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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유럽 최후의 대국, 우크라이나의 역사

category 리뷰/책 2022. 3. 7. 13:01
우크라이나에 대해서 나는 얼마나 알고 있던가? 책을 읽기 전 가장 먼저 든 생각이다.
무지하거나 그렇지 않다고 해도 강대국의 입장에서 바라본 역사로 인식했을 소지가 다분할 것이다.
이 책을 보면서 이것이 피할 수 없는 사실이란 생각이 들어 부끄러움을 많이 느꼈다.
 
2022년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일어나기 전 글로벌 이슈로 미-러시아 간, 러시아-NATO 간 첨예한 대립을 보면서 설마 전쟁이 벌어지기야 하겠어~? 하는 안일한 생각을 했다.
설마가 현실이 될 줄이야. 전쟁을 피해 우크라이나를 떠난 피난민들이 100만에 이른다고 한다.
미-러시아 간 협상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긴 하지만 서로의 입장 차이만 확인한 채 진전된 결과가 나오지 않고 있다.
이 와중에 민간인에 대한 폭격과 학살이 벌어지고 있고 러시아가 자포리아 원전을 장악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더 이상의 피해가 있어서는 안될 터인데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이 책은 우크라이나 영토를 둘러싼 역사를 담아내고 있다.
따라서 우크라이나 민족의 역사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우크라이나 민족은 아니지만 우크라이나 영토에 존재했던 다양한 민족들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이것이 장점이나 단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같은 지역이라도 우크라이나어와 러시아어 발음이 엄연히 구분되어 존재한다는 것을 명확히 인식할 수 있었다.
짐작했던 것처럼 내 경우도 키예프나 드네프르강이 익숙하지 키이우, 드니프로강은 익숙하지 않게 느꼈다. 그만큼 많은 단어들이 러시아어로 관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B.C 1500~ B.C 700년경 흑해 북쪽 해안의 땅인 지금의 우크라이나 땅에는 키메리아인이 거주했다.
그들은 유목생활을 했고 능란한 승마술로 유명했으며 철기시대를 이룩한 민족이었다.
B.C 750 ~ B.C 700년경이 되면 스키타이인들이 흑해 북쪽 해안으로 들어와 키메리아인을 쫒아내고 그 땅의 주인이 된다.
스키타이 민족의 특징을 잘 묘사한 인물은 헤로도토스다. 그의 저서인 『역사』에서 스키타이의 기원을 설명하고 있다.
헤로도토스는 세 가지 설을 제시하는데 그 중 스키타이인이 아시아 최초의 유목민이었으며, 아랄해 주변에 살던 마사게타이인에게 쫓겨나 키메리아인이 살던 현재의 땅으로 이주했다는 설을 가장 신뢰했다.
B.C 4세기 이란계 민족인 사르마타이인이 중앙아시아에서 스키타이의 동쪽 땅으로 이동해온 뒤 B.C 2세기 스키타이인들을 그 땅에서 몰아낸다.
사르마타이인은 A.D 3세기까지 번성했고 스키타이인과 신앙 및 풍속에서 공통점을 가졌다.
A.D 3세기 중반 ~ A.D 4세기 말 게르만계 고트족, A.D 4세기 후반 ~ A.D 6세기 중엽 훈족, A.D 6세기 중엽 아바르족, A.D 6세기 말 ~ A.D 7세기 중엽 불가르족 등의 민족이 잇달아 흑해 북쪽 해안의 땅을 차지했다.
6세기 중반 동로마의 유스티아누스 대제 시대에 케르소네소스(현재의 세바스토폴 근교)를 중심으로 비잔티움 문화가 번성하면서 주목을 받게 됐다.
 
다음으로 키예프 공국에 대한 이야기다. 키예프 공국은 전성기 유럽 최대의 판도를 과시했을 만큼 대국이었다.
키예프 공국의 군주는 '크냐지'라고 불렸는데 이는 영어의 king 에 해당되는 단어였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크냐지가 다스리는 국가로 한 단계 낮춰 공국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당시에는 '키예프 루스'가 아닌 '루스'로만 불렸지만 러시아가 루스에서 파생되어 국명과 혼동을 피하기 위해 '키예프를 수도로 삼는 루스'라는 뜻의 키예프 루스가 관례가 되었다.
