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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완전한 이름

category 리뷰/책 2022. 6. 7. 10:17
내게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반응하는 분야의 책이 있다면 미술 쪽일 것이다. 미술 중에서도 그림이 그렇다.
미술을 잘 모른다. 학교 때도 미술 점수는 늘 바닥이었다보니 그 시간이 오는 것이 나중에는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점수를 얻고 평가를 받아야 하는 교육 현장을 벗어나니 그제서야 조금씩 그림들이 눈에 들어왔다.
30대 이후 여행을 가면 박물관과 미술관을 보러 다녔고 외국 작가의 전시가 국내에서 열리면 종종 보러 가고는 했다.
2년 전 이사를 하면서 거리가 멀어지고 코로나 등의 여파로 전시회를 거의 가지 못하고 있는 게 아쉽다.
 
책에서는 세 개의 주제를 바탕으로 다양한 여성 예술가들을 다루고 있다.
 
 
- 호기롭게 길을 떠난 이들.
 
프리들 디커브란다이스.
10년도 훌쩍 지난 지난 이야기지만 독일 바이마르에서 만났던 바우하우스 건물이 생각났다.
바우하우스 하면 현대 건축에서 이정표 같은 역할을 한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바우하우스의 교육 이념은 평등이었으나 결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여성들은 공방 등에서 일해야 했고 심지어 등록금도 더 비쌌다고 한다.
프리들 디커도 바우하우스 교육생 중 한 명이었다. 유대인이었던 그녀는 탈출에 실패하고 결국 수용소로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쳤다.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보면 나비 등의 이미지가 그려져 있다. 선생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듬뿍 담겨 있는데 죽기 전 이들은 그림으로나마 평화를 꿈꾸었을까.
 
엘리자베스 키스
어디서 많이 본 이름이다 싶었는데 결정적으로 게일 신부의 이름을 보자마자 아!!! 했다. 키스의 책이 복원판으로 나온 것도 알고 있었고 게일 신부의 책은 이미 가지고 있었다.
키스 자매들은 이방인으로 낯선 땅 조선에 왔다가 눌러 앉아 조선의 골목을 누비며 조선 민중의 삶을 주목했다. 특히 여성들의 그림이 많은 것이 눈에 띤다.
키스 자매들이 보기에 조선인 여성들은 임신 및 육아, 가정 살림까지 많은 것을 감내하며 힘겹게 사는 것으로 비쳤던 모양이다.  그녀들의 시선이 따뜻하다는 게 느껴져서 좋았다. 이걸 보며 키스 올드 코리아 복원판을 구입해야겠다 생각했다.
 
노은님 
타국에 가서 하마터면 꾸준히 그림을 그려 이름을 알린다는 게 정말 대단하게 느껴졌다.
저자는 노은님이 파독 간호 경력 2년으로만 알려지고 이후 긴 예술 활동에 대해서는 주목받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힘찬 걸음을 표현한 <큰 걸음>은 방향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른 느낌을 주는 것 같기도 하다.
앞으로도 그녀의 다양한 작업을 만나고 싶다.
 
정직성
정직성은 예명이다. 들으면 바로 꽂히는 이름이라 한 번 각인되면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그림에만 국한되지 않은 다양한 예술 세계를 보니 그녀는 한계를 모르는 예술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일단 서울의 연립주택을 표현한 그림을 보면서 현실을 예술로 이토록 잘 승화시킬 수 있구나 해서 놀라웠는데 이런 작업은 계속 필요하지 않나 생각했다.
하루가 다르게 무너지고 바뀌는 서울의 도시 풍경은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의 모습이 담긴 프로필의 문패도 인상적이었다.
 
- 거울 앞에선 이들.
 
베르트 모리조
인상파 여성 멤버인데 주로 마네의 그림에 모델로 많이 등장했다.
파리 살롱전에서 6번이나 당선된 이력을 가진 화가인데 왜 나는 마네의 이름은 알면서도 그녀의 이름은 알지 못했을까.
책에서는 몇 개의 작품이 나오지 않지만 모리조 이름으로 검색한 그림들을 보니 하나 같이 다 화사하고 예쁘다.
인상파 그림의 특징을 잘 담고 있으면서도 주변의 환경을 잘 그려냈다는 생각이 든다.
 
파울라 모더존베커
누구의 아내도 엄마도 딸도 아닌 파울라 모더존베커.
<옆으로 누운 엄마와 아이>는 엄마와 아이의 유대성과 친밀감이 잘 느껴졌다. 그 시기는 지금보다 아이를 낳는다는 것이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웠을것이다.
그녀의 그림들 속 얼굴의 눈동자가 동그랗고 크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찾아보니 아이를 낳고 얼마 안 되서 찍은 사진 속 모습과 일치한다.
아이를 낳고 얼마 안 되서 색전증으로 사망했다니 31살의 짧은 생애가 너무도 안타깝다. 더 많은 작품을 남길 수 있었을텐데...
 
버네사 벨
버지니아 울프의 언니가 화가였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녀의 작품들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못했다.
책에서 다루고 있는 작품들이 아이러니하게도 버지니아 울프와 노년의 모습을 담은 자화상이다.
유명 작가였던 언니의 그늘에 가려진 자신의 작품 세계를 본인은 어떻게 생각했을지 궁금해진다.
버지니아 울프는 삶을 일찍 마감했으나 상대적으로 버네사 벨은 꽤 오랜 삶을 살았다.
 
