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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대한계년사 9

category 리뷰/책 2022. 3. 14. 10:57
1908년부터 1910년까지의 3년 간의 역사를 다뤘다.
 
그 어떤 이야기보다 고통스럽고 힘겨운 스토리였다.
아는 내용인데도 마주 대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1. 전명운과 장인환의 미국인 스티븐스 암살
 
정부 고문관 스티븐스가 휴가로 제 나라에 3월 21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지역 신문기자와 인터뷰했다.
인터뷰 기사가 실린 뒤 샌프란시스코의 우리나라 인민들은 분노하지 않은 이들이 없었다. 3월 22일 샌프란시스코 공립관에서 공동회가 열렸고 대표 최유섭 문양목 정재관 이학현 등 네 명을 보내 스티븐스를 방문토록 했다. 네 사람은 스티븐스에게 우리나라 정세를 묻고 신문 기사에 대해 따져 물었으나 스티븐스는 잘못을 바로잡을 게 없다 말했다. 네 사람은 화를 참지 못하고 스티븐스를 폭행했으나 주변 이들이 말려 겨우 진정하고 사태 수습 후 돌아갔다.
3월 23일 스티븐스가 워싱턴으로 가기 위해 오클랜드 정거장에 도착했을 때 전명운과 장인환이 세 발의 총을 쏘았다. 스티븐스는 넘어져 병원으로 실려갔으나 사망하고 장인환은 전명운이 쏜 총에 어깨에 부상을 입었다. 12월 23일 두 사람의 판결은 장인환 25년 징역, 전명운 95개월 징역에 처해졌다. 애국심에서 한 행동이 인정되어 정상 참작된 것이다.
 
스티븐스는 말했다.
 
"한국에는 충신 이완용이 있으며 또 이토 히로부미 통감도 있으니 한국과 동양의 행복입니다. 내가 한국의 형편을 보건대, 태황제의 허물이 너무 많았습니다. 고집 센 무리들은 백성의 재산을 도둑질했으며, 인민은 어리석어 독립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니 일본이 빼앗아 가지지 않았더라도 일찍이 러시아가 강제로 합쳤을 것입니다. 나는 일본의 정책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 - P24
 
 
2.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1909년 10월 26일 러시아 대장 대신은 극동지역을 시찰하기 위해 하얼빈에 왔다. 이토 히로부미는 그와 만나 만주의 일을 논의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하얼빈에 도착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걸어서 각국의 외교관들, 인민들 앞으로 와서, 악수를 하고 일본인들이 늘어서 있는 곳으로 돌아섰다. 갑자기 러시아 군대가 있는 쪽에서 총탄이 발사됐다. 이토 히로부미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사망했다. 안중근은 체포되었다.
11월 3일 안중근 및 이 사건에 관련된 8명이 여순에 도착했다. 한 대의 마차에 나누어 싣고 시가지를 거치지 않은 채 산길을 돌아 곧바로 여순의 감옥서로 향했다.
1910년 3월 26일 안중근은 사형에 처해졌다. 그는 사형장에서 동양의 평화에 있는 힘을 다하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안중근의 두 동생은 그 시신을 귀국시켜 그의 고향에 장사지내게 해달라고 간청했으나 일본인이 허락하지 않아 여순의 공동묘지에 장사지냈다. 
 
여러 사람들은 아내나 자식 일에 이르게 되면 슬퍼하고 눈물 흘리며 고향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 유독 안중근만은, 나라를 걱정하는 뜻을 가진 사람으로서 아내나 자식은 생각하지 않으며, 암살 사건은 달리 관계된 사람은 없고 오직 자기 한 사람의 뜻이었다고 했다. - P53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은 가득찬데, 오히려 또 간사하고 교활한 수단으로 '일본의 보호정책에 한국의 인민들이 기쁜 마음으로 따른다'며 각국에 발표하여 세계를 속여넘겼다. 이제야 한국의 뜻 있는 사람들이 이토 히로부미의 잔인한 행위와 한국인들의 복종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널리 드러내어 알리기 위해 많은 수가 외국으로 나아갔다." - P130
 
 
"나는 사천 년의 우리 조국을 위하여 이천만의 우리 동포를 위하여 동양 전체의 평화를 위하여, 우리 백성과 나라의 권리를 짓밟고 우리 동양 평화를 어지럽게 하는 간악한 도적을 죽이는 하나의 거사, 이것이 나의 목적이다. 이와 같이 바르고 옳으니, 나는 국민의 커다란 의무로서 살신성인하려고 한 것이다." - P136
 
