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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조선총독부박물관과 식민주의

category 리뷰/책 2022. 8. 2. 10:49

국립중앙박물관 이전의 역사는 어떠했을까. 과거의 유물이 일부는 이왕가 박물관으로, 조선총독부박물관으로 옮겨지는 동안 역사는 빠르게 변화하였다. 

종종 국립중앙박물관을 찾곤 했다. 상설전시장은 물론이고 특별전이 있을 때면 1년에 한 두번 정도는 먼 걸음이지만 찾아가 보았다. 지금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박물관에서 평일 수요일 낮에 무료 강의를 열기도 했는데 그것도 몇 차례 들었었다.

전국의 많은 박물관이 있지만 국립중앙박물관은 특히 대한민국 이전의 많은 유물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식민지에도 박물관이 설립되었다. 그 배경은 무엇일까. 선전과 홍보에 최적화된 탓일 것이다. 근대화의 바람을 타고 서구 문명이 최고라고 선전되던 때다. 자신들의 문명을 과시하면서 식민통치의 정당성과 합리성을 제시하는 장으로 박물관은 철저히 이용되었다. 식민지 조선에도 이에 부응하는 목적으로 조선총독부박물관이 세워졌다. 1915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시정 5년 성과를 위한 조선물산공진회가 개최되었는데 공진회가 끝나고 난 뒤 미술관 건물을 전용하여 개관한 것이다. 총독부박물관은 경복궁 내 세워지면서 과거 왕조의 공간에 근대 공간인 박물관 건물을 세워 식민자 중심의 논리를 펼치는 장으로 이용되었다. 



이 책은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설립 과정과 목적, 조직의 운영, 박물관이 벌인 조사 사업, 시기에 따른 변화 과정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총독부박물관은 조선총독부 내의 과 단위에 소속된 하부 기구로 출발했다. 때문에 관장직은 존재하지 않았고 운영 실무 책임자는 과장 아래에 위치한 주임급 정도였다. 박물관 인력은 제국대학 출신의 주임, 전문 기술자가 하부를 맡는 이원 구조였고 조선인의 참여는 배제되었다. 



총독부박물관을 설립하는 데는 초대 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역할이 컸다. 그는 총독 재임 기간 중 조선에서 많은 문화재를 수집하였는데 그가 수집한 유물은 1916년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초기 주요 컬렉션으로 자리매김할 정도로 양이 많았다. 데라우치가 박물관 설립을 결정하고 추진하는 데 영향을 끼쳤던 인물은 미술사학자인 오카쿠라 덴신, 역사학자 도쿄제대 구로이타 가쓰미, 건축사학자 도쿄제대 세키노 다다시이다. 실무자로는 오다 미키지로와 바바 제이치로가 총독부박물관 설립과 운영을 주도했다. 



총독부박물관 초기 전시물은 식민지 조사사업으로 이루어진 물품과 조선주차군사령부에서 받은 조선의 재래 병기, 데라우치 총독의 기증품을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총독부박물관 상설전시는  재질별 전시에서 출발하여, 1921년 고대사 전시부터 시대사 전사가 이루어졌고 1926년이 되면 시대별 전시로 완전히 정착되는 흐름을 보인다.



조선에서 이루어진 문화재 조사사업은 고적조사라는 이름으로 조선총독부 통제 하에 이루어졌다. 고적조사란 식민지배를 위한 조사의 일환이자 식민지 문화재의 보존과 관리의 성격을 지녔다. 고적조사는 여러 부서에서 개별적이고 산발적으로 시행되었는데 1920년대 초반을 기준으로 제국대학 교수 주도에서 재조 일본인 주도로 주체의 변화가 일어난다. 고적조사는 총독부박물관의 주요 사업이었지만 재정난으로 인해 민간 모금을 통한 조사가 이루어진 경우도 많았다. 



