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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동아시아를 발견하다

category 리뷰/책 2022. 6. 7. 10:18
이 책을 통해 얻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가? '동아시아'와 '현대'라는 용어의 기원과 둘의 관계에 대한 모색이었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현대'는 대체로 19세기 이후 유럽 식민주의의 팽창과 함께 이루어진 세계사적 전환이다. '동아시아'는 어떨까? 냉전 이후 자본주의 국가->발전 이라는 흐름 속에 '동아시아'는 지역적 의미가 아닌 민족이나 종족성 의미를 내포하게 되었다. 저자는 일반적 현대의 개념이 아니라 '동아시아 현대'를 정리하려 했는데 그 기점이 16세기이다. 따라서 부제도 '임진왜란으로 시작된 한중일의 현대'로 되어 있다.
 
'동아시아' '중국' '일본' '한국'은 시대마다 다른 함의를 내포한다. 이 개념들은 구역 내부의 교류 및 구역과 외부의 상호작용 속에서 점차 형성된 것이다.  그것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끝나지 않았으며, 미래에도 분명히 낡은 내용은 버려지고 새로운 내용이 첨가될 것이다. 오직 변하지 않는 것은 그것들에 대한 부단한 정의, 부정, 재정의다. - P15
 
책의 내용은 약 16세기 말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구역의 역사가 세계 역사의 흐름 속에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살펴보는 과정을 담고 있다. 다만 사료를 새로 발굴했거나 독특하거나 새로운 내용이 있거나 하지는 않는다. 대부분 삼국의 역사를 공부했다면 알 만한 내용이기 때문에 상식적인 내용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서양철학자 헤겔(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1770.8.27~1831.11.14)은 이성이 인류를 진보로 이끌어가는 메커니즘을 삼단논법인 변증법을 통해 설명했다. 이는 유럽을 이성-선진-문명-진보로 여기고 아시아는 야만-낙후-우매-정체로 하여 부각시켰다. 이는 일반적인 유럽(인)의 시각이었다.
 
아시아가 존재하는 의의는 유럽이 왜 유럽인가를 증명하는 데 있었다. 1885년 「탈아론」은 헤겔 이래 유럽 사상 속의 이 '아시아 안티테제'를 상당 정도 드러내고 있었다. - P23
 
유럽 중심 시각의 영향 아래 아시아 안티테제'는 동아시아 모든 국가에서 일찍이 자리했다. '아시아주의' 속에 서양은 종족과 문명이고, 제3세계 이론 속에 서양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를 대표하였다. 따라서 ''동아시아' 개념은 내부에서 생겨난 듯 보이지만 매우 강한 외부적 영향이 접목되면서 탄생했다고 보아야 한다.
 
'아시아'는 본래 타인 눈 속의 타자였다. 그러나 동아시아인은 이 개념을 가져와서 역으로 타자를 주체적인 자기 인식으로 변화시켰다. 스스로 인식한 '아시아'도 상당 정도는 유럽(또는 서양)을 안티테제로 삼은 것이다.
「탈아론」에 대한 단순화된 해석은 곧 '현대화'를 탈아와 동일시한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여전히 익숙하게 '우매 폐쇄 야만 전제'와 같은 크고 부당한 모자를 씌워서 동아시아의 역사 경험을 부정한다. 그에 내재하는 논리는 '탈아'와 일맥상통하며, 심지어 지적인 면에서는 더 나태하고 조악하다. - P24
 
 
조선전쟁의 '현대'적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동아시아 국제 관계 기억의 결절점이자 원점이라는 데 있다.
 
첫째, 이 전쟁에 대한 한중일 삼국의 서사는 처음부터 줄곧 서로 다른 방향을 지향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둘째, 삼국은 이후 다른 시기에, 늘 이 전쟁에 대한 회고를 통해 당면한 자신의 운명, 민족의 운명, 세계 구조에 대한 역사적 해석을 찾았다. 자료와 연구가 이미 한우충동汗牛充棟이지만, 이 충돌에 대한 동아시아인의 인식은 시종 혼란스럽게 나뉘어서 나라에 따라, 시기에 따라, 정세에 따라 다르다. 그뿐 아니라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인식과도 연관되어 있으므로 정체성의 변화에 따라 서술도 바뀐다. - P63
 
전쟁에 대한 삼국의 기록은 저마다 다른데 이마저도 서로에게 유리하게 기술되어 있는 탓에 후대의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렵게 할 뿐 아니라 평가에도 어려움을 겪게 한다. 임진왜란을 바라보는 전쟁의 성격, 전쟁의 명칭은 삼국이 서로 다르다.
 
