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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두만강 국경 쟁탈전 1881-1919

category 리뷰/책 2022. 6. 14. 10:40
우리에게 한반도의 국경은 자연스레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 부근이고 간도 지역은 1909년 중일간 간도 협약 이후 현재의 영토 범위로 되었다라고 인식되어 있다.
 
남한은 두만강과 압록강이 한반도의 국경임에도 육로로는 가볼 수가 없어 체감상 거리가 까마득하다. 간도 지역은 더하다.
사실 그 지역을 직접 피부로 느끼는 것은 북한일 것이다. 한반도의 국경선이 직접적으로 맞닿아있고 간도 지역도 거리상 가까우니 말이다.
일본은 근대 시기에 식민지 제국의 대륙 발판기지로 만주 지역을 선택하면서 분쟁에 개입했다.
 
지난 저작 《동아시아를 발견하다》에 이어 저자 쑹녠선은 동아시아 근대를 삼국을 중심으로 다각도로 바라본다. 먼저 경계라는 의미부터 살펴본다. 
 
마르틴 하이데거의 유명한 말처럼 경계는 "무엇인가가 멈추게 되는 지점이 아니라 무엇인가가 존재하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이 관점은 변경에도 적용된다. 변경은 단순히 주변이 아니라 상호작용하는 장소다. - P31
 
서양학자 앙드레 슈미드는 두만강 경계 획정을 한국 국가건설 과정의 한 부분으로 간주한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새롭게 상상된 '한민족'이 제기되었고, 민족주의 사상가들이 현재의 정치적 주장을 뒷받침하려고 과거에 대한 낭만적 향수를 이용하기 시작했음을 그의 연구는 보여준다.
나는 이러한 관점을 수용하면서 두만강 지역의 국경 형성을 검토하는 대안적 공간 단위로 '로컬'을 적용할 것을 제안한다. 이 '로컬' 개념에는 '다변적 로컬'과 '지역적 차원의 로컬', '지구적 차원의 로컬' 등 최소한 세 가지 지리적 층위가 포함되어 있다. 이 세 층위는 서로 다르지만 역동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 P33~34
 
 
두만강은 청 제국의 국경이었을 뿐 아니라 조선인의 거주를 허용하고 양국 간 무역을 장려하는 제국의 포용성 그리고 러시아와 일본을 차단하는 제국의 배타성을 모두 보여주는 이중적 상징이기도 했다.
만주에 대한 거버넌스와 인식은 다양한 압력에 따라 그리고 국경을 초월하는 행위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재설정되었는데, 이 행위자들은 최소한 세 가지(국내, 양자 간, 다자간) 상호작용하는 공간 층위와 관계되었다. - P89
 
그리고 한 사건이 등장한다. 1931년 7월 두만강 국경에 있던 정계비(목극등비)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조사차 들렀던 사람들은 비석을 확인했으나 백두산 천지에 다녀온 사이 그 자리는 텅 비고 실체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것은 조사의 핵심 증거물이었다. 
 
두만강과 간도를 둘러싼 이전 역사를 살펴보자.
 
두만강 유역 부근은 조선 초기 6진이 조선의 영토가 되면서 남쪽에 있던 백성들이 이곳에 유입되며 시작되었다. 하지만 국방을 위한 혹독한 세금의 수취 요구와 차별 및 배제로 많은 백성들이 불편과 고통을 겪고 있었다. 17세기 청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전해준 지도 제작법을 전수받고 새 지도 제작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청은 1710년 이전부터 답사대를 만주로 여러 차례 파견하면서 백두산을 황실의 산으로 선전하고 왕조의 건국신화를 강화하는 작업을 했다. 1710년 그 지역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지자 강희제는 목극등에게 재판을 감독하고 끝나면 청과 조선의 경계를 조사하라 명령한다. 조선은 청의 의도를 간파하였으나 협력할 수 밖에 없다 느끼고 1712년 현지 조사 후 두만강 수원지로 결정하고 6월 18일 비석(정계비=목극등비)을 세운다. 얼마 후 조선은 이 때 선택한 수원지가 두만강이 아닌 송화강의 지류임을 알게 되었으나 조정은 이 문제를 묻기로 하면서 청 조정은 이 사실을 모르고 넘어간다.
1713년 목극등이 백두산 수계와 지리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요구하자 조선 조정은 주는 시늉은 하되 자신의 이익을 지키려고 잘못된 지리 정보를 주었다. 장 밥티스트 레지(1663~1738)는 목극등이 한국에서 수집한 자료에 기초하여 한국에 관한 지식과 지도를 생산했고, 이는 나중에 프랑스의 중국학자 장 밥티스트 뒤 알드의 중국 서술에서 재생산되었다. 이후 약 200년이 지난 뒤 시노다 지사쿠는 레지 원고에서 특정 부분만 골라내어 사실을 편집하고 왜곡했다. 두 세기 넘게 변형된 지리 지식은 일본인에 의하여 두만강과 압록강 이북의 땅이 '무주지'로 간주되는 증거로 이용되기에 이른다.
 
