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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중국철학사 (상)

category 리뷰/책 2022. 8. 1. 16:48

꽤 오랜동안 역사를 읽어오면서 자국의 역사 뿐 아니라 이웃 나라인 중국과 일본에 대한 역사를 공부해야겠다 마음먹었던 기억이 난다. 구체적인 계기는 생각이 안나지만 아마도 차곡차곡 필요성이 누적된 것이라 여겨진다. 
이 책을 도전하기로 했던 이유는 결국 그것에서 출발한다. 중국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결국 사상가들, 즉 철학자들에 주목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이 중국사, 나아가 한반도와 일본 등지에 끼친 영향이 크고 심지어 이들은 동양 사상을 대표한다 여겨지기도 한다. 때문에 이들을 공부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인 풍우란은 20세기 중국을 대표하는 철학자로 특히 이 책을 펴냄으로 인해 큰 족적을 남겼다 할 수 있다. 무려 27쇄다. 지금은 더 추가됐을 수도 있겠다. 한 권의 책이 20쇄가 넘어가도록 꾸준히 읽힌다는 것은 정말 가히 놀라운 일이다. 

저자가 사료를 선택한 기준은 다음과 같다. 
- 토론한 내용이 철학에 존재하는 문제들의 범위 내에 있는 것
- 새로운 “소견”이 들어있는 저술
- 철학자의 소견, 즉 중심 관념이 있는 것
- 이지적 논변으로 표출된 것
- 한 철학자에 관한 서술 가운데 인격을 드러내는 것
이렇게 선택한 자료를 헤겔의 정반합 관점과 연결시켰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정은 전통적 견해, 반은 실증을 찾을 수 없는 경우, 합은 실증은 찾을 수 없지만 상당수 발생원인이 있다고 여겨지는 경우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여러 사상의 기초 저작을 싣고 저자의 견해를 밝힌 것이 대부분이다. 때문에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독자가 비판적으로 읽는 지혜가 필요하다. 관심이 가는 저작이 있다면 원전(또는 번역본)을 찾아 읽는 것이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철학이라는 용어는 서양에서 온 것이다. 중국 철학은 논증의 측면에서 서양 철학에 비하여 뒤떨어진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중국 철학자들은 지식을 위한 지식 추구를 하지 않았을 뿐 철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중국인의 사상 속에는 한번도 "아"에 대한 뚜렷한 자각이 없었기 때문에 역시 한번도 "아"와 "비아"가 뚜렷이 분리된 적도 없었고, 따라서 인식의 문제(협의의)는 중국철학에서 한번도 큰문제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철학자는 논변하지 않으면 몰라도 변한다면 반드시 논리학을사용해야 한다고 이미 말했다. 그러나 중국철학자들은 대체로 주장을 수립하는 데에 진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났다가 금방 사라진이른바 명가(名家)를 제외하고는, 사상과 논변의 과정 및 방법 자체를 의식적으로 문제시하거나 연구한 사람이 드물었다.
중국철학자는 또 인간사를 특별히 중시한 까닭에, 우주론에 대한 연구 역시 매우 간략했다. - P11

춘추시대부터 한나라 초에 이르기까지 중국역사는 정치, 경제, 사회 모두에 근본적인 변화를 맞이하며 해방의 시대(자학시대)를 맞았다. 봉록의 세습과 정전제가 무너지면서 서민이 사유재산을 획득하면서 부호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공자는 이전 제도가 무너져 가던 시기 등장하여 구제도를 옹호하기 위해 나선다. 이후 유가 학파가 공자의 사상을 계승한다. 자학시대는 전국시대 말이 되면 끝난다. 한 무제(140-87B.C.) 때 재상인 동중서는 공자를 숭상하며 유학을 제도권의 학문으로 끌어올리게 된다. 이 때부터 공자는 신이 되고 유가는 유교가 되었다. 