임진왜란의 배경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심도 큰 몫을 차지했으나 더 큰 것은 경제적인 이유였다라고 생각된다. 명과 일본 사이에는 100 여년 동안 감합무역이 이루어졌으나 16세기 중엽이 되면 감합무역은 중지되고 공식적 교류도 단절된다. 이 상황에서 일본은 조선과의 교류가 중요해진다. 이전에 조선과 일본은 통신사와 수신사를 서로 파견하였고 부산에 왜관이 설치되면서 상인의 거래가 가능했다. 조선-일본을 이어주던 쓰시마 섬 영주는 일본의 커지는 요구에 문서를 날조하여 조선에 전달했고 조선은 일본의 목적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 전쟁에서 삼국이 악역으로 삼은 인물은 누구일까? 명의 심유경이다. 그는 자싱 출신으로 일본과 왕래하면서 일어를 할 줄 알았다. 일본이 조선을 침공하자 병부상서의 요청으로 일본과 교섭하게 되었다. 그는 적의 요구를 적당히 들어주면서 평화를 이끌어내려고 했다. 문제는 중국과 조선 사이 오가는 문서를 위조했다는 사실이다. 심유경의 죄는 결국 만력제에게 드러나 전쟁 후 참형에 처해진다. 심유경은 동아시아의 조공 체제를 잘 알았고 체제 담론 아래서 어느 정도의 변통 내지 조작의 공간이 있을 수 있음을 잘 아는 인물이었다. 그는 중국과 일본 간에 요구사항을 잘 알았기에 적당히 얼버무리고 넘기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실제로 중국과 일본은 그의 설득으로 전투를 멈추고 공격을 중단했다.
 
미국 역사학자 피터 퍼듀는 종번 담론이 일종의 '과문화 언어(Intercultural language)'로, 상당히 큰 융통성을 가지고 서로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었다고 지적한다. - P71
 
 
만주 지역은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변방으로 치부되기 쉽다. 그러나 중국의 내륙아시아 특히 동북 지역은 농경 지대도, 유목 지대도 아닌 중간 지대로 누르하치가 굴기한 것은 명, 몽골, 조선 등 모두의 역사에 걸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임진왜란은 조선에도 영향을 미쳤으나 명이 조선에 참전하면서 만주 지역이 다각도로 변화하는 데도 영향을 미쳤다. 명조가 조선에 파견한 부대가 만주 동북의 여진, 몽골 등의 부족을 견제하기 위한 요동 부대였기 때문이다. 이들이 파견되면서 역설적으로 동북 변경은 틈이 생겼다. 게다가 명 내부에 반란이 일어나면서 명 조정은 이것에도 대응해야 했기에 누르하치가 주변 부족들을 위협하여 통합하는 동안에도 충분한 군대를 투입하지 못하게 되었다. 누르하치가 사망할 즈음 정권은 이미 여러 부족이 결합한 다원적 국가였다. 홍타이지는 이후 조선을 두 차례 공격하여 명까지 전쟁에 참여하게 만든다. 게다가 차하르를 포함한 내몽골 전체를 복속시킨다.
 
