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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친절한 복희씨

category 리뷰/책 2013. 7. 30. 22:00

1. 초서


1) 그리움을 위하여


[39] 나는 동생을 더는 부릴 수 없다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그게 그렇게 기분 좋은 일인 줄 몰랐다. 

나는 동생에게 항상 베푸는 입장이라는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상전의식이지 동기간의 우애는 아니다.

예전부터 상전들의 심보란, 종에게 아무리 최고의 인간 대접을 한다고 해도 일단 자신의 거룩한 혈통이 위태로워졌을 때면 종이 기꺼이 제 새끼하고 바꿔치기 해주길 바라는 잔인무도한 것이 아니던가.

나는 상전의식을 포기한 대신 자매애를 찾았다.


2) 그 남자네 집


[66] 나는 그날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에서 창백하게 일렁이던 카바이드 불빛, 불손한 것도 같고 우울한 것도 같은 섬세한 표정, 두툼한 파카를 통해서도 충분히 느껴지는 단단한 몸매, 나는 내 몸에 위험한 바람이 들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피차 동정 같은 건 하지 않았지만 닮은 불운을 관통하는 운명의 울림 같은 걸 감지한 건 아니었을까.

나는 마치 길 가다 강풍을 만나 치마가 활짝 부풀어오른 계집애처럼 붕 떠오르고 싶은 갈망과 얼른 치마를 다독거리며 땅바닥에 주저앉고 싶은 수치심을 동시에 느꼈다.


3) 마흔아홉 살


[107] 모든 인간관계 속엔 위선이 불가피하게 개입하게 돼 있어. 꼭 필요한 윤활유야.


4) 후남아, 밥 먹어라


[140] 녹물은 안 들었는지 몰라도 밥 뜸 드는 냄새에는 무쇠 냄새도 섞여 있었다.

매캐한 연기 냄새도, 연기가 벽의 균열을 통과하면서 묻혀온 흙냄새도, 그 모든 냄새와 어우러진 밥 뜸 드는 냄새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아아 이 냄새, 이 편안함, 몇 생을 찾아 헤맨 게 바로 이 냄새가 아니었던가 싶은 원초적인 냄새, 이열치열이라더니 음식 때문에 뒤집힌 비위를 부드럽게 위로하는 이 편안한 냄새.

어머니는 왜 아무 연고도 없는 이리로 왔을까. 나는 또 생전 처음 맡아보는 이 냄새가 왜 이렇게 좋은가.


5) 거저나 마찬가지


[177] 나는 비로소 '거저나 마찬가지'를 심각하게 의심하기 시작했다. 거저면 거저고 아니면 아니지 마찬가지란 무엇일까.


6) 촛불 밝힌 식탁


[195] 아무리 부모 자식 간에도 감시하는 마음으로 지켜본다는 건 안 좋은 일이었다. 


7) 대범한 밥상


[214] 상식에 어긋난 이 일련의 있을 수 없는 일들을 모두 다 돈 욕심으로 풀자. 매듭을 잘 드는 칼로 내리친 것처럼 세상만사는 의외로 간단하고 어이없어졌다.


8) 친절한 복희


[264] 세상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내가 죽기도 억울하고, 누굴 죽일 용기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너 죽고 나 죽기를 선택한다. 

나는 오랫동안 간직해온 죽음의 상자를 주머니에서 꺼내 검은 강을 향해 힘껏 던진다. 그 갑은 너무 작아서 허공에 어떤 선을 그었는지, 한강에 무슨 파문을 일으켰는지도 보이지 않는다. 

그가 죽고 내가 죽는다 해도 이 세상엔 그만한 흔적도 남기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나는 허공에서 치마 두른 한 여자가 한 남자의 깍짓동만 한 허리를 껴안고 일단 하늘 높이 비상해 찰나의 자유를 맛보고 나서 곧장 강물로 추락하는 환을, 인생 절정의 순간이 이러리라 싶게 터질 듯한 환희로 지켜본다.



2. 리뷰

이 책을 읽어 가면서 든 생각은 박완서 선생님의 소설을 이제야 읽었다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과 안타까움이었다.

그래도 고인의 마지막 유작인 이 작품을 이제라도 읽게 되었으니 이번 기회가 소중하고 감사하게 느껴졌다.