이전까지 키예프 루스 공국의 역사는 러시아사 하에서 다루어졌다. 러시아의 논리는 키예프 공국이 멸망한 후, 우크라이나 땅은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영토로 분할이 되었고 나라 자체가 소멸했으므로 계승자가 없지만 모스크바 공국은 단절되지 않고 러시아 제국으로 이어졌기에 러시아가 키예프 루스 공국의 계승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15세기의 모스크바는 키예프 루스 공국 지배하의 비슬라브 부족의 연합체일 뿐이고 중앙집권제인 러시아 소련 체제와 키예프 루스 공국 체제는 전혀 달라서 별개의 국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키예프 루스 공국의 정치 사회 문화는 할리치나 볼린 공국으로 계승되었기 때문에 키예프 루스 공국의 계승자라고 주장한다.
슬라브인은 6세기 현재의 우크라이나 서부와 폴란드 동부에서 시작하여 7세기 초부터 사방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그들 중 동슬라브인이 키예프 루스를 구성한 사람들이며 현재의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의 선조라고 볼 수 있다.
8~11세기 스칸디나비아에서 인구 폭발이 일어나며 바이킹들이 바다를 건너 확산되기 시작했다.
동슬라브인은 바이킹을 '바랴그인'이라고 불렀다. 바랴그인은 계속 이동하여 드네프르강을 따라 흑해로 나와 콘스탄티노플에 이르는 바닷길을 확립했다.
동슬라브인 사회의 문헌상 최초 기록은 12세기 초 편찬된 『원초 연대기』의 키예프 도시의 기원에 대한 전설이다.
동슬라브인은 바랴그인에게 공물을 바치다 바랴그인을 내쫓고 자치를 시작했지만 내분이 일어나자 과거에 쫓아낸 루스(그 땅의 바랴그인이 자칭하는 말)에게 사신을 보내 땅을 통치해달라 요청했다. 이를 받아들인 루스 때문에 '루스'라는 나라 이름이 탄생했다.
키예프 루스 공국은 키예프 공이 아들들을 각지에 보내고 형제 상속, 부자 상속이 동시에 이루어져 대가 바뀔 때마다 싸움이 일어나는 문제점이 있었다. 이런 힘겨움을 뚫고 볼로디미르 성공과 야로슬라프 현공 시대에는 황금기였다.
1125년 볼로디미르 모노마흐 사후 1240년에 몽골이 키예프에 들어오기까지 1세기 동안 키예프 루스 공국의 힘은 서서히 약화된다.
할리치나-볼린 공국은 키예프 루스 공국의 서남부의 할리치나 공국과 볼린 공국이 병합하여 형성된 공국으로 우크라이나인들은 이를 '최초의 우크라이나 국가'로 평가한다.
1340년대에 볼린은 리투아니아에, 할리치나는 폴란드에 각각 병합된다.
 
14세기 중반 할리치나-볼린 공국의 멸망 후 17세기 중반이 될 때까지 약 300년 동안 우크라이나를 대표하는 정치 세력이 없었다. 대신 리투아니아와 폴란드가 각각 우크라이나를 지배했다.
이 시기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민족으로 분화되었고, 언어도 러시아어, 우크라이나어, 벨라루스어가 형성되었다.
리투아니아는 우크라이나의 볼린, 체르니히우, 키이우, 드니프르 등의 넓은 영역을 지배 하에 두었다. 1362년에는 강력함을 자랑하던 킵차크한국과 싸워 승리하기도 했다. 이후 과거의 키예프 루스 공국이 가진 절반 이상의 땅을 지배하게 된다.
폴란드는 13세기 신성 로마 제국에 패배하고 남쪽의 보헤미아, 모라비아에도 위협을 받고 있었기에 유일한 출구는 동방이었다. 14세기 중엽이 되면 할리치나 지방은 폴란드 지배 하에 놓인다.
리투아니아 전성기가 지나고 점차 폴란드 힘이 강성해지자 1569년 루블린 연합이 성립되면서 리투아니아가 폴란드의 수중에 들어간다.