여기에서 동아시아의 민족은 어떻게 구분해야 할까? '이족'과 정통이란 구분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동아시아 각국의 민족주의는 확실히 19세기 이후의 의식으로, 전 지구적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이중 압박을 받은 뒤에 피동적으로 발생한 '상상'의 산물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결코 공중누각은 아니며 역사가 형성한 신분 정체성 인식의 기초 위에 접목된 것이다. 이 신분은 '민족'이 아니지만 후대인에 의해 매우 쉽게 '민족'으로 개편되었다. 민족과 민족주의 양자는 모두 인위적이며 비자연적인 산물이다. 민족주의 이전의 엘리트 계층은 결코 현대 민족주의자처럼 하층 민중을 포함한 전체 '국민'을 동원하여 '한 쟁반의 흩어진 모래'를 하나의 통일적인 '국國/족族'으로 만드는 데 힘을 쏟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 인식을 자기 계층의 문화와 정치 신분에 더 많이 호소했다. 중원, 조선, 베트남, 일본에서 이 엘리트 계층은 유가儒家 사인士人 집단을 주요 대표로 삼았다. - P99
 
청조 통치자는 중원 지역에서 "화와 이를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일부 한의 유학자들의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청 조정은 명조의 정치와 이념 이데올로기를 계승하기는 했으나 다양한 집단들을 포함한 국가였기에 이를 아우르는 논리가 필요했다. 동아시아 세계에 명조 시기 형성된 '중화'라는 인식의 개념이 청의 등장으로 변화가 생긴 것이다.
 
 
기존의 '중화'는 성리학 학풍을 따르는 것을 전체적으로 지칭하는 흐름인데 명의 유학자들은 자신들을 '중화', 조선의 유학자들은 '소중화' 로 이를 지칭하였다. 청은 명의 제도를 계승하여 예부를 통해 대외 교류를 이어갔다. 이는 종번(조공-책봉) 체제를 기반으로 조선과 일본 등의 국가와 관계를 맺으면서도 다른 제도를 통해 내륙아시아 변강 지역(몽골, 칭하이, 티베트, 신장 및 서남 지구)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그 책임기구는 설립 초에 '몽고아문'(1636)으로 바뀌었다. 순치 연간 이번원은 예부에서 벗어나 외번 사무를 전담하는 독립 부문이 되었다. 이번원으로 내륙아시아에 대한 통치를 실시한 것은 청이 명과 다른 매우 큰 특징이며, 오늘날 중국이 '중국'으로 될 수 있도록 한 중요한 걸음이었다. - P113
 
홍타이지는 폭력과 강압만이 아니라 정치 체계와 종교 신앙 측면에서 자신과 몽골을 한데 섞어 하나로 만드는 데 주력하였다. 군사 무역 이민 등의 방식으로 영토와 인구를 탄탄히 하고, 지역을 나누어 집정관을 파견하여 관리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17세기가 되면 동아시아의 '중화' 체계는 모호해지고 청을 중심으로 한 '천하' 질서로 바뀌게 된다. 중국은 여러 부족이 통합된 단일국가가 되었고 러시아와의 변계가 확정된다. 종번 원칙을 통해 조선 및 베트남 등과도 경계가 획정된다.
 
 
대항해 시대 로마교황청과 스페인 포르투갈은 동맹을 맺고 유럽 바깥의 세계에서 공동으로 식민지를 개척하게 된다. 1494년과 1529년 토르데이야스 조약과 사라고사 조약을 체결하여 지구를 동서로 분할하여 스페인은 아메리카와 태평양 서부를 맡고, 포르투갈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대부분을 포함하여 브라질 동부에서부터 인도네시아 군도에 이르는 지역을 갖게 된다. 이 때 예수회는 로마교황청과 포르투갈의 후원을 받아 아시아로 진출하게 된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에 선교를 위해 갔으나 선교만이 아니라 유럽 문명을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는 중국 뿐 아니라 조선과 일본에도 전해진다. 마테오 리치는 세계지도를 통해 아시아라는 용어를 출현시키기도 했다. 물론 이 때의 아시아라는 용어는 새로운 공간 인식의 틀을 의미하는 것이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높았고 일방적인 전달 방식이 아니어서 청 강희제에 의해 '마테오 리치 규칙'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았다.
 