 
3. 이재명 등의 이완용 암살 시도
 
1909년 12월 22일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이 벨기에국 황제 레오폴드 2세 추도회 참석 후 돌아가기 위해 나섰다. 이재명이 길 옆에서 나와 단도를 휘두르며 인력거 앞으로 달려들었다. 인력거꾼을 찌르니 그 자리에서 바로 죽었다. 수레가 뒤집히고 이완용이 허리와 어깨가 찔리자 순사들이 이재명에 맞서며 상처를 입혀 이재명은 결국 붙잡혔다.
1910년 5월 13일 이재명 등에 대한 공판이 열렸다. 방청인들이 1천여 명이었는데, 방청권을 얻은 사람은 1백 여명을 넘지 않았다. 변호사 안병찬, 이면우, 오사키 유노쇼, 이와타 센소, 기오가 줄지어 앉았다. 한국과 일본의 신문기자 수십 명도 자리했다. 독일 통신사의 사원 보리안(정확한 이름이 확인되지 않는다)도 있었다. 이재명의 아내 오인성과 백 소사 등 부인 다섯이 있었다. 사법청 관리 10여 명과 독일의 총영사도 자리했다.
최종 선고로 이재명은 사형, 김정익 김병록 이동수 조명호는 징역 15년, 오복원 전태선은 징역 10년, 김용문 박태현은 징역 7년, 이응삼 김병현 김이걸 이학필은 징역 5년에 처해졌다.
 
"이완용이 죽어 마땅한 죄는 하늘과 땅에 가득하여, 낱낱이 지적할 겨를도 없다. 5조약의 이전과 7조약 이후의 드러나지 않은 죄는 일일이 기억할 수도 없으므로 이쯤에서 그만두겠다." - P218
 
 
"이재명이 세상에 있을 때에는 한 사람의 이재명이지만, 죽은 뒤에는 수천 수백의 이재명으로 바뀌어져 다시 살아나기 때문이다. 다만 여러분들에게 간절히 바라는 것은, 빨리 통감을 없애버리고 당장 5조약과 7조약을 폐기하며, 그밖에 옮겨지거나 빼앗긴 모든 우리 나라의 권리나 물품을 일일이 돌려 받아, 뒷날의 두려워할 만한 일을 벗어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 P224
 
 
국민들에게는 그 어떤 시도들보다 통쾌한 소식이었겠지만 이들이 암살 또는 기도 이후 법정에서 하는 이야기와 암살 배경 스토리는 감정의 동요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그리고 변호를 맡은 안병찬 선생께 감사하는 마음이 컸다. 변호인으로써 최선의 변론을 하는 모습은 정말 뭉클했다. 안병찬 선생은 안중근, 이재명 재판에 변호를 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안중근 의사는 일본인이 아니면 변호 자체가 거부되어서 달려갔음에도 변호를 할 수 없어 무척 슬퍼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재명 변호는 진행은 되었으나 1심의 결과 그대로 사형이 내려졌으니 마음이 너무 아프셨을 것이다.
 
 
4. 일진회의 (끊임없는) 한일합방 상소
 
전 일진회 부회장 홍긍섭이 이토 히로부미 장례식에 참석했을 때, 일진회 총재 송병준과 한일합방의 문제에 대해 은밀히 논의했다. 귀국해서 일진회 회장 이용구와 이 일에 대해 은밀히 논의했다. 당시 한국과 일본이 연합한다는 ‘한일연방’의 이야기와 한국과 일본이 한 나라로 합친다는 ‘한일합방’의 이야기, 일진회 회원들이 화계사에 모여 ‘합방선언서’를 기초했다는 이야기 등이 신문 지상에 오르내리며 인심이 떠들썩했다.
1909년 12월 2일 밤 이용구는 일진회 본부 앞에서 총회를 열었다. 참석한 회원은 수백 명이었다. 한 회원에게 성명서를 낭독시키게 한 뒤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발표했다.(이때 여러 회원은 갑자기 이 말을 듣고 까닭을 알지 못하여 대답하지 못했다. 이용구는 회원들이 말하지 않는 것을 인정한다고 생각해 만장일치 가결이라 했다.) 우편으로 성명서를 내각과 부 원 청 및 13도 관찰사와 군수, 서울과 지방의 각 사회단체, 학교와 신사들에게 발송했다.
12월 3일 밤 대회에서 한일합방의 문제를 결의하여 황제에게 상소했다. 또 한 통의 상소를 통감 소네 아라스케에게 보내 일본 황제에게 아뢰어 달라고 부탁했다. 또 이완용과 소네 아라스케에게도 편지를 올렸다.
 