공자(551-479B.C.)는 중국 역사에 있어서 어떤 위치에 자리할까. 공자는 서양 철학으로 말하면 소크라테스와 비견되는 인물이라 할 것이다. 제자가 그의 사상을 정리하여 출판했다는 것도 비슷하고 사상 면에서도 유사성을 엿볼 수 있다. 공자는 주의 문화를 추종하여 주례를 잘 알았고 또 깊이 이해한 사람이기도 했다.
공자는 소크라테스와 흡사했다. 소크라테스도 원래 "소피스트였지만, 그들과 다른 점은 학생들에게 학비를 받지 않았고 지식을 팔지 않았다는 점이다.
공자는 각각의 이름들에 정의가 있고 정의가 뜻하는 바는 이름이 지칭하는 사물의 본질이라고 보았다(정명론). 공자는 정명론을 통해서 당시의 혼란상을 바로잡으려 했다.
공자의 직, 인, 충, 서, 의, 리, 성 또한 밝혔다. 공자의 철학은 인간의 심리(마음의 도리와 이치) 측면을 매우 중시했다. 그래서 그후 유가는 모두 심리학을 중시했다.

묵자(475?-396B.C.)는 묵가 사상의 중심 인물로 귀족을 반대했고 주의 문물제도를 반대했기 때문에 당연히 유가와 대척점에 있는 입장이었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공리주의와 겸애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맹자(371-289B.C.)는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 생각했고 호연지기를 통해 덕을 함양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공자의 사상을 계승했으나 기존의 귀족을 위한 제도를 넘어서 백성을 위한 정치/경제 제도를 시행하려 했다는 점이 다르다. 모든 정책은 인민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공자를 읽을 때와 맹자를 읽을 때 태도가 달랐던 이유가 이것에서 온 게 아닌가 생각한다

양주는 맹자와 동시대 인물로 위아 사상을 주장하며 자신을 존중하자 말하였다. 맹자는 양주가 일신을 께끗하게 하기 위해대륜을 어지럽혔다며 비판하였다. 하지만 노장은 양주의 사상을 계승함으로써 그의 사상은 이어질 수 있었다.

‘노자’라는 책은 초나라 사람인 이이가 쓴 전국시대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다. 사마천은 이이를 전설 속의 노담으로 병치시켰는데 노담의 모습은 신령과도 같아 전설 속 인물의 모습이다. 이이가 쓴 기록에 노담의 전설이 더해진 후 순자, 장자 이후에는 노자학을 노담의 학문으로 자리하게 된다. 노자학과 장자학의 학설은 같은 듯 다르다. 노자가 말하는 이상적인 사회는 원시 사회가 아니라 소박함을 지키는 사회이다. 야만을 함유한 문명의 경지로 오래 지속 가능한 문명이었다. 노자는 도에 형이상학적 의미를 부여하며 만물의 생성에는 원리가 있는데 그것을 도라 한다 했다.

“변자”는 당시의 “유명 학파”로 “유명 학파”를 통칭하는 말이기도 했다. 변자 학설은 명리(이름에 근거한 판단, 논리학)에 근거를 둔 것이다. 혜시(350?-260B.C.)는 변자 중 하나로 그리스로 따지면 소피스트와도 같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장자의 학설은 “말”과 “지식”의 측면에서는 혜시와 일치한다. 그러나 장자는 혜시가 논변으로 명성을 추구하여 끝내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였기에 재능이 아깝다고 평했다. 