마테오 리치 규칙은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이질적인 두 문화가 만났을 때 좋은 측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이며, 상호 적응을 시도하는 노력이다. 이는 중국 역사에서는 그리 신선하지 않지만, 줄곧 이슬람의 부상을 위협으로 보고 또 바야흐로 신교의 충격을 받은 천주교 유럽의 입장에서 보자면 대담한 조치였다. 바로 이러한 태도에 이끌리는 가운데 천주교의 몇몇 기본 개념은 한어 맥락에 뿌리를 심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몇몇 한어 어휘도 기독교화했다. - P173
 
예수회는 16세기 일본 엘리트가 외부 세계에 품은 관심과 호기심에 영합하는 전략과, 발리냐노의 현지화 전략을 통해 천주교가 초창기 동아시아에 안착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하지만 예수회의 성공은 스페인과 그 지지 교단을 시샘하게 만들었고 유럽과 천주교 내부의 정치적 경쟁으로 일본은 격랑 속에 휘말린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정권을 공고히 해야 했기에 정치적인 견해가 다른 사람을 배제하기 시작했고, 대외무역에 대한 관리도 강화했다. 이 과정에서 천주교 다이묘는 배제되어 '겐나 대순교' 등이 발생하였다. 얼마 전 엔도 슈사쿠의 작품 《침묵》이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 책이라는 것과, 책을 배경으로 한 영화 〈사일런스〉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 책에서 숨은 기리시탄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어서 놀랐다. 중국과 조선의 천주교도들에 대한 박해도 거셌으나, 일본의 기리시탄에 대한 박해는 아주 처참했다고 한다. 잔혹한 박해와 형벌로 일부 기리시탄은 겉으로 종교를 포기하고, 자신의 종교를 위장하고 숨어들었다. 그 세월을 2세기 동안 지켜냈다는 게 놀랍다.
 
17세기 후기에 이르면 예수회는 천주교 내부에서 배척당했고 포르투갈의 세력도 약화된다. 1773년 로마 교황청은 예수회를 불법으로 지정하였다.
 
16~18세기 유라시아 교류는 보통 유럽인이 출발점인 경우이다. 하지만 17세기 초 일본이 파견한 하세쿠라 쓰네나가 사절단은 태평양을 건너서, 강희 연간 번수의는 서쪽으로 인도양을 가로 질러 유럽에 이르렀다.
하세쿠라 쓰네나가와 번수의가 살던 시대는 천주교의 운명이 역전되던 때로 외부 세계에 대한 배척이 강해지던 때였다. 이 때문에 금교를 계기로 초래된 교류는 19세기 이래 '쇄국'이라는 단어로 통칭한다. '쇄국'이라는 단어는 어디에서 왔는가?
 
미국이 견고한 함선과 고성능 대포를 가지고 일본을 강제로 개방시킨 뒤, 종래 어떤 정령 속에서도 출현한 적이 없던 쇄국'이라는 단어는 에도시대 일본의 '자아봉쇄'에 대한 고정 인식이 되었고, 이후로 전근대 동아시아 세계 전체에 대한 '상식적' 묘사로 더 확대되었다. - P216
 
동아시아의 역사를 곧 '쇄국'과 '개국'이라는 기본 논리로 삼아 파악하는 것은 구미가 주도하는 '현대' 서술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었다. - P217
 
 
아메리카의 은이 화폐를 대신하고 노예가 상품 가치를 띄기 시작한 이후 차와 담배가 동아시아 삼국 사회에 깊숙이 파고든다. 대항해 시기 이후 중국의 바다는 28년의 해금 정책 시기를 제외하고는 계속 열려 있었다. 당시 동아시아 해역은 이민이 빈번하여 이민 사회가 형성되어 있었으며, 일본인 이민도 동남아시아까지 두루 퍼져 있었다. 조공 무역을 제외하면 해상무역이 빈번했고 이 때문에 해상을 장악한 세력은 부를 쌓을 수 있는 명백한 기회가 되었다.
 
역사상 중국의 바다 봉쇄와 개방은 국가와 해상 집단 간의 역량 각축이 서로 길항하며 소장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 배후에 존재하는 논리는 해양무역에 대한 거부라고 하기보다는 해양무역의 통제권에 대한 쟁탈이라고 해야 한다. 국가와 상인은 절대로 항상 대립적이지 않았다. 해상 집단은 전형적인 초국적 세력으로, 무릇 세력이 커진 자는 주변의 국가 및 비국가 정권과 미묘하고 복잡한 관계를 가졌다. 해금 시대의 동아시아 해역은 조금도 쓸쓸하거나 적막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번화하고 시끌벅적한 역사 극장이었다. - P241
 
1793년 영국 사절 매카트니는 중국 황제의 조정을 방문했다. 그러나 건륭황제는 그를 내쫓았는데 이유가 있었다.
 