폴란드는 기존 키예프 루스 공화국이 기독교였던 것과 달리 가톨릭 신자들이 많았고 문화적으로도 서로 달라 이질감이 컸다. 이 시기가 되면 귀족의 힘이 강해지고 왕권은 약해졌으며 농민이 농노화가 된다.
고대부터 우크라이나 땅에는 유대인이 많이 살았다. 게다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서 유대인을 우대하는 정책을 펼쳤기에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살기 좋은 환경이 형성되면서 유대인 인구가 급증했다.
그리고 이 시기 정교가 분열되고 키예프 루스의 정교와 달리 '우니아트'라는 그리스 정교와 가톨릭 절충안이 등장했다. 우니아트는 율리우스력을 사용하고 성직자 결혼도 인정했지만 로마 대주교에게 복종하는 모습을 보였다.
'우크라이나'라는 단어는 어디에서 왔을까. 러시아사를 바탕으로 한 학설 기준으로 우크라이나의 의미는 '변경지대'(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서 봤을 때 변경)이다. 현재 우크라이나에서는 '땅' 또는 '나라'를 의미한다 라고 주장한다. 우크라이나 어간에 해당하는 'krai'는 '가장자리' '지방' '나라'라는 의미가 있고 '우크라이나'가 문헌에 등장한 것은 12~13세기다. 『키예프 연대기』는 1187년 볼로디미르 공이 죽었을 때 '우크라이나는 그를 위해 슬퍼 탄식했다'고 기술했다. 『할리치나-볼린 연대기』는 1213년 '브레스트, 우프레브스크 등 모든 우크라이나를 재통일했다'고 기록했다. 이런 것을 볼 때 '우크라이나'는 '변경지대'보다는 '땅'이나 '나라'라는 의미의 보통 명사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
 
15세기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남부 스텝 초원지대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자치 무장 집단을 형성했는데 이들이 '코사크'이다.
우크라이나의 슬라브인에게 사용됐던 코사크라는 단어가 문헌상 최초로 등장한 것은 1492년이다. 키예프와 체르카시 사람들이 타타르 배를 약탈하여 크림의 칸이 리투아니아 대공에게 항의하자 대공이 우크라이나 코사크를 조사하겠다고 약속한 내용이 그것이다. 1493년 크림의 칸은 드네프르강 하구에 있는 크림한국의 오차키프 요새를 파괴한 체르카시의 대관과 부하를 '코사크'라고 불렀다.
좀더 큰 자유를 찾아 떠난 이들은 '시치'라 불리는 요새를 짓고 1530년이 되면 드네프르강 하류의 섬에 주요 시치가 만들어졌다. 이 중 자포로제는 우크라이나 코사크의 중심지가 되었다.(러시아 변경의 돈 코사크)
코사크 수가 증가하면서 군사력이 커지자 이들은 원정에 나서 여러 도시들을 습격했다. 코사크는 16세기 말 이후 폴란드 왕에게 복종하여 각지에 싸우며 정치적 지위를 높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왕에게 받는 대우와 영주에 대한 불만으로 종종 반란을 일으켰다. 회의를 통해 선출된 헤트만은 군사 독점권을 소유했지만 그만큼의 책임이 따랐다.(전투에서 패배하면 사형되기도 했음) 사하이다치니는 최초의 헤트만으로 알려져 있으며 우크라이나의 문화와 교육, 정교의 진흥에 힘썼다.
우크라이나사 최고 영웅으로 손꼽히는 보흐단 흐멜니츠키는 조직가이자 군사령관, 외교관으로서 우크라이나 역사에서 최초로 자신들의 국가를 완성했다. 헤트만 국가를 지키는데 자력만으로는 안되므로 외부의 힘을 빌려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폴란드와 대항하여 타타르-오스만튀르크-크림한국-몰다비아-트란실바니아 등 주변국과 동맹을 맺었다. 하지만 대부분 열매를 맺지 못하고 실패했다. 결정적으로 모스크바와 페레야슬라프 조약을 맺으며 평가가 엇갈리게 된다. 그는 10년 간 활약하였으나 우크라이나의 국민 시인인 타라스 셰브첸코는 흐멜니츠키가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에 팔았다고 비난했지만 역사상 헤트만 국가를 형성하여 후세 우크라이나 재건의 상징이 된 인물이라는 이중 평가를 내렸다. 우크라이나 독립 후 그의 초상은 5흐리브냐 지폐에 새겨졌다.