천경자
몇 년전 근대 여성에 대한 전시로 <신여성 도착하다> 를 보러 간 적이 있었다. 여기에서 천경자를 처음 만났다. 도록도 집에 갖고 있는데 신여성들의 다양한 예술 활동에 주목한 전시여서 정말 흥미롭게 보았던 기억이 있다. 천경자의 작품은 고전 기법의 그림부터 서양화까지 스펙트럼이 넓다는 생각이 들었다.
뱀 여러 마리가 인간의 머리 위에서 또아리를 틀고 왕관 형태를 하고 있는 그림은 그 자체로 신선하고 충격이다. 다시 봐도 놀라운 그림이다.
박경리 선생님과 가까운 사이였다라는 것은 몰랐는데 그녀를 묘사한 글을 보니 정말 잘 표현하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경자의 예술세계는 자유로움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영숙
이 책에서 여러 예술가를 만났지만 그 중 가장 인상적인 인물이라면 박영숙이다. 그녀야말로 스스로 한계를 가두지 않고 뻗어나가는 예술 활동을 하신 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사진 작가인 그녀는 주변 인물들을 사진으로 담기도 하고 제주의 곶자왈에서 시간을 보내며 생태 환경적 사진을 담아내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마녀와 미친년이라는 단어에 주목했다. 여성을 매도하는 단어로 쓰인 마녀, 미친년 말이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예술가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운동가로까지 나아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되찾은 이름들.
 
유딧 레이스터르
최초의 여성 직업화가였던 유딧 레이스테르의 이름은 230년 만에 되찾게 되었다. 루브르 박물관에 거래하려던 그림은 그녀의 것이었으나 나중에 밝혀져 고소를 당했다고.
직업 화가였던 만큼 팔레트와 붓을 들고 있는 그림들이 눈에 띈다.
그녀의 그림을 보고 느낀 건 인물들의 표정이 하나 같이 생동감 있다는 사실이다. 익살스럽기도 하고 유쾌하기도 하다.
바로크 시대 화가로 정물화도 있으나 대부분 다양한 인물들을 그렸다. 섬세한 붓터치가 눈길을 끈다.
 
힐마 아프 클린트
칸딘스키, 몬드리안보다 앞선 최초의 추상화가였다고 한다.
근대의 문, 과학이 떠오르던 시기 그녀는 영속성과 영적 세계에 경도되었다.
미래를 위한 그림을 보면 이집트 피라미드를 연상시키는데 마치 태양을 향한 영적 숭배의 신성함 같은 것이 느껴진다.
개인적으로는 상상 속의 현실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양식으로 추상적인 방식을 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나혜석
나혜석은 근래 들어 많은 자료 등으로 조명되면서 회자되는 여성 화가다.
다만 작가의 말처럼 예술보다는 개인적인 삶에 치중하여 주목하거나 나아가 비난받는 점이 강해서 마음이 좋지가 않다.
그림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가를 논외로 친다면 어쨌든 그녀는 당시로서 조선의 서양 화가라는 타이틀 자체가 희귀할 때 그림을 그렸으므로 그것만으로도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에 전시회도 열고 많은 문화계 인물들과 교류를 했다. 여성으로서 견뎌내야 하는 환경적 부당함에 대해서 끊임없는 주장을 펼쳤던 그녀는 페미니스트 선구자라고 평가될 만하지 않을까.
 
아델라이드 라비유귀아르
아델레이드는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으로 활발히 활동했던 화가였다.
<두 제자와 자화상> 마리 가브리엘 카페와 마리 마거릿 카로 두 제자와 자신의 모습이 담겨 있는데 두 제자도 마찬가지로 아카데미 회원의 일원이다.
팔레트와 여러 개의 붓을 들고 있는 화가와 뒤의 두 명의 제자들의 서로 다른 시선이 재밌으면서도 나는 이런 그림 구도 자체가 생경했다.
무엇보다 아델라이드는 남성 일색이던 아카데미에 많은 여성 화가들이 입학할 수 있도록 하는 등 끊임없이 여성 권리의 신장을 위해서 노력했던 인물이었다.
 
아르테미시아 젠텔레스키
바로크 화가였던 젠텔레스키. 그녀의 그림을 보면 카라바조가 떠오른다. 카라바조보다 그녀가 먼저 활동했다면 젠텔레스키풍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을까.
당시 여성 화가들이 무대에 설 기회가 아주 제한적이었을텐데 젠텔레스키는 그림으로 당당히 피렌체 예술 아카데미에 여성 첫 회원이 되는 쾌거를 이룬다.
하지만 아버지의 지인으로부터 그림을 도와주다가 성폭력을 당하는 사건 이후 법정 싸움까지 가게 되는 수모를 겪는다. 이 때문에 그녀의 작품에 유독 유디트가 많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스스로 주장하고 쟁취할 줄 알았던 젠텔레스키. 그녀는 많은 작품을 남기며 당대 최고의 화가로 성공한다.
 
 
다뤄진 예술가들 중 아는 이름이 얼마 없다는 게 민망하고 죄송했다.
그동안 가려지고 없어진 여성 예술가들의 이름이 얼마나 많았던걸까.
당연히 이 책에서 다뤄지지 않은 수많은 이름들이 있을 것이다. 그 이름들을 찾아내는 작업들이 꾸준히 이어져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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