닝보, 저우산 등 지역을 항구로 개방한다. 베이징에 영사관을 상설한다. 저우산 부근의 섬 하나를 획정하여 영국 상인의 거주지와 창고로 제공한다. 영국 상인이 광저우에 상주하는 것을 허가한다. 영국 배가 광저우와 마카오 수로에 출입할 수 있도록 하며, 아울러 과세를 감면한다. 영국 선교사의 선교를 허가한다. - P264
 
요구 조건이 누가 봐도 과하다. 통상적 권리가 아닌 영국 자국에 특수한 권리를 요구하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매카트니가 삼궤구고의 예를 행하기 거부한 것과 건륭제가 영국왕에게 준 회신의 오만한 태도가 강조되며 선입견을 만들어 냈다. 이는 야만적인 '동양'이 침략당해도 싸다는 근거가 된다. 하지만 사실 건륭제의 회신은 1896년이 되어서야 전체가 영문으로 번역되었고, 그 서신과 거기에 담긴 말은 19세기 전반에 걸쳐 어떠한 주목도 끌지 않았다. "천조에는 없는 것이 없으며 ... 지금껏 정교한 제품을 중시하지 않았으니, 당신 국가의 제품은 조금도 필요치 않다." 해당 말의 문맥은 매카트니가 가져온 예물을 이야기한 것이지, 중영 간의 무역에 대한 언급이 아니었다.
 
 
17세기 조선의 강항과 중국의 주순수는 유학자로 일본 근대사상에 영향을 끼쳤다. 강항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하였으나 일본군이 전라도 해상에 쳐들어오자 그만 포로로 붙잡혀 일본으로 가게 된다. 일본에서 그는 후지와라 세이카와 교류하게 되었는데 그는 조선통신사를 통해 유학을 접한 이후 유학 연구에 매진하던 학자였다. 강항은 후지와라의 도움으로 조선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주자학은 후지와라 세이카 이후 하야시 라잔을 비롯하여 도쿠가와 시대 일본 사상의 주류 흐름으로 발전한다. 주순수는 정성공이 강남 지방을 공격할 때 전투에 참가했다가 실패하자 일본 나가사키로 가 학문을 전수한다. 이 때 주순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자인 도쿠가와 미쓰쿠니를 가르쳤고 에도로 가게 된 그는 이후 일본 지식인과 많은 서신을 주고받으며 유명해졌다.
 
중국은 강남풍 문인화가 유행하고 일본에서는 우키요에 문화가 유행한다. 강남 풍격은 조정의 주류와 분리되어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호방한 기상을 담으며 개성이 뚜렷한 화풍을 열었다. 일본에서는 다이묘가 에도에 출사하러 가면서 에도의 무사 중심 인구가 급격히 늘고, 남녀 비율이 불균형해지면서 연예업, 서비스업, 색정업 발달이 촉진되었고 이로 인해 17세기 후기 우키요에 문화가 출현하였다.
 
청학은 경세치용 실사구시를 추구하면서 전통 유학의 관변 흐름 속에서 새로운 길을 열었으나 유학의 리와 이의 추구는 유학이 주도하는 흐름 속에 흘러갔다. 반면 일본 근대 사상은 청학과 달리 유학을 수용 발전시키기도 하였으나 난학처럼 유럽을 귀감으로 삼아 본토의 지식을 수정하고 국학과 같이 일본 내부의 특성을 담은 학문도 전개되는 등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되었다.
 
실학은 유학 체계 안에서 정주이학에 대한 비판 및 반성과 부합했으며, 또한 16세기에 전해진 유헙 과학기술의 도움을 받았다. 실학에서 '경세'는 학문의 실천을 검증의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동시에, 이성을 숭상하고 과학 등의 실용적 지식을 중시하면서, 그것들을 유가 도덕 및 정치와 대립시키지 않았는데 이는 조선에 특히 영향을 주었다.
 