1920년대 이후가 되면 박물관에 대한 확장 논의가 일어난다. 일제의 정당성 확보의 선전을 확보하고 박물관의 기능과 역할을 확대하기 위한 필요성이 높아진 탓이다. 결국 확장 계획은 1935년 시정 25주년 기념사업으로 추진된 종합박물관 건립계획으로 귀결된다. 하지만 태평양전쟁의 시작으로 박물관 소장품조차 공출의 대상이 되면서 확장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전쟁 피해 방지를 위한 박물관의 대응책 마련에는 일제와 조선 간의 차이가 있었다. 일본은 전쟁 피해로부터 박물관과 문화재 보호를 위해 적극적 대책을 마련하고 실행에 옮겼으나 조선 총독부와 행정 관료들은 소극적 태도를 취했고 오로지 박물관 식무 직원들의 노력에 의존하였다. 총독부박물관은 일본 제국대학 교수를 비롯한 일본인들의 전유물이었고 조선인 직원들은 초기에 일시적으로 차출되거나 1930년대 이후에는 말단으로 행정 보조 업무에 종사할 수 있을 뿐이었다. 당시 문화재 뿐 아니라 보호시설에 설치된 금속도 회수당하였고 사찰 문화재의 공출 피해도 컸다. 국내에서는 아직 일제 말 금속 공출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지 않았는데 이는 심각한 전쟁 범죄이므로 반드시 체계적인 조사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총독부박물관 관람은 1937년 이전까지는 일본인 관람객이 많았고 이후에나 조선인 관람객이 급증한다. 이는 학교를 중심으로 한 단체 관람이 늘어났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에 조선인 관람객이 적었던 이유는 박물관 관람 문화가 생경했던 이유도 있겠지만 식민권력이 만들어낸 장소에 대한 의구심과 거부감도 존재했을 것으로 보인다. 



총독부박물관 주변에는 조선에서 생산된 고적조사의 결과를 자체적으로 소비하던 소수 계층이 존재했다. 일본 제국대학 교수와 총독부박물관을 중심으로 한 관변 고고학과는 다른 경성제대에 있었던 민간 학자들 중심의 경성고고담화회가 그것이다. 경성고고담화회가 나올 때쯤이면(1941년 이후) 관변고고학에서 축적된 고고학 지식이 유통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다. 단, 이는 폐쇄적 성격을 지닌 단체였다. 여기에 참여한 조선인 김재원은 해방 후 국립박물관 관장을 맡게 되고 한국의 박물관계를 주도하게 된다. 김재원은 해방 이전 박물관 주임을 맡은 아리미쓰 교이치 등과 교분 관계를 유지하면서 인맥을 넓혔다.



꼭 기억해야 할 인물 두 명을 소개한다.



먼저, 구로이타 가쓰미다. 그는 일본 고문서학 체계를 수립하고 문화재의 보존과 조사에 지대한 역할을 한 도쿄제대 교수로, 일본 역사학계의 거물이다. 그는 1912년부터 국립박물관에 관한 구상을 강력히 펼쳐 박물관과 고적조사사업 및 보존관리가 하나의 기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다. 1915년부터는 한반도 고적조사에 관여하기 시작했고, 1916년 고적조사위원회를 발족시키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1922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인 아리요시 주이치와 대학 동창의 인연으로 조선사 편수작업을 진두지휘했다.



두 번째는 후지타 료사쿠다. 그도 도쿄제대 출신으로 1922년 조선총독부 고적조사 사무 촉탁으로 부임한 후 1923년이 되면 박물관 주임으로 임명되어 박물관 운영에 대한 실질 책임을 맡게 된다. 1926년 6월 경성제대 법문학부 조교수로 임명되었지만 촉탁 신분으로 박물관 주임직은 이후에도 계속 유지한다. 1932년이 되면 경성제대 조선사학 제1강좌를 맡게 되는데 이는 1945년까지 이어진다. 



둘은 조선 총독부박물관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책임진 핵심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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