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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대한계년사 8

category 리뷰/책 2022. 3. 9. 18:03
1906년부터 1907년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대표 사건들을 정리해보자.
 
1906년 2월 17일 밤11시 군부 대신 이근택 집에 자객 세 사람이 뛰어들어와 한 사람이 이근택을 칼로 찌르자 이근택이 촛불을 껐다. 이에 자객들은 이근택을 칼로 머리와 왼쪽 어깨 등 및 팔에 여러 곳에 상처를 입혔다. 이때 안방 근처에 있던 우리나라 병사와 순검과 일본 헌병 및 순사들이 초인종 울리는 소리에 달려왔으나 자객들은 이미 도주한 뒤였다. 이근택은 중상을 입고 한성병원 특별실에서 치료를 받았다. 한달 기간 치료하여 죽지 않게 되었다. 이로부터 박제순 이지용 등 다섯 대신의 집에는 우리나라 병사들이 총을 메고 경계하며 지키고 엄중한 경호를 하게 되었다.
 
1906년 6월 4일 최익현이 제자 수십 명과 선비 임병찬과 몇몇, 병사 수백 명을 거느리고 의병을 일으켰다. 6월 13일 궁중에서는 궁내부 특진관 정2품 최익현을 해임하고 법부에 명령하여 그를 붙잡아 가두라고 했다. 결국 최익현 임병찬 등 13명이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올려지고 많은 사람들에게는 흩어져 돌아가게 되었다. 최익현은 처벌로 쓰시마 섬으로 유배가 보내졌다. 쓰시마 섬에 갇히자 우리나라의 양식과 반찬거리를 마련해 가지고 갔다. 먹을거리가 다 떨어졌는데 일본이 주는 음식을 먹을 수가 없어 마침내 단식했다. 최익현의 아들과 조카가 부산으로 돌아와 곡식과 반찬거리를 사가지고 미처 되돌아가기 전 12월 30일 최익현은 숨을 거두었다.
 
"나 최익현은 비록 세상 돌아가는 것은 잘 모르지만, 나라에 충성하고 남을 사랑하며 믿음을 지키고 의리를 밝히는 도리는 익숙히 익혀 왔습니다. 나라와 인민에 닥친 재앙이 그지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눈으로 보고서, 오직 죽을 자리를 얻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긴 지 오래되었습니다. 수십 명의 동지들과 함께 죽을 것을 결의하고, 장차 병든 몸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가 이토 히로부미, 하세가와 요시미치 등과 한번 만나서 하고 싶은 말을 남김없이 다 하고 죽으려고 합니다. 이에 백성 가운데 함께 죽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또 약간 있습니다." - P42
 
이 때 재정이 고갈되어, 정부는 일본 흥업은행에서 1천만 원을 빌렸다. 3월 16일 그에 관한 계약을 맺었다.(이자는 매회 1백 원, 연 이자는 6푼 5리. 국내 해관을 담보로 하여 10년을 상환기간으로 하고 5년 내에는 상황을 하지 않으며, 발행가격은 1백 원당 90원만 받기로 했다.) 단지 관리 및 초빙 고용한 일본인들의 봉급 비용에 쓰기 위해서였다. 1907년 1월 국채가 1백30만원이었는데 정부에서 갚을 대책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1월 29일 대구에 사는 전 주사 최상돈은 국민들이 국채 보상을 담당한자는 말을 앞장서서 부르짖었고 서울과 지방의 벼슬아치, 백성들이 그 주장에 호응했다.
 
전 주서 나인영, 전 주사 이기, 전 의관 윤주찬, 전 주사 오기호 등이 박제순 등을 죽이려 했으나, 실패했다.
 