 
18세기 백은 공급이 하락한 뒤 동인도회사는 중국의 차와 바꿀 다른 상품으로 인도에서 생산된 아편에 주목한다. 동인도회사는 대중국 아편 무역을 회사가 인증한 항각상인이라는 산상에게 넘겨주었다. 많은 항각상인들이 광저우 관부와 결탁하여 아편을 밀수해 들여와 폭리를 취했다. 이로 인해 중국은 아편이 10배 느는 동안 백은이 대량으로 유출되고 사회 풍조가 부패하고 해이해지면서 결국 영국과 전쟁까지 벌이게 된다.
 
일본은 페리 개항 이후 문명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이야기한다. 요시다 쇼인은 미국인에게 접근하기 위해 밀항을 준비하며 미국 군관에게 한문으로 쓴 편지를 찔러주기도 한다. 이 편지가 영문으로 번역되면서 미국이 일본을 이해하는 하나의 창구가 된다.
 
흑선의 도래는 미국이 동아시아를 정식으로 척식하는 한 과정이었으며, 일본이 '식민 현대'의 세례를 받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미국에게 이후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일본은 마치 요시다 쇼인이 페리를 추종했던 것처럼 동아시아의 겸손한 동료였다. 비록 두 나라는 20세기 사생결단의 전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미국의 점령과 개조를 거쳐 일본은 다시 좋은 학생의 모습으로, '문명'으로 되돌아갔다. - P335
 
중국은 아편전쟁의 결과로 개항을 하게 되고, 조선은 강화도 조약 이후 조미수호통상조약으로 개항을 하게 된다. 다만 두 나라는 당시의 국제법에 대한 원칙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한 채 여러 나라를 상대로 조약을 맺게 된다. 국제법은 모두 식민제국 체제 하에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동아시아 '천하' 구조는 외부 압박과 내부 변란이 이중으로 작용하는 가운데 해체되어 하나의 '구역'이 되었다. 그러나 구질서가 해체된 뒤 도래한 것은 하나의 민족국가 체제가 아니라 일본이 중심이 된 제국주의 질서였다. 신질서는 국제법의 언어를 차용했지만 오히려 '중화-천하' 질서의 많은 면모를 계승했다. - P345
 
동아시아는 '식민 현대'의 한 대상이었지만, 그것은 단지 구미 제국의 눈에 '비문명' 세계의 한 구성 부분, 그 정도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아'를 가져다가 추상적인 서양과 상대되게 한 것은 식민 체계 아래서 동아시아인의 인식 착오다. - P353
 
 
인류를 과학적 방법에 의거해 '인종'으로 구분한 것은 18세기 스웨덴 자연학자 카롤루스 린나이우스로부터 시작되었다. 인류학은 갖가지 측량술의 발달로 종족 이론의 생물학적 근거를 강화했다. 19세기 찰스 다윈의 자연진화론은 인류 사회의 차이를 해석하는 데 쓰였다. 종과 족은 문명진화론과 긴밀히 연계되었고 식민 압박을 합리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1904년 세인트루이스 세계박람회가 열릴 때 러일전쟁이 한창이었다. 러시아는 대회 참여를 사양했고, 일본은 세계 박람회에서 자기 문명의 높은 수준을 전시하면서 일본인이 러시아를 넘어서 '가장 문명적인 종족'을 자처했다. 일본의 논리는 유럽과 미국이 주장하던 식민 체제의 논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동아시아가 민족주의로 자신을 개조한 것, 그 하나의 주요한 자극은 담론과 실천 두 측면에서 마치 한 쌍의 대립적인 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동전의 양면이다. 피식민자가 일련의 반항적 민족주의를 구축하면서 의지한 논리 역시 식민자가 가져온 그 문명 진화 논리였다. - P366
 