일진회는 1904년 8월 송병준이 일본군을 배경으로 유신회가 조직되었다가 일진회로 개칭된 후 9월에 동학 잔존 세력이던 이용구의 진보회를 흡수하여 최종 통합된 조직이다.
따라서 천도교 세력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상소로 인하여 일진회 회원 중 많은 이들이 탈퇴하고 떨어져 나가는 상황이 발생되었다. 손병희, 오세창, 권동진 등도 이 때 일진회와 결별하게 된다. (손병희 등이 일진회에 몸담았다는 것이 사실 그들의 인생의 오점처럼 느껴지는 부분이다. 물론 이후 그들은 모두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나는 이전부터 일진회라는 세력 자체의 기원과 이후 조직이 전개되는 과정이 매끄럽고 깔끔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물론 이 때의 시대적 상황이 그렇기도 했고 조직이 여러 번 변화를 겪었던 과정이 있지만 그럼에도 껄끄럽고 찜찜한 구석이 많다.
하지만 어쨌든 한일합방 청원 상소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잘못이다.
 
같은 민족이면서 마치 일본인의 입장 같은 발언을 일삼는 그들을 보라.
 
동등한 정치적 권리를 획득하는 것을 법률에서 '정치적으로 나라를 합친다'고 합니다.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합병'은 나라의 영토를 큰 나라에 딸려 붙이는 것이라느니 갖가지 다른 잘못된 말로 선동하면서, 인심을 의혹시키고 나라의 방침을 어지럽게 하여 갈수록 헛갈리게 합니다. 앞길을 아득하게 하는 어리석은 무리들은 일일이 거론할 필요가 없습니다. 노련한 정치가와 의분에 찬 뜻 있는 선비들은 이 일에 대해, 일본의 한국에 대한 정책이 이를 너그럽게 인정할지를 알지 못하여 애써 속을 태웁니다. 일본의 황실과 정부의 여론이 이를 너그럽게 인정하는 것은 우리 이천만 국민 모든 사람이 진실로 호소하고 요청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 P68
 
근대 세계의 대세가 크게 바뀌고 국제 경쟁이 더욱더 격심해져 이긴 자는 흥하고 패한 자는 망하는데 이것은 진화의 법칙으로 보아 당연한 것입니다. 인도 미얀마 자바 필리핀이 멸망한 것이나 베트남 타이가 거꾸러진 것, 중국이 쇠퇴해진 것이 다 여기에서 말미암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 P80
 
 
이들의 논리의 기저에는 진화론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다. 우리는 약하고 일본은 강하다라는 논리, 그 흐름 속에 대한제국은 사직과 백성을 위해 일본에 합쳐져야 보전될 수 있다라는 흐름으로 가게 만든다. 당시 일진회는 전국적으로 80만 명이 넘는 회원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합방 청원 상소 이후 채응언 등 의병들은 들불처럼 일어났고 이용구 등을 처단하라는 상소가 끊이지를 않았다.
이용구는 합방 청원이 거절당했으나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것을 생각해 이후 연이어 상소를 올린다.
하지만 이에 반대하는 상소, 국민대연설회가 줄기차게 이어졌고 이들을 처단하라는 목소리는 줄어들지 않았다.
 
 
책을 읽으면서 잘 울지는 않지만 도무지 눈물이 터져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번 그랬는데 한 번은 안중근의 변론과 사후 과정.
다른 한 번은 이재명의 변론 후 바로 다음 장에 나오는 한일강제병합 소식이다.
 
두 분 모두 재판 과정에서 결코 굽힌 적이 없고 시종일관 기개가 있었고 당당했다.
나라가 힘들고 어려울 때 내 삶을 생각하지 않고 분연히 떨치고 일어선 분들이다. 남에게 손벌리거나 아첨하거나 그러기 쉬웠을텐데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을 한 이들이다.
 
비록 1910년 대한제국은 망했으나 그 과정이 진행되기까지 선택의 순간들은 많았다.
국가의 선택의 순간들.
개개인의 선택의 순간들.
당시의 선택들이 그 당시만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현재는 그 선택에 따른 평가를 각기 받게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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