장자학은 전통적 사상과 제도에 반대하는 태도를 견지했는데 유묵을 공박했으나, 노담은 우러러 공경했다. 맹자와 장자(369?-286?B.C.)는 동시대인이었다. 장자의 학문은 양주의 학문이 진일보한 것으로 맹자의 관점에서 보면 장자도 양주의 추종자였고 장자 역시 맹자를 공자의 추종자로 보았다. 장자학이 논한 도와 덕은 노자와 같았으나 그는 천지만물이 변화 가운데 존재한다고 보았다. 본성을 따르는 것이 행복이고 사물은 모두 동등하므로 도와 합일할 수 있다면 하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우주론이 신비주의로 여겨지는 것은 우주와 합일하는 경지에 이르는 것을 최고의 경지라 보았고 그곳에 이른 이를 지인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묵가의 묵경은 유가의 순자, 정명편처럼 변자의 학설을 논박한 것이다. 묵가는 유가보다 더욱 논변을 중시했고 묵가의 제자는 4개의 파로 나뉘었다(상리씨 유파, 상부씨 유파, 등릉씨 유파, 송견과 윤문 일파).각 파들은 서로 달랐고 상대를 별묵이라고 부를 정도로 자기들이 정통이라 주장했다. 묵경에서도 공리주의를 논하면서 이익이 행위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묵경은 인간의 인식 능력을 인간 생명의 본질로 여겼다.

순자(298?-238?B.C.)는 공자를 존숭한 반면 맹자에 대해서는 비판적 태도를 견지했다. 손자는 맹자와 기질적으로도 학문적으로도 차이가 있었다.
순자는 자연지천을 주장했고 이는 노장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순자는 공맹과는 다르게 성악설을 주장했다. 또한 왕도정치와 패도정치를 구분한 맹자와는 달리 순자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종류의 차이가 없다고 여겼다. 공맹의 정명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관점에 치우쳐 있었으나 순자의 정명론은 묵자의 관점과 오히려 비슷했다(인간이 가진 인식능력이 지이고, 지가 외물과 접촉하는 것이 인식이며 이름을 통해서 실제 사물에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법가의 학설은 제나라와 삼진(한, 위, 조)에서 성행했다. 당시 현실은 귀족정에서 군주정으로 가던 때였는데 인민은 독립하고 자유로워지고 국가 범위는 넓어지고 조직이 복잡해지면서 사람 간의 관계가 이전보다 친밀하지 않게 되면서 인물로 사람을 다스리는 정치는 먹히지 않게 되었다. 법가는 한대에 와서 사상으로 자리하게 된다. 법가하면 한비자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 전에 세 파가 존재했다. 신도(395?-315?B.C.), 신불해(385?-337B.C.), 상앙(390?-338B.C.)이 그 중심 인물이다. 세 파는 각각 세(임금은 위세가 있어야 신하를 부릴 수 있다)와 술(군주가 신하를 제어해야 한다), 법(신하가 준수할 법규가 있다)을 중시하는 점이 달랐다. 이 세 파를 하나로 집대성한 사람이 한비자(279?-233B.C.)다. 

진한 무렵 예기, 효경, 대학, 중용을 통해서 이론을 뒷받침하는 저작이 정리된다. 예기에는 주로 예를 논하고 있는데 사람과 사람 간의 충돌을 막기 위해 든 예라는 이론은 차별을 낳고 분리를 낳아 구조적 폐쇄성을 낳는다고 보인다. 오랜동안 이것이 고착화되었고 이는 오늘날로 보면 고리타분한 이론으로 느껴질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전국시대 말이 되면 유가의 육예인 시, 서, 예, 악, 춘추, 역이 정립된다. 진한은 통일 후 정치나 사회상으로 각종 제도를 정립할 때 유자의 힘을 빌렸는데 유자는 이전의 제도에 밝았고 공자 이래 기존 제도에 부여한 각종 이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여러 사람의 사상이 포함된 유가의 사상은 탄력성이 있어 흡수할 수 있는 범위가 넓었던 이유도 있다. 따라서 진한 통일 이후에는 유가에 필적할 수 있었던 사상은 없었다.

중국철학사 상권은 자학시대의 사상을 역사적 흐름에 따라 고찰하였다. 하권은 경학시대로 청나라 시대까지를 다룬다. 
사실 철학사 책이 재밌을 수는 없다. 읽다가 졸기도 하고 정리하느라 애를 먹었으나 이렇게 한 번 훓고 나니 유가, 도가, 법가 사상의 등장 배경과 이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앞으로 중국 문학과 역사를 읽을 때도 이해의 깊이를 넓힐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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