17세기에 기원한 현대 국제법은 식민주의가 세계에 확장되면서 식민 활동을 지지하는 역할을 담당했다고 이야기했다. '보호국'이라는 개념은 1885년 유럽 국가가 아프리카를 분할하면서 세운 논리였다. 일본은 식민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구미 국가의 평가에 특히 신경쓰는 모습을 보인다. 이 때문에 매 단계마다 국제법을 준수하고 문명의 규범에 부합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1912년 메이지 천황 사후 일본은 새 시대를 맞이하면서 명목상으로 구미 식민제국과 자신이 완전히 평등한 국가가 되었음을 인식한다. 이것은 1920년대 다이쇼 데모크라시 이후 '아시아주의'를 표방하며 삼국의 정치에 깊은 영향을 끼친다. 하지만 아시아주의는 새로운 압박으로 기존 압박을 반대했기에 초월성을 가지기 어려웠기에 결론적으로 실패로 귀결될 수 밖에 없었다.
 
1919년 일부 지식인들은 식민주의의 타개도 중요했지만 어떻게 자신을 '현대'로 만들 것인가가 본질적으로 더 중요했다. 이 때문에 '현대'를 가속화하기 위해 자아 비판 나아가 동양 비판으로 나아갔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의 본질을 급격하게 실천한 이들은 중국과 조선에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중국해방전쟁, 한국전쟁, 베트남전쟁이 연이어 일어나며 중소간 분열의 무대가 된다. 중국해방전쟁으로 중국과 미국이 조선에서 직접적으로 교전했고 베트남에서 간접적으로 대항했다. 미소간 게임이 아니라 중미와 중소의 게임이 이어졌는데 이는 19세기 이래 이어진 식민과 반식민, 패권과 반패권 항쟁이 심화된 무대였다. 1949년 이후 중국은 국가 건설에 어려움을 겪었고, 일본과 한국의 경제 도약은 한국전쟁 이후 영향 하에서 이루어졌다.
 
오늘날 냉전 구조는 대체로 종료되었지만 식민 자본주의 체제가 무너졌는가 생각하면 그것은 결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그 흐름은 세계를 주도하고 있기에 우리에게 식민 현대성과 다른 대안적 발전관을 찾도록 요구한다.
 
오늘날 동아시아를 곤혹스럽게 하는 역사 인식의 문제는 근본적인 차원에서 말하자면 어떤 전쟁, 어떤 사람(집단), 어떤 사건에 대한 책임을 확인하는 데 있지 않고 우리의 현대성 개념에 대한 인식에 있다. 19세기 후기부터 동아시아는 점차 민족국가를 단위로 하고, 정해진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일종의 발전주의 시대관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역사는 부단히 '진보'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다, 인류는 '야만'에서 '문명'으로 나아간다, 미래는 과거보다 더 '선진'적일 것다, 우리가 매 맞는 이유는 '낙후'하기 때문이며 낙후한 원인은 '폐쇄 보수'에 있다. 이러한 일련의 논리는 우리에게 영원히 '문명의 승리자'의 시각에 서서 '몽매한 야만인'을 부정하도록 요구한다. 그런데 누가 문명과 승리를 대표하며, 누가 몽매와 실패를 대표하는가? - P458
 
인류의 현대는 어느 하나의 국부적인 기원에서 다시 전 지구적으로 확대된 것이 아니며, 서로 다른 사회 간에 긴밀히 교류하고 만나는 과정 속에서 함께 형성해낸 것이다. 동아시아, 남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의 상호작용이 없었다면, 유럽의 현대화도 우리가 아는 방식으로 나타날 수 없었다. 그러므로 '현대'는 동아시아에 내재된 것이다. 외부 세계가 가져온 충격을 직시하되, 이러한 충격을 유일한 역사 추진력으로 간주하지 말고 외부 충격에 조우하고 반응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현지의 역사적 동력으로 내화하는지의 과정을 탐구해야 한다. - P462
 
이 책을 통해서 동아시아가 현대로 들어서는 과정의 역사를 들여다 보았다. 한중일 지역을 둘러싼 지역의 역사를 한 곳에 모아놓아서 한 권의 책으로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다만 저자의 기호가 균형 있다고 생각되어지지는 않는다. 아무래도 조선에 관한 분량은 적은 편이고 중국에 우호적인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재밌게 읽었다. 한중일 근대사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있는 상태에서 이 책을 읽는다면 더 재미나게 읽을 수 있을 책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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