친절한 복희씨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이 중년을 훌쩍 넘긴 노년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각 단편의 이야기들을 보면서 과연 내가 그 즈음의 나이가 되면 어떻게 될까 궁금해졌고  노년에 대해서는 그동안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 책을 통해 간접 경험을 할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다.

하지만 노년의 이야기라 해도 우리가 주변에서 보고 느끼는 일상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에 편안하게 마주할 수 있었다.


유독 우리 사회에서 노년에게 제약을 주는 것들이 많지 않나 싶다. 노인을 공경하자 라고 말하지만 실상 우리는 그 반대로 귀찮고 버거운 존재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불편하지만 진실이다. 

이 책에서도 욕망, 돈, 가족 등등의 소재를 다루고 있는데 다만 이를 무겁지 않고 해학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다 해도 뒷맛은 결코 가볍지 않은 소설이었다.


9개의 단편들 중 기억에 남는 단편은 《후남아, 밥 먹어라》와 《그래도 해피엔드》였다.   

<후남아, 밥먹어라>는 집안의 가난으로 결혼 후 이민을 간 셋째딸이 치매에 걸린 엄마를 찾아오면서 생긴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치매에 걸려 가족들도 못 알아본다던 엄마가 걱정스러워  달려온 주인공과 보고 싶어하던 셋째딸을 만나 잠시나마 기억을 되찾은 엄마를 보면서 핏줄이라는 게 이렇게 끈끈하구나 싶었다. 

무엇보다 엄마가 지은 밥 냄새를 맡으며 과거를 회상하는 주인공의 모습에 동화되어 나도 울컥하게 되는 무언가가 있어 더 감동적이었다.


《그래도 해피엔드》는 서울 외곽에서 사는 주인공이 서울에 동창 모임이 있어 올라오게 되면서 겪는 일화를 담고 있는데 짧지만 임팩트가 있었다. 

길치이자 방향치인 나는 늘 길을 헤매이기 일쑤다. 서울 근교권에 살지만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거꾸로 가는 방향의 지하철을 타게 되고 지도를 보아도 어디가 어디인지 방향을 감지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시간을 허비하여 약속 시간에 늦을 까봐 평소 길을 아주 일찍 나서는 등 철저히 준비를 하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주인공의 심정이 이해가 되었고 동정이 갔다. 또한 우여곡절 끝에 모임 장소에 도착한 이후의 친구들과의 대화도 왠지 상상이 되어 피식 웃음이 났다.

그녀가 돌아가는 길도 무사하길 건투를 빌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마음을 찜찜하게 만들었던 단편이 있었다면 《촛불 밝힌 식탁》과 《친절한 복희씨》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촛불 밝힌 식탁》은 교장직에서 퇴임한 노부부가 자식 집 근처에 집을 구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이다. 저자의 날카로운 시선이 내 가슴도 서늘하게 만들었다. 나의 노년도 자식들에게 부담스러운 존재로 비춰지는 것은 아닐까 무서웠다. 그리고 나도 부모님께 무심코 이런 행동을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들여다보게 했다. 슬프고 괴로웠다.


《친절한 복희씨》는 시골에서 상경한 주인공이 가게 주인의 후처로 들어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제발 친절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복희씨가 나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왜 그렇게 살까 답답한 마음이 일었지만 그녀가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았고 마지막에는 거동이 불편해진 가게 노인을 향해 제대로 반기를 드는 늬앙스를 풍겨서 그나마 마음이 풀렸다. 나는 여성의 권위에 있어서 상당히 민감해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소설의 문장력과 묘사력은 닮고 싶을 만큼 탁월했다. 나는 언제 한번 이렇게 글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풀어내는 능력과 묘사하는 능력은 소설에서 내가 가장 매력을 느끼는 부분이다. 소설 속에서 내가 배우고 싶은 것들이 그런 것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름다운 문장에 매료되는 특성을 가졌으니까.


노년의 일상의 모습은 이토록 다양했다. 우리들이 일상을 보내는 것처럼 그들도 하루를 평범하게 때로는  특별하게 보내고 있는 것이다. 

사람 사는 것이 다 거기서 거기구나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친절한 복희씨

저자
박완서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2007-10-14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우리 삶의 지평을 넓혀온 박완서 문학 37년 화수분처럼 끊임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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