이반 마제파는 흐멜니츠키에 이은 강력한 지도자로 폴란드, 우안 우크라이나, 좌안 우크라이나, 모스크바 등 수장의 마음을 얻는데 성공할 정도로 정치적 생존 기술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헤트만에 올라 20여년간 자리를 유지했다. 마제파라는 인물의 생애 덕분인지 그에게서 수많은 작품이 나왔다. 바이런, 푸시킨, 빅토르 위고가 서정시를 썼고, 차이코프스키가 오페라를 작곡했으며, 프란츠 리스트도 관현악을 위한 교향시를 작곡했다.
최후의 헤트만인 키릴로 로주모프스키는 예카테리나 여제에 의해 퇴임당하고 대신 러시아의 백작이 되었으며 광대한 영지를 받는다. 아들 안드레이 라주모프스키는 러시아의 주오스트리아 대사를 역임하며 폴란드 분할 협상에 관여했고 1815년 나폴레옹 몰락 후 빈 회의에서 러시아 전권으로 활약했다. 그리고 그는 베토벤을 후원하기도 했다. 「라주모프스키 현악 사중주곡」과 「운명」 교향곡, 「전원」 교향곡이 그에게 헌정되었다.
1783년이 되면 코사크 연대가 러시아군으로 편입되면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제국의 한 지방으로 전락한다. 80년간 유지해온 헤트만 국가는 소멸한다.
1772년, 1793년, 1795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폴란드 분할이 이루어지면서 폴란드는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3국으로 완전히 분할된다. 이로써 우크라이나는 정치상 지도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폴란드 분할 후 1차 세계대전까지 약 120년 동안 우크라이나 영토의 약 80퍼센트는 러시아에 의해서, 나머지 20퍼센트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의해서 지배된다.
러시아 제국은 강력한 전제군주제이자 중앙집권제였고 오스트리아는 상대적으로 민족동화정책은 약했기에 내셔널리즘의 거점이 되었다. 크림전쟁(1853~1856)은 동유럽과 지중해에 진출하려던 러시아를 영국과 프랑스가 튀르크를 돕는 형태로 저지하려 하면서 벌어진 대규모 전쟁이었다. 톨스토이가 참전한 전쟁이었으며 나이팅게일이 활약한 전쟁이었다. 최종적으로 러시아가 패배하면서 러시아의 농노제는 폐지된다. 민족 시인 타라스 셰브첸코가 우크라이나어로 코브자르를 쓰면서 내셔널리즘을 고양하고 정당이 성립하는 등의 활동이 일어났지만 1863년 이후 우크라이나 민족에 대한 철저한 탄압이 벌어지면서 이 기세는 수그러든다. 하지만 19세기 말이 되면 우크라이나 민족 운동의 열기가 고조되면서 각종 결사 단체와 정당이 출현하기 시작한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면서 우크라이나 민족 운동은 새 단계에 접어든다.
오스트리아에 있던 우크라이나인들은 대부분 우니아트인이었다. 프랑스 2월 혁명이 발발하면서 민주화와 민족 독립 시위가 증가하면서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가 해임되고 농노제가 폐지되었다.
최초의 우크라이나어 신문이 발행되었으며 우크라이나 독립과 통일을 표방하는 급진당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리비우 대학에는 우크라이나어 강좌가 처음으로 개설되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으로 러시아 제정이 붕괴되고 소련이 탄생했다. 구러시아 제국 하의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핀란드 발트 북유럽 국가들이 독립했고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하의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도 완전한 독립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어떤 국가보다 활발한 독립운동으로 독립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조건을 가졌지만 결과적으로 대부분 소련 또는 폴란드 지배 하에 들어가고 말았다.
1917년 2월 혁명으로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고 국회 중심의 임시 정부와 노동자 병사 중심의 소비에트의 이중 권력 상태가 되었다.