한족과 만주족 정치가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추진해온 '영토화'와 '내지화'의 지속적 실천은 만주족의 고향이 '중국'이라는 새로운 개념 안으로 통합되어가는 길을 예견했다. - P154
 
간도 지역에 1877년 조선인 14가구가 용정에 처음 정착했다. 본래 있었던 세금 폐해에 이 무렵 조선에 심각한 자연 재해가 발생하자 많은 백성들은 살기가 어려워졌고 이에 자발적으로 간도로 넘어가게 되었다. 1881년 조선인의 월경 사건을 계기로 청과 조선이 두만강을 둘러싼 국경 조사/협상을 시작했으나 1887년까지 이어진 후속 조사에도 양국 간 타협을 보지 못한채 종결된다. 이후 청일전쟁의 결과 일본이 승리하면서 천하질서는 막을 내리고 청과 조선 모두 세계 질서로 진입한다. 이후 알다시피 1909년 간도 협약으로 두만강의 국경선이 확정되었다. 1909년 조선은 이미 외교권을 상실한 상태였고 일본은 이미 남만주 철도부설권 획득으로 대륙 진출의 야욕을 드러낸 상태였다. 러시아도 부동항을 얻기 위해 만주를 노렸으나 러일전쟁에서 일본에 패하면서 그 기회를 잃었다.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이후 독립운동을 위해, 먹고 살기 위해 간도에 모여드는 조선인들이 많아졌다. 청은 이를 어느 순간 민감하게 여겼고 일본도 식민지민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영토 전쟁에 뛰어들었다. 
 
만주에서든 전국 각지에서든 '비적'에 대한 청의 정책은 탄압과 수용이 결합된 야누스식 전략이었다. 반군을 진압하는 데 실패했다면 항상 대안은 있었다. 반군을 진압하는데 실패했다면 항상 대안은 있었다. 반군을 사면하고 그들을 징집하는 것이다. 이 전략은 비정부 무장 세력에게 국가와 사회 사이에서 활동할 수 있는 상당히 넓은 공간을 허용했다. 만주의 야심 찬 젊은이들에게는 토비가 되는 것이 단순한 생존 전략이었을 뿐만 아니라 신분 상승의 수단이기도 했다. 만주에서 여러 국가가 벌인 정쟁은 비정부 무장 세력이 서로 경쟁하는 국가들과 협력하거나 대항할 더 많은 선택지를 제공했다. - P187
 
 
두만강 국경 획정 과정은 동아시아 민족과 국가가 근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를 남겼다. 이 과정은 복잡하게 얽혀 있었고 이후 이 땅에 조선족이 정착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기존의 연구는 두만강 경계의 영토 주권 문제에 집중한 측면이 크다. 이 책은 연속성을 이야기한다. 시간적으로는 전통에서 근대의 과정이 이분법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전통을 극복하고 근대를 수용하는 과정이 공존하고 상호작용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고 이야기한다. 공간적으로는 두만강을 단절된 경계선의 영역이 아닌 수많은 사람과 물자가 오랜 시간 교류하고 소통해온 연속된 공간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동아시아의 다변적 변경지대를 개념화하는 과정에서 유라시아대륙 양편 사이의 지적 연계의 역동성이 드러났다. 로렌 벤튼의 표현을 빌리면 무주지 개념이 보여준 여정은 "갈수록 더 서로 연결되는 세계 속에서 공간의 점진적 개념화에 관한 지배적 매력적인 서사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지난 3세기에 걸쳐 지구의 다양한 지역 간에 이루어진 오랜 기간의 상호교류로 권력을 둘러싼 경쟁에 따라 공간과 법에 관한 지식은 다양한 형태로 생산 재생산되고 변형되었다. 두만강 국경 지대에 대한 인식의 전환은 그 사례이며, 이로써 우리는 유럽과 동아시아의 관계를, 특히 서로가 상대방의 역사적 발전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더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 P248
 
책을 읽고 난 후 한국사에서 다루는 한국 영토의 인식에 대해 생각이 많아졌다. 정권에 따라 역사 교육은 저마다 다르게 전개되고 자국사를 한편으로는 국수적이고, 다른 한편으로 근대화와 개발의 논리에 맞춰 가르친다. 이에 맞춰 과거사의 영토의 범위는 축소되고 확장되었다.
역사 인식에 다양한 관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배우고 수용하는 대로 익숙한 관점에서 바라보기 쉽다. 이 책은 그런 내 좁은 관점과 식견에 대해서 상기시키게 만들어주는 책이었다.

 

간도와 만주를 둘러싼 영토 경쟁과 함께 이 다변적 변경에서는 지적 차원에서 '탈영토화'와 '재영토화'가 진행되었다. 한국과 중국, 일본의 대표 지식인들은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제시하면서 이 공간에 대하여 각각 민족주의적 제도주의적 식민주의적 계획과 구상을 제시했다. 각자의 구상은 상대방으로부터 지적 자원을 흡수했고, 서로 경쟁하면서도 서로에게 영감과 양분을 주며 강화했다. 이 다변적 상호작용 과정을 거치면서 만주, 특히 백두산의 개념은 그 환상이 벗겨졌다가, 합리화되었다가, 다시 환상이 입혀지는 과정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만주는 20세기 동아시아 정신의 역사에서 복합적이고 핵심적이며 독특한 위치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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