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는 어느새 고전의 반열에 오른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고 계속 꾸준히 독자를 유입하는 것은 그만큼 이야기 자체의 흥미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소설을 읽을 때 나는 주로 나를 들여다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 또 소설 속 인물들을 통해 과거 이 땅에서 실제로 발생했던 사건을 선조들이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간접적으로 확인한다.
토지 1권을 오디오북을 통해서 완청(!)했다. 처음에는 집중도 어렵고 이야기가 잘 들어오지 않았는데 듣다보니 배우들의 연기에 힘입어 빠져드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최치수에 대해서만 잠깐 언급하고 넘어가려고 한다.
처음에는 좀 으스스하고 기괴하다 생각했다. 나중에는 날카롭다는 느낌을 받았다. 안에 있는 화를 분출하는 법을 제대로 모르는 어린아이의 못된 심보 같은 것도 보인다.
앞으로 그가 어떻게 될지 궁금해졌다.
줄거리를 이야기하고 사건 및 인물들에 주목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에는 아무래도 자신이 없다. 따라서 소설의 역사적 배경에 주목하고 거기에 사견을 붙이는 것으로 소감을 대신하려 한다. 앞으로 읽어나갈 이야기도 그렇게 진행할 것이다.
1권의 시대적 배경은 1896년에서 1897년까지다.
동학농민들이 주장했던 폐정 개혁안으로 노비제는 공식적으로 폐지된다.
책에는 동학농민운동과 을미사변이 배경으로 등장한다.
1894년부터 1895년까지 동학농민운동이 전개되면서 들불처럼 민중이 일어났고 1895년 을미사변까지 발생하면서 정국이 혼란스러웠다.
두 사건은 국내 정치 뿐 아니라 주변국의 정세까지 바꾸어놓는 결과를 낳는다.
동학은 당시 사회의 기층민중과 불만에 찬 백성들을 결집시키며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동학은 자신들을 포라고 했는데 법포와 서포가 있었다. 법포는 최시형을 받들었는데 시형의 호가 법헌이었기 때문이다. 서포는 서장옥을 받들었는데 수원 사람이었다. 서장옥과 최시형은 모두 최제우의 학문을 따랐고 최제우가 사망하자 각각 도당을 세워 이어가면서 이름하기를 포덕(布德)이라 했다.
동학교도들은 산 아래 평지에 성을 쌓고 사방에 문을 냈으며, 그 안에 모여 깃발을 내걸고 대오를 정비했다. 큰 기에는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라 씌어 있었으며 그 아래 중앙에 황색기를 꽂고 사방에 각각 방위를 나타내는 색깔의 기(色旗)를 내걸었다. 포접과 지역을 나타내는 작은 기도 무수히 많았다. 이들은 양곡을 조달하기 위해 더러 부자를 잡아다 결박하기도 했고 돈을 거두어 쌀을 무더기로 사오기도 했으며 새로운 방문과 통문을 내기도 했다. 이때에 모인 각지의 대접주는 손병희, 임규호, 손천민, 김덕명, 손화중, 김기범(김개남), 김낙삼, 김방서 등이었다. 이들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중심의 접주들이었다. -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8권 P167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의 학정 이후 안핵사로 파견된 이용태의 실정으로 동학 교도들이 봉기하면서 시작되었다. 조정에서는 이를 소요로 판단하여 홍계훈을 초토사로 파견하였으나 동학도들은 계속 유입되면서 마침내 전주성을 함락시켰다. 동학농민군은 전주에서 물러난 후 전라도에서 반봉건 투쟁을 이어간다.
"지금의 형세를 살피건대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수 없다. ... 권력을 쥐고 있는 대신들은 모두가 외척이고, 밤새도록 하는 일은 단지 자기를 살찌우는 방법만을 궁리할 뿐이다. 자기 당파의 무리를 각 고을에 나누어 퍼뜨려 백성들을 해롭게 하는 짓을 일삼케 했으니, 백성이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지금의 초토사 홍계훈은 사람됨이 무식할 뿐만 아니라, 동학의 위세에 겁을 내면서도 어쩔 수 없이 출병하였다. ... 가장 애석한 일은 3년 안에 우리나라가 러시아에 귀속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까닭에 우리 동학이 대대적으로 의병을 일으켜 백성들을 편안케 하려 한다." - 대한계년사 2권 P26~27
이 때 조정 대신 민영준은 동학의 위세가 커지자 위기를 느끼고 청에 구원 요청을 하게 된다. 청이 조선에 들어오면서 이전에 청과 일본 간에 맺은 조약에 따라 일본도 조선에 들어오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5월 8일 관군이 동학군을 물리치고 전주성을 되찾은 후 궁궐 안에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관제를 고쳐 2부 8아문으로 바꾸고 개혁 방침을 발표한다. 이것이 갑오개혁이다. 일본군은 청군을 성환에서 공격하여 청군이 평양으로 달아난다. 양국간의 충돌은 7월 1일 청나라가 일본에 전쟁을 선포하는 조서를 내리고 일본도 전쟁 선포 선언을 하면서 전쟁으로 이어진다.