나인영은 글을 작성하여 여러 사람들을 격려했다. "여러분! 오늘의 일은 실로 대한의 독립을 유지하는 데 첫째 가는 요체입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 2천만 민중들의 생사가 달린 문제입니다. 있는 힘을 다하고 죽음을 각오하는 뜻으로, 이 다섯 역적들을 처단하여 나라 안의 화근을 제거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된다면 우리들 및 우리 자손들은 독립된 세상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줄줄 흐르는 눈물에 잠기고 뚝뚝 떨어지는 피를 걸러내어 마음을 바쳐 복수를 맹세하고, 엉금엉금 기어와 몸을 숙여 엎드리어, 이처럼 의로운 임무를 혈기와 의협심 그리고 슬기와 용기를 지니고 있는 우리 여러분의 가슴 앞에 내어놓습니다. 여러분! 각자 순결한 애국심을 힘껏 발휘해, 나라를 팔아먹은 흉악하고 완고한한 역적들을 서둘러 처단함으로써, 우리나라로 하여금 세계 위에 독립된 나라로 우뚝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 P69
 
광무 2년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 1차 회의가 열려 세계의 전쟁을 없애버리자는 큰 뜻으로 국제분쟁의 평화 처리조약(80조항)을 맺었다. 1907년은 제2차 회의를 여는 때였다. 황제는 5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것을 분하게 여겨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전 평리원 검사 이준을 밀사로 파견했다. 이상설에게 비밀 지령을 주어 헤이그에 가서 일본인이 강제로 맺은 조약을 맺은 것과 일본에 달라붙은 박제순 등이 정부 대신이 되어 우리나라를 억누르고 인민에게 잔인하고 포악하게 군 사실에 대해 만국평화회의에 호소하도록 시켰다. 이상설은 4월 20일 시베리아 철도로 러시아 수도에 이르러, 전 러시아 주재공사관 서기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로 갔다. 러시아 수도에 있던 네덜란드 신문사 통신원이 그 사실을 알고 6월 28일 이 내용을 본사에 전보로 알렸다. 그 신문사에서는 곧바로 한국의 밀사가 헤이그에 온다고 신문에 실었다. 7월 1일 헤이그로부터 미국의 신문사에 전보를 보냈다. 헤이그에 주재하던 일본 공사가 이 소식을 듣고 갖은 방법으로 힘써서 이상설 일행이 평화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준은 이위종에게 평화회의 간부를 방문하여 회의 참석에 대해 말하도록 했으나 간부는 그들의 회의 참석을 허락하지 않았다. 비록 발언권은 허락이 안되었으나 방청은 허락되어 회의장소로 갔다. 그곳에서 이준은 자결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궁중에서 밀사 파견을 이유로 이완용을 크게 꾸짖었다. 이완용은 7월 16일 회의에서 황제를 만나 이번 헤이그 평화회의에 위원을 보내 곤란을 당한 것을 벗기 위한 방책에 대해 말했다. 하나는 광무 9년 11월 17일의 새 조약에 옥새를 찍는 일, 둘은 황제 폐하의 섭정(대리인)을 추천하는 일, 셋은 황제 폐하께서 일본 황제에 직접 사과하러 가는 일이었다.
 
이완용 등은 황제에게 황태자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일에 대해 아뢰었다. 압박하는 분위기 속에서 황제는 오전 3시에 황태자 대리 명령 조서를 내렸다. 이완용 등은 그제서야 물러갔다. 황제는 수라를 들지 못한지 며칠이 되었고 이날 밤 밤새 잠을 자지 못했다. 대궐 안의 신하들과 대궐 사람들도 모두 잠을 자지 못했다. 이날 밤 11시 온 도성의 인민이 종로에 모여 결사회를 만들고 일곱 대신이 한 날치기 짓에 대한 상소를 적었다. 오전 4시 점포 상인들이 모여 황제가 대리 조서를 비로소 내렸다.
 
이완용이 이토 히로부미의 지시로 각 대신들과 함께 송병준 사저에 모여 남몰래 의논했다. 1907년 7월 24일 이완용이 이병무와 함께 황제를 만난 후 대궐에서 물러 나와 내각 회의를 열었다. 이완용과 송병준이 황제를 만나고, 대궐에서 물러 나와 통감 관저로 갔다. 임선준 고영희 조중응 이병무가 통감 관저로 가 이완용과 송병준을 기다렸다. 이토 히로부미 및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 외무성 대신 하야시 다다시와 함께 7조항의 협약에 조인했다.
 