3월에 우크라이나 중앙 라다(회의, 평의회를 뜻하는 우크라이나어)가 결성되어 임시 정부에 자치를 요구했으나 임정은 이를 거부하였다. 10월 혁명이 발발했고 볼셰비키가 무력으로 임정을 제압하고 소비에트 정부를 수립하게 된다. 12월 소비에트 정부는 우크라이나 국민공화국 승인을 통고했으나 우크라이나 정부가 거부하여 볼셰비키가 힘으로 우크라이나 점령을 결정한다. 이 때문에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와 볼셰비키 간 전쟁이 벌어진다.
1918년 10월 오스트리아가 붕괴하면서 독립의 움직임이 활발해진 이후 11월 13일 서우크라이나 국민공화국 수립 선언을 했지만 이는 8개월 간의 단기간의 정부였다. 서우크라이나는 대외적인 지지를 얻지 못한 상태에서 폴란드와의 싸움을 지속했으나 역부족이었고 1919년 7월 동우크라이나로 후퇴하게 된다.
우크라이나 국민공화국과 서우크라이나 국민공화국이 합병하여 1919년 1월 우크라이나 국민공화국이 된다. 그러나 1919년 10월 티푸스 발생으로 우크라이나군의 70%가 괴멸되고 말았다. 프랑스는 볼셰비키 혁명을 저지하고 러시아 부활을 위해 러시아에 무력 간섭을 했으나 1919년 4월 볼셰비키가 들어오면서 소비에트와 폴란드 간 전쟁이 발발하였고 1920년 6월 페틀류라를 폴란드가 포기면서 리가 조약이 체결된다.
 
1차 세계대전 후 파리강화회의가 열렸고 베르사유 조약으로  소련, 폴란드,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분할 통치 결정이 이루어졌다.
1922년 12월에 소비에트 연방이 성립되었으나 공산당은 우크라이나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우크라이나화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1927년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연이은 5개년 계획과 농업 집단화로 농민들을 통제하면서 농민들이 도시로 이주하며 노동력이 부족되면서 대기근이 발생되었다. 1930년대 초 우크라이나 땅에서 스탈린 땅의 대대적 숙청이 감행되면서 30년대 중반이 되면 전체 37%에 달하는 우크라이나 공산당 당원이 숙청되고 30년대 말이 되면 공화국 자치는 완전히 사멸되고 전체화가 이루어진다.
서우크라이나는 폴란드 지배하에 들어갔는데 우크라이나 자치 조직을 결성하고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를 조직하는 등 활발한 활동이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 발생하고 나치 독일은 우크라이나에서 85~90만의 유대인을 학살했다. 얄타회담으로 폴란드 국경이 획정되었고 국제 연합 결성 여부와 소련의 대일 참전이 결정되었다. 스탈린이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를 가져가는 것을 루스벨트가 승인하였고 종전 후 200 만명의 우크라이나인들이 귀국하였다. 다만 정치적 이유로 1만 명이 넘는 이들이 처형 당했고 35만 명이 중앙아시아, 극동 등지로 끌려갔다.
 
1985년 고르바초프가 실행한 글라스노스트, 페레스트로이카 개혁이 부메랑이 되어 소련은 해체되었고 우크라이나도 이 결과로 독립하게 되었다.
다만 우크라이나의 독립이 피를 흘리지 않고 평화롭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때론 무임승차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과연 우크라이나의 독립은 거저 얻어진 것인가. 그렇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 같다.
이들의 독립은 몇 세기에 걸쳐 문을 끊임없이 두드렸기에 얼마만큼의 시련과 고난이었을지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우리도 상대적으로 훨씬 짧은 기간 타국에 의한 지배를 받은 역사를 지녔지 않았나. 때문에 결코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이 책이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온전히 담아냈을까 하면 솔직히 평가가 어렵다.
우크라이나는 대부분 러시아사 하에서 다루어져 선입견 하에 쓰여진 역사였기에 단독의 우크라이나 역사에 대한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이 책에 대한 평가는 보류할 수 밖에 없다.
향후 더 많은 자료들이 쏟아져 평가할 수 있는 날을 기다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으로 책을 읽으며 내내 들었던 생각은 역시 우크라이나의 평화에 대한 것이었다.
더는 피를 흘리는 이들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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