6월 21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면서 고종과 민비를 연금하고 대원군을 앞세워 신정권을 수립하면서 내세운 명분은 기존 청과의 조공 관계를 끊고 자주국임을 선포하고 일본군으로 하여금 청군을 몰아내게 하는 것이었다.
"대조선국과 대일본국 정부는 조선개국 5백3년(1894) 6월 23일, 대일본 메이지 27년(1894) 7월 25일, 조선국 정부는 청나라 군대의 철수 사안을 조선국 서울 주재 일본국 특명전권공사에게 맡기고 그가 대신 힘을 다한다는 사항에 대해 진심으로 조약을 맺었다. 이후 두 나라 정부는 청나라에 대해 이미 서로 도와 공격과 수비를 함께 하기로 입장을 세웠다. 관련된 사실들의 원인을 분명히 드러내고 아울러 두 나라가 함께 하는 일이 분명히 성공하기를 바란다는 뜻에 따라 아래의 두 나라 대신은 각각 모든 권한을 위임받아 조관을 의논하여 결정한다. ... - 대한계년사 2권 P65
정부의 행태에 분개한 전봉준은 삼례에서 남접과 북접의 연합전선 형성을 모색한다. 마침내 10월 중순 농민군과 관군은 공주에서 맞붙었고 이곳에서는 농민군이 승리하였다. 그러나 11월 8일 우금재(우금치) 전투에서 농민군이 대패하면서 그들의 저항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전봉준과 김개남은 체포된 뒤 처형된다.
관군은 일본군 사이사이에서 총을 쏘아 댔다. 농민군은 끝내 우금재 너머 언덕으로 물러나 산등성이에서 쏘아 대는 대포와 총의 사격거리를 피했다. 이때 관군 수십 명이 산을 내려가 작은 언덕배기를 장애물로 삼고 총을 쏘았다. 패색이 짙어진 농민군은 보루를 버리고 달아났다. 일본군과 경리청군 50여 명은 달아나는 농민군을 남쪽으로 십여 리를 추격했다. 이 우금재의 싸움에서 "쌓인 시체가 산을 가득히 메웠다"고 할 만큼 농민군은 크게 패배했다. 11일, 능치를 지키던 관군은 빼앗은 농민군의 옷과 수건을 착용해 농민군 모습으로 위장했다. 관군은 산을 기어올라 농민군에 근접했다. 농민군은 위장한 관군을 동료로 오인하였는데 위장 관군이 근접해서 불의에 총을 쏘아 댔다. 기습을 받은 농민군은 놀라 흩어졌다. 관군은 대포를 노획했고 많은 연환을 빼앗았다. 이 능치전투를 끝으로 농민군은 12일부터 점차 흩어져 갔다. -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8권 P276~277
10월 24일 일본은 청의 여순을 함락시키면서 청일전쟁의 기세는 일본으로 기울어지고 1895년 청일전쟁 종전의 결과로 4월 17일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된다. 하지만 전쟁의 과정과 결과로 피해를 입은 것은 조선의 백성들이었다.
"제1관 조선은 완전 무결한 자주독립국임을 확인한다.
제2관 청나라는 봉천성 남쪽 지방 일대와 대만 전체 및 그에 부속한 섬 그리고 팽호열도를 일본에게 떼어 준다.
제4관 청나라는 일본에게 군비 배상금으로 고평 은 2억만 냥을 지불한다.
제6관 일본은 청나라 호북성 형주부 사시, 사천성 중경부, 강소성 소주부, 절강성 항주부에서 통상한다." - 대한계년사 2권 P87~88
토지에서 윤보와 용이는 이런 대화를 나눈다.
"대국이 왜눔한테 항복을 했이니, 그게 망조라 말이다. 왜눔들이 개미떼맨쿠로 기어올 긴데, 벌써 항구에는 왜놈들 장사치들이 설친다 카는데, 허수애비 같은 임금 있으나 마나, 총포 든 놈이 제일 아니가." - P123
민씨 일가는 친러배일정책을 추구하면서 친일파를 내각에서 배제했다. 10월 7일 밤 경복궁에서는 민영준의 궁내부대신 내정을 축하하는 파티가 벌어지고 있었고 같은 시각 서울 남산 진고개에서는 일본인 검객과 낭인들과 일본어 신문 기자들이 파티를 벌이는 중이었다. 주한일본공사 미우라 고로는 조선 왕후 시해 명령을 이미 내린 상태였다. 다음날 새벽 일본 낭인들은 훈련대 연대장 일행을 살해하고 근정전을 지나 건청궁으로 쳐들어갔고 고종의 침전에 난입하여 고종은 수모를 당했으며 왕세자는 일본군 장교복장을 한 자에게 상투를 잡혀서 칼등에 맞고 쓰러지기도 했다. 낭인들 중 한 무리가 왕비 침전으로 가서 궁내부대신 이경직을 사살하고 끝내 왕비를 시해한다.