"하나, 한국 정부는 시정의 개선에 관해서 통감의 지도를 받도록 할 일.
둘, 한국 정부의 법령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거칠 일.
셋, 한국의 사법 사무는 보통의 행정사무와 구별할 일.
넷, 한국 관리를 임명하고 해임하는 일은 통감의 동의로써 이를 행할 일.
다섯, 한국 정부는 통감이 추천한 일본인을 한국 관리에 임명할 일.
여섯, 한국 정부는 통감의 동의 없이 외국인을 초빙하여 고용하지 않을 일.
일곱, 메이지 37년 8월 23일에 조인한 한일협약 제1항은 폐지할 일."
한일협약 제1항의 내용은 "대한 정부는 대일본 정부가 추천한 일본인 1명을 재정고문으로 대한 정부에 초빙해 고용하되, 재정에 관한 사항은 일체 그의 의견을 묻고 시행할 일." 이었다. 조약의 끝에 기록했다.
광무 11년 7월 24일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 인
통감 후작 이토 히로부미 인
 
1907년 7월 31일 오전 군부 대신 이병무와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이토 히로부미 통감 관저에 모여 우리나라 군대를 해산하기로 논의해 결정했다. 오후 9시 40분 총리대신 이완용, 법부 대신 조중응이 황제에게 아뢴 뒤에 조서를 내렸는데, 아직은 반포하지 말도록 했다. 8월 1일 7시,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우리나라 각 대대의 영관 위관 장교 및 전직 대장들을 불러모았다. 각 부대 장관은 자기 부대로 돌아가 군사들에게 맨 손으로 훈련원으로 가서 훈련을 하도록 꾀어 서로 통솔하여 갔는데, 일본군이 좌우로 호의하며 갔으니 훈련원에서 해산식 거행을 위한 것이었다. 8시에 일본 장교는 각 부대가 텅빈 틈을 타 전동의 시위 3대대 부대와 정동의 숙위소로 가서 점거하고 9시에 흥화문 앞 징상대 부대를 빼앗고 무기를 모두 거두어들였다.
 
 
을사오적에 대한 분노로 인한 줄곧은 상소와 암살 시도. 헤이그 만국회의에 밀사 파견과 그 후폭풍. 한일신협약과 군대 해산. 고종의 강제 퇴위로 인한 사회적 혼란이 등장한다.
어느 것 하나 분노하지 않을 것이 없지만 을사오적과 한일신협약을 강제로 맺은 정미칠적의 안하무인은 기가 찰 노릇이었다.
국민을 가벼이 여기고 이토 히로부미라는 권력에 빌붙어 오만하기 짝이 없는 행동을 일삼는 무리들에 가슴 속으로는 여러 번 단칼을 날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당시 백성들과 일부 관리도 수없이 그들의 집과 가옥을 불태우고 암살을 시도하기도 하는 등 수많은 행동이 있었다.
결코 가만히 그들 손에 놀아나려하지 않았다. 그들도 백성들의 눈치를 살폈고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했다고 한다.
왜 아니 그럴까. 가다가 돌 맞아 죽을까봐 두려워한 적도 많았을 것 같다.
실제로 그들은 강제 협약을 맺고 나서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군의 비호 아래 자택과 가족을 단단히 보호했다.
수많은 의병들이 강제 조약과 군대 해산, 고종의 강제 퇴위로 들불처럼 들고 일어났다.
고종은 그들을 보호하지 못했고 순종도 마찬가지였다.
을사늑약 이후에는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와 일부 대신들이 비밀리에 국정을 협의한 내용들을 고종에 통보하여 재가를 받는 식으로 이루어지다보니 그들의 입맛대로 정리될 수 밖에 없었다.
통탄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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