝게 인사도 해주고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소년들은 땅만 보고 걸었습니다. 눈두덩이는 퉁퉁 붓고 얼굴은 검붉은 색깔로 변하고 옷도 완전히 누더기였습니다. 양심의 가책이 들었고 너무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 모습들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 《사무카와 지역사 연구》 제6호(1993년) - P271
이페리트는 벨기에의 도시 '이페르'에서 유래한 명칭인데 1차 세계대전의 격전지이자 독일군이 처음으로 이 화학무기를 사용했던 곳이다. 피부에 닿으면 문드러지고 들이마시면 기관지와 폐에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되는 독가스다. 1차 대전 후 제네바 의정서에서 화학 무기 사용을 금지했지만 일본군은 아랑곳 않고 이페리트 폭탄을 제조했다.
다섯번 째 목적지는 오쿠노시마 섬이다. 히로미사 현 다케하라 시 항구에서 페리로 15분 가면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지금은 토끼가 뛰어다니는 아름다운 풍경에 온천 휴양지로 유명한 곳이지만 과거 이 섬에는 거대한 독가스 무기 공장이 있었다. 여기서 만든 무기는 중국 동북지역에서 작전에 사용됐다.
1938년 육군참모본부에서 작성한 근처 지도에 오쿠노시마는 지워지고 없다. 비밀 유지를 위해 지도에서 지운 것이다. 오쿠노시마는 종전 후 미군에 점령되었다가 1956년에야 일본에 반환됐다. 그 후 방치되다가 1963년 대규모 휴양 시설로 문을 열면서 과거의 독가스에 대한 기억은 철저히 지운다.
"도쿄 신주쿠에 있던 육군 화학연구소 연구원들은 섬에서 토끼를 200마리 정도 기르고 있었습니다. 완성된 독약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토끼의 털을 밀고 이페리트나 루이사이트를 피부에 발랐어요. 독약은 피부에 스며들었고, 토끼들은 보라색으로 변하며 죽어갔습니다. 사방 5미터 정도 되는 유리 가스실도 만들었습니다. 가스실에 토끼를 집어넣고 독을 태운 연기를 들이마시게 하며 어느 정도의 살상 능력이 있는지 실험한 거지요."
패전 직후 제일 먼저 처분된 것도 바로 그 실험 결과들이었다. - P310~311
관동군 731부대가 실시한 생체 실험이 떠올랐다. 대체 이 광기는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 오쿠노시마 섬은 토끼가 뛰어나니는 자연 휴양지로만 소개되지 과거에 독가스 공장이 있었다는 것은 절대 말하지 않는다.
오쿠노시마에서 생산된 독가스는 중국의 북동지역인 베이탄촌에서 학살 무기로 이용되었다. 베이징에서 남서쪽으로 약 200킬로미터 떨어진 이 곳은 지하도들이 많았는데 일본군은 이곳에 독가스를 던졌고 연기에 뛰쳐나오는 이들을 칼로 베고 총으로 쏘아 학살했다. 베이탄촌 학살 사건의 희생자는 민병과 촌민을 합쳐 800명에 달한다고 한다.
더욱 당혹스러운 것은 종전 후 독가스 공장이 있었던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관련 시설물들을 태평양 바다 수중에 매장한 것이다.
오쿠노시마 섬 독가스 공장에서 일했던 한 후지모토 야스마 씨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저는 잊지 않습니다. 괴물로 만들어진 것, 범죄자로 길러진 것, 사람을 죽이는 도구를 만들어야 했던 것, 절대로 잊을 수가 없습니다.
화학 방정식은 사람을 죽이는 방정식입니다. 독가스는 저의 몸을 파먹어 들어갔을 뿐 아니라 아무 죄도 없는 중국인을 죽였습니다. 그걸 위해 필요한 방정식이었습니다." - P360~361
그는 2004년 중국에 가서 피해자들에게 사죄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죄의 말을 건넨다고 해서 죽은 피해자들이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니기에 내내 그의 마음을 괴롭힌다고 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그래도 그의 진정한 사과를 듣고 피해자들은 마음이 풀리지 않을까.
작가 모두가 일본이 전쟁 가해에 대한 책임을 사죄하지 않는 것에 대해 분개하는 태도를 갖고 있어 이해하는 데 편했다. 서두에도 이야기했지만 이 책이 목욕탕에 대한 이야기로만 끝나지 않아서 좋았다. 관련 역사, 지역에 대한 소개, 나아가 일제가 남긴 전쟁 피해에 대한 장소와 인물을 찾는데 이르기까지 여정을 보여주고 인물에 대한 인터뷰로 400여페이지인데도 불구하고 술술 읽히는 장점이 있다. 전쟁과 목욕탕에 대한 교집합이 궁금하다면 그렇지 않아도 동네 어른이 전해주는 옛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편안함으로 접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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