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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낯선 삼일운동

category 리뷰/책 2022. 3. 4. 17:27

올해는 삼일운동 103주년이다.

기념하여 눈에 띈 도서인 이 책을 부랴부랴 읽었다.



기존 연구나 매체 활용에서는 삼일운동에 참여한 인물들 중 민족대표 33인을 비롯한 엘리트들에 주목된 면이 있다.

참여 인구로 따지면 67% 정도로 민중의 비율이 높음에도 엘리트에 주목을 한 건 상대적으로 이들은 이름이 알려져 있기에 남아 있는 자료가 많고 그들에 대한 평가도 양에 있어서 많아서일 것이다.

민중들의 자료는 지역사에서 간혹 다루어지지만 이마저도 모두가 다루어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사료로 이용되는 인터뷰나 구술도 100% 확신성을 갖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 때문에 언제나 오류 가능성을 생각하고 접근해야 함을 인지해야 한다.

그래도 최근 들어 삼일운동에서 민중을 주목한 연구가 늘어나는 것은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사건의 맥락이자 줄거리인 큰 그림을 그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에만 매몰되면 사람을 놓치게 될 수 있다.



책의 내용은 챕터별로 다른 이야기라 이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각 챕터별 중심 인물들이 생소할 수 있고(몇몇 인물 제외) 주변 관계 인물은 더더욱 생소할 수 있다.

물론 저자가 최대한 친절하게 풀어서 설명은 했지만 그럼에도 낮설어서 인물의 관계를 정리하고 상황을 그려가면서 보지 않으면 사건이 잘 안 들어올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책의 분량은 적었는데 읽으면서 정리하느라 시간이 더 걸렸다.

그리고 책에 삼일운동 DB의 출처들이 나오지만 더 상세한 내용을 원한다면 직접 DB에서 관련 내용을 찾아보고 사건에 대한 그림을 그려보는 것을 추천한다.



본문 내용 중 인상적이었던 것 몇 가지를 꼽아본다.



2019년 개봉작 영화 항거에는 여성 만세 시위자들이 등장한다.

유관순의 수인번호는 371로 등장하는데 이는 수인번호가 아니라 사진(문서)보존원판번호라고 말한다.

당시 삼일운동으로 검거된 많은 이들의 사진이 일제감시대상카드에 올라와 있는데 이를 비교해보고 검토한 결과이다.

조선감옥령시행규칙 18조(1912.3 제34호)에 따르면 입감자에게 번호를 부여하는데 번호표를 상의 옷깃이나 가슴에 부착한다고 되어 있다.

수인번호는 수인복에 부착된 번호, 보존번호는 사진 원판 뒷면에 쓰인 번호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임명애, 어윤희, 유관순 사진의 보존번호가 연속하는데 어윤희 수감사진이 4월 1일에 찍었다고 되어 있으나 해당 날짜에 유관순은 병천리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했으므로 같이 찍은 사진이 아니다. 따라서 후대에 보존번호를 부여하면서 여성참여자 일부의 보존번호를 모은 것으로 보인다.



황해도 수안군 사건의 중심인물인 홍석정이 있다.

1919년 3월 3일 낮 12시 한병익은 황해도 수안군 수안면 만세시위에 참여한 뒤 오후 4시경 출발하여 밤새 걸어 다음날 오전 5시쯤 곡산군 곡산면에 도착하여 오전 10시 시위에 참여했다.

두 곳의 직선거리는 약 27km인데 산길로는 90리쯤 된다. 

한병익이 그 정도 걸렸는데 54세인 홍석정(전 천도교 수안교구장)은 3월 2일 새벽 수안면을 출발하여 곡산면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고 돌아와서 3월 3일 오전 6시 수안면 만세시위에 참여했다.

당시 해주 지방법원 검사는 그 시간에 90리 되는 길을 왕복한다는 게 말이 안된다며 다른 사람일거라 의심했다.

홍석정은 하루 꼬박 180리 넘게 산길을 걸으면서 독립선언서를 전달했고, 길가는 이들에게 만세시위 참가를 역설했다.

당시 판결문에는 홍석정의 연락을 받고 시위에 참여했다는 인물이 많이 보인다.

홍석정이 홍길동이 아니고서야 이는 말이 되지 않으므로 연락을 받은 이들은 직접적이 아니라 간접적인 연락일 수 있을 것 같다고 저자는 말한다.