"조선국의 형세는 점점 불운해져가고 있다. 궁중이 날로 모든 권한을 틀어쥐고는 망령되이 국정에 간여하고, 우리 정부가 계도하여 개량한 헌정 체제를 문란시키고 있다. ... 이는 곧 우리나라가 여러 해 동안 노력과 재정을 들여가며 이 나라를 위해 경영해온 호의를 저버린 것이며, 내정의 개량을 방해하며 독립의 기초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 " 때마침 대원군은 궁중을 혁신하고 도와서 바르게 이끄는 책임을 스스로가 맡겠다고 하면서, 미우라 고로오에게 자신의 뜻을 암암리에 전달하고 도움을 구했다. - 대한계년사 2권 P102
일본 장교는 군사의 대오를 정렬하여 합문을 빙 에워싸 지키도록 명령하여. 흉악한 일본 자객들이 왕후를 수색하는 것을 도왔다. 이에 자객 20~30명이 그 우두머리의 인도로 칼을 빼어 들고 전당으로 불쑥 들어가 왕후를 찾았다. 밀실에까지 이르러 궁녀들을 만나자 함부로 머리채를 휘어잡고 구타하며 왕후가 있는 곳을 물어보았다. 자객들은 여러 방을 샅샅이 조사하여 마침내 조금 더 깊은 방안에서 왕후를 찾아내고는, 칼날로 찍어내려 그 자리에서 시해했다. - 대한계년사 2권 P119
왕비 침전에서 여인들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폭도들은 궁녀와 왕세자 이탁(순종의 본명)을 통해 피살된 자 중의 한 사람이 민비임을 확인하고는 민비의 시신을 홑이불에 싸서 인근 녹원 솔밭에서 석유불에 태워버렸다.
민비 시해의 음모 단계에서부터 가담한 조선인이 한 명 있었는데 그는 훈련대 제2대대장으로 있던 우범선(1857~1903)이었다. 훈련대는 그해 친일정권에 의해 창설되었는데 우범선은 민씨 정권의 훈련대 해산계획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주한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에게 포섭된 우범선이 이 사건에서 맡은 임무는 훈련대 병력동원과 민비의 시신 '처리'였다. 폭도들에 의해 시해된 후 불태워진 민비 시신의 타고 남은 재는 궁궐 내 우물에 버려졌고 유해 일부는 우범선의 지시로 휘하의 증거인멸을 위해 땅에 묻어버렸다. - 한국근대사산책 2권 P296
11월 26일 왕비가 복위되고 대원군은 은퇴하였지만 전국 곳곳에서 유림들은 자결을 하거나 단식을 하며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의병들은 친일내각 타도를 외치며 일어섰고 정부는 12월 1일에야 왕비 시해 사실과 국상을 공포한다.
조선의 선비들에게 단발령은 충격적인 사건이었고 청일간의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외국의 입김이 강해진 조선을 바라보는 양반들의 시선은 점차 다양해졌다. 중인 계급인 역관의 중요성이 커지듯 시대는 달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양반들은 기득권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허허 이 사람아, 할 수만 있으면 못할 건 또 뭐 있누. 그래 서울서는 변의장이나 단발이 어느 정도요?"
"양복으로 갈아입은 사람들은 아직 지극히 희소하오만 단발은 그보다는 많이 했지요."
"인심이 흉흉했었소. 게다가 민비를 살해한 뒤끝이어서."
"요즘도 서울 근교에서 의병들이 출몰한다고 들었는데."
"글쎄올시다. 서울 근교뿐이겠소. 도처에서 낭당을 이끌고 소란들 피우는 모양인데, 단발령 하나 가지고 나라 안이 벌컥 뒤집힌대서야 남들 보기에도 딱하고 어릿광대스럽지요."
...
"어차피 풍습이라는 것은 앞서가는 사람들을 따르게 마련인데 조만간에." - P200~201
"갑오년 공사노비 제도 혁파한 것부터가. 썩어빠지고 얼이 빠진 놈들! 천비한테 아양 떠는 사당 같은 놈들!"
"세상이 변했다 말씀이오. 아니지요. 양반 놈들 창자가 썩은 것뿐이오."
치수는 날카롭게 웃었다.
"옳은 말씀이오. 편견임에 틀림이 없소. 허나 재물과 목숨 지키려고 상것들에게 허리 굽히는 짓은 아니하겠소. 두고 보시오. 이젠 상놈들은 양반 상투 움켜쥐고 올라앉아서 끝장까지 망하는 꼴 보려 할 게요."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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