수안 만세시위 사건은 1919년 하반기 해주 지방법원에서 경성 고등법원으로 이관되었는데 이는 내란죄로 다루기 위해서였다.

만세시위 후 수안 천도교인은 분열로 쪼개지며 시련을 맞이한다.



수원군 장안면 우정면 만세시위. 현재는 화성시로 편입된 지역이다.

장안면 우정면 만세시위는 삼일운동을 대표하는 격렬한 시위로 그간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지역이다. 폭력시위의 면에서 자주 언급되곤 한다.

우리는 보통 삼일운동 시위를 비폭력 운동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은 사례가 많은데 이 시위가 대표적이다.

장안면 우정면 만세시위 주동세력은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하나는 지역유지 그룹이고, 다른 하나는 농촌의 하층민, 개간 노동자, 외지인 같은 농촌의 기층민중이었다.

전자는 조직을 통해 장안면 주민을 동원했고, 후자는 마을을 돌아다니며 주민과 동료를 모았다.

이렇게 위와 아래가 함께 만세시위를 하는 경우가 드문 것은 아니지만 장안면 우정면의 만세시위가 특별한 것은 기층민중이 주도권을 잡았고 이것이 시위의 방향을 결정했다는 것일 것이다.

시위 참가가 대세로 흘러갔지만 이 과정에서 동원을 해석해야 한다.

피의자 대부분이 협박에 못 이겨 나갔다는 진술을 했다고 한다. 이런 모습은 농촌에서 특히 많이 보였다고 하는데 이런 협박과 동원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저자는 주목했다.

강제는 사람들의 봉기에 대한 의욕을 돋우는 역할을 했다.

다만 이런 동원을 자주성이나 주체성 결여로 보는 것은 근대인의 편견이라고 말한다. 

강제에 매개된 공동체적 규제, 관계성은 민중이 움직이는 힘에 의거한다고 볼 수 있다.



본문의 내용만큼 보론을 실어둔 것이 인상적이었다.

삼일운동의 사료에 대한 비판, 그리고 황해도 수안 만세시위 사건에 대한 재구성, 삼일운동과 학력주의의 제도화.



삼일운동의 사료에 대한 비판은 다음과 같다.



삼일운동 100주년 기념으로 만들어진 온라인 데이터베이스인 삼일운동 DB를 기억할 것이다.

2019년은 삼일운동 100주년으로 온라인 DB 구성 뿐 아니라 관련한 전시 등도 많았고 많은 저서들도 출간되었다.

DB 작업은 많은 노력이 필요한 작업이다. 나도 당시 사이트를 확인하고 감동했던 기억이 있다.

삼일운동의 공식적인 온라인 DB가 생겼으니 이후에는 손쉽게 DB를 검색하여 1차 자료를 정리할 수 있다.

그런데 삼일운동 100주년 때 출간된 도서 중 여러 저서에서 사료를 사용한 것 중에 출처가 없거나 무분별적으로 수용한 것이 있음을 비판하였다.

이런 경우는 자주 있다. 

하지만 역사 연구자가 출처가 없는 사료를 그대로 가져다쓰는 경우 문제가 발생한다. 

연구자조차 검증을 하지 않고 무비판적으로 사료를 가져다 쓴다면 대부분의 역사책을 읽는 독자들이 검증을 거치지 않는다고 가정할 때 오류 발생 가능성을 낳는다.

문제는 이런 독자가 늘면 늘수록 전방위적으로 확산된다는 점이다.

저자는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수안면 만세시위에 대한 기존 연구와 저자의 시각의 차이가 커서 기존 연구에 대한 내용을 검토하고 저자의 시각에서 재구성한 사건을 담은 논문을 실었다.



삼일운동과 학력주의의 제도화는 삼일운동과 조선총독부의 대책, 엘리트와 민중의 대응을 담은 글로 삼일운동 전후의 맥락을 살펴보는 데 도움이 될 내용이다.



이제는 삼일운동도 어느덧 100년도 훌쩍 지난 일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꾸준히 기록을 찾아내고 발굴하지 않으면 점점 더 잊혀질 수 밖에 없다.

시간이 지나면 기록조차 사라질 수 있기에 1차 자료를 꾸준히 발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렇게 해당 자료를 다양한 시각으로 재조명하는 작업들이 역사를 공부하는 이들에게 새로운 자극을 줄 수 있기에 반갑고 좋은 일이라 여겨진다.

물론 평가는 독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